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보통날 14
* 이 여행기는 추후 짧은 버전으로 수정되어 타사이트에 게재될 예정입니다.
이번 휴가에 홍콩을 간다고 하자 지인들의 반응은 엇비슷했다. "홍콩을?" "또?" "대체 몇 번을 가는 거야?"
그럴 만도 하다. 나 스스로도 그렇게 느끼고 있으니까. 이번 홍콩은 여행으로 어느덧 열 번째. 홍콩 영화나 홍콩 배우의 리즈 시절에 자라난 키드도 아니고, 중국에 반환되기 전의 아득한 부유감을 지닌 홍콩은 아예 모르는 데다 매번 여행할 때마다 비슷비슷한 것들을 하고(홍콩의 크기를 생각하면 '새로운' 일정이 나오기는 어렵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땅값을 가진 곳이라면 더더욱) 오면서도 또 홍콩이다.
머리 위로 쏟아질 듯한 옥외 간판, 속도를 따라가기도 힘든 광둥어, 뜨겁고 습한 공기, 머물러 있을 수 없이 늘 어딘가로 이동해야 할 것만 같은 바쁜 분위기. 전생에 홍콩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로 내게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이 모든 것들. 팬데믹 3년간 국경의 빗장을 단단히 걸어 잠갔던 홍콩이 드디어 격리와 PCR 의무를 없앴다. 홍콩의 문이 열렸고 그렇다면 나는 홍콩에 가야만 했다.
도쿄에서 인천을 경유해 홍콩 첵랍콕 공항에 도착했다. 밤 11시에 가까운 시간. 공항 호텔에서 하루 묵고 아침 일찍 시내로 나갈 예정이라 리갈 에어포트 호텔로 이동했다. 짧은 일정 동안 호텔을 옮기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지만 홍콩 호텔 숙박비가 3년 전보다 1.5배에서 2배 올라있어 차선으로 선택한 방법이었다. 이 늦은 시간에 도심의 호텔에 체크인하며 1박의 숙박비를 지불하는 대신 그 금액으로 맛있는 식사 한 끼를 더 하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한동안 자가 격리의 산실이었던 호텔. 방에 들어와 캐리어를 눕혀 세면도구와 갈아입을 옷만 조심히 꺼냈다. 도쿄에서 출국할 때 직원이 최종 목적지인 홍콩의 완화된 입국 규정을 숙지하지 못해 하마터면 홍콩으로 출발하지 못할 뻔했었다. 그 아찔함이 아직 남아 있나. 몸은 피로한데 어쩐지 잠이 오질 않아 한참을 뒤척였다.
홍콩은 작은 만큼 이동이 비교적 쉬운 곳이다. 공항에서 도심으로 들어가는 방법도 다양하다. 여러 노선의 공항버스, 주요 역까지 20분 내외로 이동하는 AEL 공항철도, 언제나 대기 중인 택시 등. 특히 AEL은 공항철도역에서 주요 호텔까지 무료 셔틀버스를 운영하는 데다 출국 당일 인타운 체크인도 가능해 도심에서 출국 수속을 모두 마치고 짐 없이 여행을 마칠 수 있는 편의를 제공받을 수 있다. 그러나 팬데믹으로 이 모든 장점이 사라졌다. 호텔 무료 셔틀버스와 인타운 체크인 서비스가 무기한 운영 중지인 상황. 그렇다면 굳이 AEL 공항 철도를 이용할 필요가 없어 환승 없이 도착할 수 있는 공항버스를 타기로 했다. 시간은 좀 더 걸리지만 이걸 하고 싶어 온 여행이니까. 오전 7시. 마음 바쁜 여행객은 체크아웃을 벌써 마쳤다.
첵랍콕 공항 입국장으로 들어와 유인 매표소를 찾았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옥토퍼스 카드 두 개를 환불하고 새 옥토퍼스 카드를 구입하기 위해서였다. 기존 카드에 각각 150 홍콩 달러, 50 홍콩 달러가 들어있었고 이대로 사용이 가능한데도 환불을 하는 거냐고 직원이 물었다. 굳이 기존 카드 대신 새 카드를 구입한 건 "애플페이를 등록하고 싶어서요." 환불된 금액으로 하나의 새 옥토퍼스 카드를 구입한 뒤 애플페이 카드 등록을 마쳤다. 실물 카드 보증금을 제외한 사용 가능 금액이 아이폰 안으로 들어왔다. 홍콩섬 중심으로 들어가는 A11번 버스를 탔고, 켜지지 않은 아이폰을 교통카드 단말기에 가져다대니 자동으로 버스 요금이 결제되었다. 옥토퍼스 카드로 결제하는 것이 굉장히 활성화된 곳이 홍콩. 애플 페이 등록으로 이동과 결제에의 자유를 얻었다.
