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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0년 오늘의 우리는

미래에 대한 시나리오

by 경성이

동수는 다섯 시가 되어 비행기에 올랐다. 그동안 모아둔 돈으로 일주일 정도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동수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이 나라를 출국하는 비행기 창문을 너머 바라보았다. 비행기는 서서히 활주로를 달리기 시작했고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

“저... 혹시 저 어때요?”

“네? 무슨 말씀이신지….”

“혹시 여자친구 없으시면 저랑 한 번 만나보는 거 어때요?”

이게 웬 횡재냐. 동수는 그녀를 쳐다봤다. 가로등 아래 오목조목한 이목구비가 작은 얼굴에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고 작은 체구에 투피스 치마 정장을 입고 있었다. 호기심에 가득 찬 두 눈이 불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동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동수는 그녀에게 연락처를 줬다. 그녀는 기뻐하며 연락하겠다고 말하고 사라졌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 동수는 얼떨떨했지만 이제야 자신의 매력이 먹히는 사람이 있구나 싶어 기분이 좋았다. 그래, 나, 이만하면 괜찮지. 키도 크고 얼굴도 호감형이고 성격도 좋고. 집으로 돌아와 자려고 누웠는데 괜스레 설레고 가슴이 뛰었다. 나에게도 사랑이 오는 건가?

그녀에게서 연락이 온 건 어느 점심때였다. 주말에 약속을 잡고 최대한 멋지게 차려입고 나갔다. 그녀의 이름은 이 수지였고, 시청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한다고 했다. 동수는 이렇게 연락 주셔서 감사하지만, 자신은 아직 번듯한 직장을 찾지 못했다고 했다. 수지 씨는 상관없다고 자기가 데이트비용을 모두 부담하겠다고 한번 만나보자고 했다. 동수는 좋다고 대답했다. 수지 씨는 미소 지으며 좋아했다. 그녀를 보고 있으니 동수는 무척 설레었다.

동수는 매일 오후부터 고깃집에서 아르바이트했기 때문에 수지 씨는 주말 오전에 만났다. 수지 씨는 귀엽고 쾌활했고 질문이 많았다. 동수가 제대로 된 직장을 찾는 데 도움을 주고 싶다고 했다. 동수는 그동안의 근심과 걱정을 모두 잊고 행복했다. 첫 연애였다. 매일 하루가 꿈같이 지나갔다. 같이 등산도 가고 놀이공원도 가고 카페에서 같이 책도 읽었다.

수지는 마치 예전부터 잘 알던 사람처럼 동수를 잘 이해해 줬다. 동수의 걱정거리도 들어주고 동수의 장점도 많이 말해주고 다정하게 바라봐줬다.

“수지 씨는 제 어디가 그렇게 좋아요?”

“동수 씨는 마음이 따뜻하고 좋은 사람 같아요. 물론 처음에는 외모가 딱 제 스타일이었어요.”

이렇게 예쁘고 매력적인 사람이 나만 바라보고 사랑해 준다니. 동수는 꿈만 같았다. 평소보다 그녀와 있을 때 시간은 질주하는 자동차처럼 금방 지나갔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으면 시간이 멎은 듯 주변은 아득해졌다. 처음 그녀의 손을 잡았을 때가 기억났다. 심장이 터질 것 같고 귀는 빨갛게 달아올랐었지. 그녀의 집까지 바래다줄 때 그녀의 발걸음이 기억났다. 추운 겨울 입김이 보이지만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은 따뜻했다. 일하러 가기 전 그녀와 헤어지기가 매번 너무 아쉬웠다. 주중에는 그녀를 만날 주말만 기다렸고 점심시간에는 하루도 안 빠지고 그녀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전화를 했다. 그런 그녀를 좀 더 자주 보려면 결혼만이 답이었다.

