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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연한 출발 May 21. 2022

다한증 소녀의 독립 투쟁

영화 <태어나길 잘했어 The slug>2020 리뷰

 1998년 혼란스러운 사회 변화 속에서 불운한 삶의 무게를 짊어진 춘희는 느리지만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다. 민달팽이는 여느 달팽이처럼 집이 없다는 것을 불행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춘희는 삶의 어느 단계에 이르면 어깨를 누르던 집을 벗어 던지고 민달팽이처럼 자유롭게 살아갈 것이다. 


"춘희 씨, 손에 꽃이 피었네요"


 춘희는 다한증을 앓고 있는 고등학생 소녀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IMF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삼촌 가족의 집에 얹혀 살아간다. 춘희가 그 집에서 차지할 수 있는 공간은 2층 다락방 정도다. 삼촌 부부와 친척 오빠, 동생은 자신을 무시하고, 구박하고, 괴롭힌다. 학교에선 다한증 때문에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한다. 친구들과 폴카 댄스를 추고 싶지만 피해가 갈까 봐 혼자 추고 싶다고 말하는 춘희다. 세상에 의지할 사람은 할머니뿐이었지만 할머니는 항상 곁에 있어줄 수 없다. 삼촌 가족이 좋은 아파트로 이사 갈 동안 춘희는 낡은 집에 혼자 남아 집을 지킨다. 춘희는 결핍과 부재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의지할 곳 없이, 자신을 지원해주고 격려해주는 관계없이 홀로 세상을 헤쳐나가야 하는 인물이 세상살이 앞에서 홀로 버텨야 한다. 손과 발에서 땀이 물 흐르듯 나는 다한증은 상징적인 설정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외삼촌 가족들은 1998년을 관통하는 평범한 가족이다. 사촌 오빠는 사회 운동, 데모를 하다 실패해 좌절하는 인물, 여동생은 엇나가고 반항하는 사춘기인 인물, 외숙모는 그런 가족들 틈에서 고통받고, 고달파하는 인물 모두 우리 곁에 있을법한 인물들이다. 


 <태어나길 잘했어>라는 제목은 1인칭으로 주인공이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태어난다는 건 본인의 선택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런데 태어나고 보니 춘희는 힘들고 어려운 조건으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춘희를 홀로 남기고 돌아가셨고, 외삼촌 가족은 춘희를 짐처럼 생각한다. 자신의 선택 밖의 환경들이 춘희를 힘들게 한다. 춘희의 선택도 부정적인 결과로 돌아온다. 다한증 수술 대신 주황과 함께 세미나를 선택했지만 사기였다. 춘희는 주황이 자신을 불쌍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고 생각해 헤어짐을 말한다. 이별은 아픔을 낳는다. 갈등의 끝에서 춘희는 과거의 자신에게 결국 상처 주는 말을 한다. 


"왜 그때 혼자 살아남아서 힘들게 해 같이 죽었어야지!" 
"어쩐지 요즘 너무 행복하다 했어......"

 

 이는 자신의 인생을 부정적으로 인식해 온 춘희의 내면을 알 수 있는 대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어나길 잘했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춘희의 자신의 삶은 언제나 불행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삶이 춘희에게 선물을 줘야 한다. 그 선물은 춘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달려있다. 그래도 살아보니 나에게 즐겁고, 행복한 일이 일어났다는 기대로 제목을 해석해 볼 수 있다. 영화 속에서 춘희가 과연 자신의 의식을 뒤집을 수 있는 경험과 선택을 했는가는 살펴봐야 한다. 


 긍정적인 내면의 변화가 있어야 자신의 의지로 하는 선택에 변화가 있을 수 있다. 자신에게 투룸 정도 구할 수 있는 돈을 주며 집을 구하라는 사촌 오빠에게 그동안 울분으로 담아두었던 속마음을 속사포처럼 쏟아낸다. 사촌 오빠와 춘희의 대화는 갈등의 형태를 띠고 있다. 춘희는 외삼촌 가족들에게 받았던 외로움이나 차별, 무시받았던 감정을 솔직하게 이야기했고, 사촌 오빠는 그동안 도움을 준 것이라고 말한다. 서로 속마음을 꺼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서로 이해하는 시간은 갖지 못했다. 결국 사촌 오빠가 준 돈으로 집을 구할 것이고, 완전한 독립은 아직 이루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다락방에서 나옴으로써 희망은 보인다.

 그 언어들이 사리에 맞는지, 논리적인지, 타당한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순간 상처받은 자신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에게 선물이 될 수 있었던 주황에게 헤어지자고 말하는 잘못을 저질렀지만 그래도 다시 춘희는 주황에게 신발을 보내며 마음을 전하는 용기를 보여준다. 이런 선택들이 춘희의 앞으로의 인생에 순간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 

  춘희는 노숙자에게 라면도 주고, 신발도 주고, 빵도 준다. 노숙자와의 관계는 그 정도다. 춘희가 스스로 도움을 주고 베풀 수 있는 관계. 노숙자로부터는 어떤 원망도, 차별도, 부정적인 감정도 받지 않는다. 온전히 춘희 스스로 맺고 끊을 수 있는 관계인 것이다. 


 영화 속 춘희는 너무 사랑스럽고 단단한 존재다. 어린 춘희를 보고 있자면 참 담담하고, 힘듦을 내색하지 않고 일찍 어른이 된 모습으로 응원하고 싶어 진다. 성인이 된 춘희가 주황과 함께 있는 모습은 사랑스럽고, 춘희의 상처받은 과거를 아는 관객은 그런 춘희의 모습이 입체적이고 매력적으로 느낀다. 영화 마지막에서 이제 막 달걀의 껍질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오려는 춘희의 모습을 보고 희망을 느낀다. 

 하지만 제목이 주는 온전한 치유, 극복, 깨달음을 기대하는 관객이 영화를 보고 의문을 가질 수 있는 여지가 아쉬움을 남긴다. “차라리 죽지 그랬냐”며 어린 춘희에게 독설을 내뱉는 춘희에서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어린 춘희를 안아주는 성인 춘희 사이의 거리가 공감의 여운 없이 급격하게 이루어진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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