보통 입국 시점에 맞춰 버스나 택시, AEL 공항철도를 타기 마련이라 비슷비슷한 행색의 여행객들과 비슷비슷한 이동을 하게 되는데 이 이른 시간의 공항버스는 생각 외로 일상성이 가득했다. 출퇴근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내 옆자리에 광둥어로 통화를 하는 중년 남성이 앉았다. 창 밖의 줄지은 초록색 택시. 익숙하기만 했던 공간에 이질감이 스민다.
약 1시간 가까이 지나 완차이 주변 버스 정류장에 내렸다. 이번에 선택한 호텔은 더 하리 홍콩. 더 하리 런던에 이은 두 번째 더 하리 호텔이자, 2020년 12월에 오픈한 따끈따끈한 팬데믹 둥이 호텔이다. 오전 9시가 막 넘은 시간이었는데 바로 체크인이 가능했다. 내가 예약한 방은 ㄱ자로 꺾인 통유리가 있는 프리미엄 코너 룸. 센트럴 플라자에서 애드미럴티 샹그릴라 호텔로 이어지는 거리, 호프웰 센터에서 빅토리아 항 너머의 K11까지 상상했던 뷰 그대로다. 직원이 챙겨 가져다준 캐리어를 풀어 짐을 정리해 놓았다. 어떤 바(Bar)를 가져다 와도 견줄만한 뷰일 테니 와인을 사서 일찍 돌아와야겠다.
날이 습하고 흐리다 싶더니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얇은 셔츠에 재킷 하나를 걸쳐 입으니 딱 좋다. 코즈웨이베이로 향하는 트램에 올라 2층 제일 앞자리에 앉았다. 목적지는 타이항. 적절한 곳에서 하차해 걸음을 옮겼다. 타이항은 골목골목 세련된 카페들과 맛집이 노상 다이파이동과 함께 자리 잡고 있는 아주 작은 동네다. 마음 바쁘고 욕심 많은 여행객은 한 번에 여러 카페를 다니는 법. muse 카페에서 따뜻한 라테를, oma 카페에선 캐러멜 푸딩에 진한 커피를 사 먹었다.
작은 우산을 하나 챙겼지만 펼칠 필요가 없다. 2층이 튀어나온 홍콩 건물 구조의 특성상 우산을 쓰지 않고도 충분히 걸어 다닐 수가 있어서다. 점심을 미리 예약해 놓은 식당이 위치한 곳은 센트럴. 타이항에서부터 천천히 걸으면 1시간이면 충분히 도착한다. 코즈웨이베이, 완차이, 애드미럴티, 센트럴로 이어지는 홍콩섬의 중심부. 명품 광고와 K-아이돌 생일 서포트 래핑이 되어 있는 트램들과 초록불이 켜질 때마다 달그락 거리는 신호등, 도로를 가로지르는 리어카를 지나쳤다.
센트럴 두델(Duddell) 스트리트는 오래된 가스등 계단이 있는 곳으로 영화 천장지구의 촬영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특히 이 가스등 계단 옆으로 옛 홍콩 다방을 콘셉트로 한 특별한 스타벅스 매장이 이어져 있어 이 거리 자체가 관광 필수 스팟처럼 여겨져 왔는데 지금 보니 스타벅스가 없어지고 다른 상점으로 바뀌어 있다. 찾아보니 21년에 폐점했단다. 타이항에서 이곳까지 걸어오면서 비슷한 감정을 많이 느꼈는데, 비가 오면 야외 좌석에 앉아 와인을 기울이곤 했던 The Pawn도, 한 끼 먹기 좋았던 대만 음식점도 모두 없어지곤 낯선 상호가 걸려 있었다.