동수는 조바심이 생겼다. 빨리 안정된 직장을 찾아야 했다. 결혼해서 가정이 있었으면 좋겠다. 매일 집에서 잠든 그녀를 지켜보며 옆에서 잠들고 싶다. 매일 아침 그녀와 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비슷한 시간에 퇴근해서 그녀와 저녁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다. 내가 매일 저녁밥도 차려주고 아침도 챙겨줄 수 있는데. 빨리 취업해서 그녀에게 인정받고 싶다. 동수는 생각했다. 이제는 모든 사람이 유전자 편집으로 태어나서 백 프로 정부가 양육하는 시스템에서 크고 있었다. 정부는 사회의 낮은 출산율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사회적으로 최대의 효율을 달성하기 위해 국민 프로파일링 프로젝트를 시행했다. 이 프로젝트는 정부가 개개인의 능력을 측정해 데이터를 쌓아 분석하여 사회의 올바른 위치에 자리하기 위해 생겨났다. 어린이집 교사들, 학교 선생님들은 아이들의 프로파일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이는 사회의 범죄를 미리 방지하고 모두 없애는 데 크게 이바지하고 있었다. 다른 친구들은 자신의 적성과 가장 부합하는 일을 하면서 행복한데 동수는 아직도 자신의 적성을 찾지 못했다. 거듭되는 적성검사에도 지쳤고 다양한 취미를 가지며 자신의 미래를 시뮬레이션해 봤지만 전부 동수의 최대치를 보여주지 못했다. 학업도 평균 이상, 예체능도 평균 이상, 인간관계 지수도 평균 이상. 상대적으로 더 높은 점수가 나올 법도 한데 30살 평생 아직도 찾지 못했다. 무슨 일이든지 뽑아주는 회사에서 일해보려고 했지만, 회사도 한 분야에서 최대치를 발휘하는 인재들을 뽑고 나서 동수에게는 기회가 오지 않았다.

동수는 매일 가던 카페로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아 노트북을 켜고 미리 설정해 놓은 관심 분야에 대해 인공지능 앱이 정리해 준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개개인의 수면 데이터부터 컴퓨터와 스마트폰 데이터 모두 중앙 정부의 데이터 센터에 저장되고 모니터링되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 그런 시스템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모두 이러한 시스템이 범죄율을 거의 0%에 육박하게 만든다고 믿고 맡기고 있었다. 동수는 취업 인공지능이 선별해 놓은 매칭 기업에 이력서를 보냈다. 인공지능이 준비해 놓은 맞춤 면접 준비 안내서를 읽고 연습을 좀 하다가 푸드 팩토리 머신이 만든 쌀국수를 한 그릇을 먹었다. 면접에 입고 갈 옷을 아웃핏 메이킹 머신에 맞춤으로 주문해 놓고 고깃집 아르바이트하러 갔다. 옷의 패브릭과 디자인 및 사이즈를 설정하면 즉석에서 만들어주는 기계였는데 개인 맞춤으로 최소의 원가로 옷을 저렴하게 살 수 있었다. 이러한 기계들로 인해 기업들은 남는 재고가 전혀 없었고 수요와 공급은 완벽히 맞아떨어졌다. 모든 것을 기계로 자동화했지만 몇몇 프리미엄 라인은 인간의 손이 필요했기 때문에 일자리 수요가 있었고 동수가 일하는 고깃집도 최상급 고기를 인간이 직접 굽는다는 점에서 차별화하고 있었다.

예전에 인간이 의미를 찾던 창의적인 예술도 이제는 인공지능이 인간을 뛰어넘고 있었다. 인공지능을 잘 다룰 줄 아는 인간이 돈도 버는 그런 사회였다. 동수의 경쟁상대는 이제는 같은 학교를 졸업한 동료들이 아니었다. 사회 전반에 자리 잡은 기계들과 인공지능 시스템들이었다. 인공지능을 사용하면서 편의를 얻고 동시에 삶의 의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인공지능으로 거의 모든 회사 시스템을 자동화한 회사들은 거액의 인공지능 세금을 냈다. 정부는 그 세금을 바탕으로 기본소득을 실현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기본적인 생활이 가능한 나라. 기본적인 생활이 가능하므로 자신의 적성만을 쫓을 수 있는 그런 나라. 예전에는 그런 나라를 유토피아라고 불렀겠지.

어느 날, 집으로 한 통의 편지가 왔다. 빈 봉투에 발신인은 없었고 수신인은 동수로 되어 있었다. 봉투를 열자 한 통의 손편지와 명함이 들어있었다.


동수 님께,

안녕하세요. 지역 일보에 한혜진 기자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정부에서 추진하는 사업을 조사하고 취재를 하던 중, 어떤 경로로 동수 님을 포함한 ‘예측 불가 인력’ 리스트를 확보하게 되어 연락드립니다. 혹시 정부 사업에 참여하라는 권유를 받으셨는지요. 긴히 말씀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제 명함 동봉하였으니 최대한 빨리 연락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한혜진 기자 드림.


어느 공원 벤치에 앉아 파란 하늘에 순간 정신을 뺏겨 바라다보고 있을 때 한혜진 기자가 동수를 알아보고 옆에 앉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한혜진 기자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정부 사업 관련 특집기사를 취재하던 중 어떤 프로젝트 사업에 대해서 알게 되어서요. 비밀리에 동수 님을 포함한 ‘예측 불가 인력’에 대해서 알게 되었거든요. 정부에서는 이 ‘예측 불가 인력’을 사회 위험 세력으로 보고 예측 불가한 변수들을 제거하여 사회에 다시 투입하는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예측 불가한 변수들을 뽑아내서 제거하려면 이 사람들을 어떤 실험에 참여시켜야 하거든요. 그런데 제가 알아본 바로 이 실험이 인권침해 위험이 있다는 겁니다.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어요. 혹시 그런 제안을 받은 적 있으신가요?”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요? 저는 그런 제안받은 적도 없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네요. 제가 좀 바쁜 사람이라 이만 일어나야겠습니다.”

기자를 뒤로하고 동수는 수지를 만나러 갔다. 동수를 바라보며 귀엽게 웃는 그녀를 보자 기분이 좋아졌다. 수지가 말했다.

“요즘 취업 준비는 어때? 할만해? 내가 일하는 시청에서 청년들 교육해서 취업시켜 주는 사업을 하는 데 참여해 볼래?”

조금 전 그 기자가 한 말이 생각났지만 수지를 바라보며 좋다고 했다. 수지는 이 정부 지원 사업에 참여하면 취업률이 백 퍼센트라면서 잘 생각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날 바로 동수의 이력서를 보냈다. 정부 지원 사업 면접이 일주일 후로 잡혔다. 동수는 정장을 입고 시청으로 가서 면접실에 앉아 있었다. 동수와 같은 나이대의 청년들이 많았다. 다들 긴장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면접실로 들어간 동수는 한 명의 면접관과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돌아가는 기계 앞에 앉았다. 기계는 카메라로 동수의 몸짓, 표정, 목소리, 말투 등을 실시간으로 분석했다. 면접관은 동수의 프로파일링 데이터베이스에 접근해서 동수의 학교 성적과 세부 데이터를 확인했다. 면접관은 동수에게 여러 질문을 했고 동수는 성심껏 대답했다. 집에서 결과를 기다리면 된다고 안내를 받고 열흘 후, 합격 통보를 받았다. 수지는 무척 기뻐했다. 동수도 기뻤다. 프로젝트 일정을 받고 기다리고 있는데 한혜진 기자한테서 연락을 받았다. 한혜진 기자는 정부 사업에 대해 다시 물었다. 동수는 합격해서 시작 날만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한혜진 기자는 혹시 무슨 일이 벌어지면 연락 달라고 했다.

정부 프로젝트 첫날, 동수는 어느 이름 없는 건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하얀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신체검사를 받았다. 무척 정밀해 보이는 신체검사였다. 검사하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절차라고 했다. 일주일 내내 검사를 받으면서 동수는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동수가 생각한 프로젝트는 인력들을 교육 및 훈련해 일자리에 투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건 예상과 너무 달랐다. 피도 뽑고, 체력검사도 하고, 인적성 검사도 풀었다. 심리 검사도 하고 어떤 심리상담가로 보이는 사람이 묻는 질문에 답하고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림도 그리고 글도 써서 냈다. 머리에 어떤 기계를 연결하고 하루 종일 어떤 검사를 받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수는 화장실에서 직원들이 하는 말을 듣게 됐다.

“몇 명들은 팩터를 갖고 있는데 도무지 팩터를 찾을 수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처리한대?”

“중앙에서 분류해서 처분할 건가 봐.”

“조용해. 누가 듣겠다….”

동수는 얼어붙었다. 팩터? 그게 뭐지? 이 검사들은 언제 끝나는 거지? 뭔가 미심쩍다. 동수는 조용히 화장실에서 나와 그 직원들의 뒤를 멀찍이 따라갔다. 그들은 어느 문 뒤로 사라졌다. 위치를 파악한 후, 동수는 퇴근하는 척하고 화장실에 숨어있다가 다시 그 방으로 갔다. 그 방 안에는 수많은 텔레비전이 설치되어 있었다. 동수는 그중 한 컴퓨터로 가서 전원을 켰다. 비밀번호로 막혀 있었다. 동수는 방 전체를 뒤졌지만 모든 정보가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었는지 아무런 것도 찾을 수 없었다. 동수는 환풍기 구멍으로 들어가 밤을 새웠다. 아침이 되자 직원들이 출근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텔레비전 전원을 켜고 지원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컴퓨터를 켜고 일을 하기 시작하다가 점심시간이 되자 모두 밖으로 나갔다. 동수는 환풍기 구멍에서 나와 컴퓨터로 갔다. 켜져 있는 컴퓨터에 저장된 파일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사회에서 ‘예측 불가한 아이들’에 대해서 어떤 실험을 계획하고 있는지에 대한 파일이 있었다. 예측 불가한 아이들이 사회악이 될 가능성을 고려하여 그들의 예측 불가 변수를 찾아내 모두 없애버리는 프로젝트였다. 지금까지의 검사는 그러한 변수를 찾기 위한 검사였다. 지원자들의 파일을 보니 변수가 나온 사람도 있고 아직 아무것도 찾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 동수의 파일에는 아무런 결괏값이 없었다.

동수는 그 방을 빠져나와 지각한 척하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다른 지원자들은 컴퓨터로 어떤 검사를 받고 있었다. 몸이 아파서 늦었다며 동수는 자리에 앉았다. 가슴이 벌렁거렸다. 이러한 사실을 이 많은 지원자가 알고 있을까. 예측 불가한 건 정말 사회악일까. 동수는 생각이 많아져서 검사에 집중할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 한혜진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약속을 잡았다. 다시 공원에서 둘은 벤치에 앉아 멀리 서 있는 횟빛 건물들을 바라봤다. 동수는 자신이 발견한 모든 걸 한 기자에게 털어놨다. 한혜진은 동수에게 아마도 변수를 찾지 못한 사람들은 정부에서 모두 안락사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중앙 정부는 예측 불가한 것을 참지 못하고 좀 더 완벽한 사회를 건립하고자 이 프로젝트를 기획했다고 했다. 표적 인물들 리스트를 비밀리에 확보하여 연락을 취했지만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고 했다. 나중에 한 기자에게 연락한 건 동수가 유일했다.

동수는 이걸 다른 지원자들에게도 알려야 한다고 그리고 이 프로젝트에 대해서 전 국민이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 기자는 동수를 돕겠다고 말했다. 갑자기 수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수지는 프로젝트에 잘 참여하고 있는지 물었다. 동수는 잘 참여하고 있고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조만간 만나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한 기자가 말했다.

“아마 동수 씨 여자친구가 정부에서 파견한 비밀요원일 거예요. 예측 불가한 아이들을 감시하기 위해서 보낸 사람일 거예요.”

동수는 믿을 수 없었다. 그동안 그렇게 자신과 달콤한 시간을 보내고 자신을 보고 웃고 떠들던 수지가 비밀요원이라니. 하지만 그 모니터링 실에서 자신이 본 것을 생각하면 한 기자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배신감과 슬픔이 한꺼번에 차올랐다. 한 기자가 말했다.

“전 국민이 정부에게서 기본소득을 받으며 살고 있어서 정부를 거역할 수는 없을 거예요. 제 생각에는 이걸 모든 사람이 안다고 해서 바뀔 건 없어 보여요. 최소한 동수 씨와 함께 실험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알리고 대피시켜야 할 것 같아요.”

하지만 어떻게 알려야 할까. 모든 컴퓨터와 스마트폰이 정부로 인해 모니터링되고 있고 데이터는 실시간으로 쌓이고 있었다. 이상 데이터가 발견되면 아마도 중앙 정부로 신호가 갈 것이다. 동수는 다시 그 검사실로 돌아가야 지원자들에게 직접 알릴 수 있다고 봤다. 돌아가고 싶지 않았지만 의심받지 않으려면 다시 돌아가야 했다. 어떻게 이들을 도망시킬 수 있을까. 정부의 계획에서 벗어나려면 이 나라를 떠나야 하는 거 아닌가. 비행기 표 예매만 해도 정부에서 알게 될 텐데.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한 기자가 말했다.

“지원자들에게 알리고 단 한 사람도 발설하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같은 날 같은 시에 인천공항에서 만나 예약되지 않은 여분의 비행기 표를 한꺼번에 구매해야 할 거예요. 그러니까 어느 나라로 떠나게 될지는 무작위인 거죠. 그날 하루 살 수 있는 표에 따라 결정되는 거예요.”

동수는 집에 와서 자신의 가구와 물건들을 모두 처분하기 시작했다. 집은 1인용 모듈러 아파트였기 때문에 좁고 자신 소유 가구도 몇 개 없었다. 동수는 배낭에 옷가지와 노트북, 책 몇 권, 그리고 그동안 모아둔 돈을 모두 챙겼다. 들어온 그대로 나가는 기분이었다.

동수는 배낭을 메고 정해진 출근 시간보다 일찍 그 검사실로 향했다. 제일 먼저 도착한 다음 긴장한 채로 지원자들이 오길 기다렸다. 하나둘 도착했고 흰색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오늘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 안내받기 위해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8시 40분쯤 되자 대부분 도착한 듯 보였다. 동수는 앉아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들 앞에 나서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도 여러분과 같이 합격한 지원자입니다. 사실 제가 모니터링 실에 잘 못 들어가서 알게 된 사실을 공유하려고 해요. 여기 모인 여러분들은 정부에서 정한 ‘예측 불가 인력’입니다. 지금 중앙에서 진행하는 실험에 참여하고 계신 거고요. 결과에 따라서 안락사당할 수도 있다고 해요. 저와 함께 도망가요. 오늘 인천공항으로 가서 여분의 항공권을 사서 당장 출국하면 가능합니다. 집으로 가셔서 짐을 싸서 인천공항에서 한시까지 만납시다.”

다들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한 사람이 동수를 보고 말했다.

“그게 사실이란 걸 어떻게 믿을 수 있죠? 증거가 있나요?”

“제가 직접 모니터링 실 컴퓨터에 있는 파일을 열어보고 목격했어요. 제 말을 믿으셔야 합니다.”

“증거가 없으면 믿을 수 없어요. 갑자기 이 나라를 떠나라고요?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동수는 순간 당황했다. 사실 동수가 직접 보기는 했지만, 증거를 확보해서 보여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한혜진 기자에 대해서 언급하고 아는 사람이 있는지 물어봤지만 다들 신경도 쓰지 않았다. 다들 멍한 표정으로 동수를 쳐다보았다. 동수를 믿고 따라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동수는 서둘러 그곳을 떠나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인천공항으로 가는 중, 한혜진 기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동수는 혼란스러웠다. 수지에게도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동수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인천공항에 도착하자 경찰과 군인들이 눈에 띄었다. 그들은 무언가를 수색하고 있었다. 동수는 겁이 나서 그들을 피해 숨었다. 공항에도 곳곳에 CCTV가 설치되어 있었다. 동수는 재빨리 항공사 카운터에 가서 혹시 취소된 비행기 표나 예매가 되지 않은 비행기 표가 있는지 물었다. 전날 취소된 프랑스행 편도 항공권이 하나 있다고 해서 그걸 구매했다. 비행시간은 다섯 시라서 점심을 먹고 공항에서 기다렸다. 동수는 생각했다. 내가 본 것이 사실일까? 내가 만약 프랑스로 떠난다면 일을 구해서 먹고살 수 있을까? 우리나라를 떠나 돌아오지 않는다는 건 이 나라에서 주는 기본소득조차 포기하는 일이었다. 아무런 계획도 없고 기술도 없이 언어도 모르는 다른 나라로 떠나 새로운 삶을 산다는 건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게다가 한 기자도 연락이 안 되고 수지 씨도 연락을 받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는 거 아닐까?

비행기 내에 불이 꺼지고 사람들이 하나둘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이상하게 자신을 쫓아오는 사람도 없었고 아무도 자신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자신이 도망가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게 되는 상황이었다. 만약 한혜진 기자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 그 지원자들이 모두 죽임을 당한다면? 나는 그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까? 동수는 가만히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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