여행이 처음이 아닌 곳은 기회비용이 두 배 늘어난다. 가 봤던 곳은 얼마나 좋은 줄 아는 데다 안 가본 곳은 어떨지 모르니까. 홍콩 첫 끼는 무조건 딤섬이어야 했고 그렇다면 얼마나 맛있는지 이미 아는 곳이 좋겠다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이 두델 스트리트에 위치한 식당 두델스(duddell's). 격식을 차려야 하는 메인 레스토랑 대신 캐주얼한 살롱에서의 식사로 예약을 해놓은 참이었다. 입구에서 예약자 이름을 확인하고 너른 계단을 올라 비에 젖은 초록 테라스가 건너다 보이는 바 근처로 착석했다. 하가우와 시우마이, 크랩 롤이 따뜻하게 서빙되었고, 재스민 차에 곁들여 맛있게 먹었다. 點心. 마음에 점을 제대로 찍었다.
홍콩에 열 번을 오면 버스 노선을 검색할 때 외엔 지도를 보지 않고도 다닐 수 있다. 종이 지도를 들고 충분히 헤매며 고생했던 그때의 내가 성실히 다져 만든 오늘.
센트럴 역에서 IFC몰을 지나 센트럴 페리 터미널에 도착했다. 없어지고 새로 생기는 것이 반복되는 홍콩에서 여전히 변하지 않는 건 스타 페리 직원들의 움직임. 침사추이 페리 터미널에 도착하자 해군복 스타일의 유니폼을 입은 나이 든 직원이 막대를 들고 기다리다 밧줄을 걸어 배를 정착시켰다. 기름 냄새 같은 이 눅진한 냄새도 그대로다. 홍콩이란 도시에도 여전함이란 단어가 붙을 수 있다.
최근 홍콩에서 꼭 한 군데의 쇼핑몰을 가야 한다면 무조건 K11 MUSEA다. 층마다 유명한 현대 미술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어 걸음을 자주 멈추게 하는 곳이다. 스타의 거리를 지나 쇼핑몰 입구로 들어오자마자 4월 중순까지 전시 중이라는 Misfits 크리에이티브의 작품들을 볼 수 있었다. NBA 구단의 유니폼을 엮어 만든 소파와 달팽이로 분한 다이얼 전화기, 구룡(카오룽) 옷을 입은 마네킹의 얼굴에서 플레이되는 휴대폰 영상 등 젊은 작가들의 패기가 느껴졌다.
K11 MUSEA을 꼭 가야 할 곳으로 넣어두었던 건 모마 디자인 스토어 때문이다.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판매되는 컬렉션을 포함하여 다양한 디자인 오브제들을 구입할 수 있는 곳이다. 매대에 진열된 모든 상품들에 눈길이 갔다. 여기는 키스 해링과 바스키아, 저기는 kaws와 앤디 워홀이라니. 짐이 될 것을 고려해 고르고 골라 앙리 마티스의 레드 스튜디오 포스터 한 점을 구매했다. K11 MUSEA는 각 층마다 콘셉트가 다양해 '이번엔 또 어떤 걸 발견할까' 하며 즐겁게 다녔다. 더 하리 홍콩과 함께 숙박할 곳으로 고민했던 호텔이 K11 ARTUS였는데, 이런 재미가 있는 쇼핑몰이 지척에 있는 것도 큰 장점이었겠다 싶다. 다음 홍콩 여행 때 참조할 것.
아시아 최대 아트 페어가 아트 바젤 홍콩인 것처럼 홍콩은 좋은 전시, 좋은 작품을 보기에 좋은 곳이다. K11 MUSEA에서 가까운 갤러리 페로탕 홍콩으로 향했다. 컨시어지에 여권 정보와 연락처를 제시한 뒤 출입증을 받아 입장했다. 진행 중이었던 전시는 Katherina Olschbaur의 <Midnight Spill>. 창 밖으로 이스트 침사추이 일부와 홍콩섬이 건너다 보이는 작은 갤러리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쉽지 않은 홍콩의 정적. 관람객을 직시하는 듯하면서도 모호한 색채를 띤 여성들. 캔버스를 가득 채우는 존재의 주체성이 느껴진다. 낯선 작가라 포털 사이트에 검색을 해보았는데 어느 사이트에서 '가부장적 질서에 저항하는 여성성'에 대한 설명을 읽었다. 아마도 여성의 말 그대로 '리얼'일 모습에 '저항, 전복'이란 해석이 붙는 게 진정한 의미의 '리얼리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버시티 오션 터미널로 향하는 길. 평소의, 예전의 홍콩이었다면 여행객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비는 곳인데 같은 모자를 쓴 몇 팀의 중국 단체 관광객들만 이따금씩 보일 뿐이다. 이 시계탑 앞이 고즈넉할 수 있구나. 엄마와 함께 선 어린 남자아이가 카메라를 든 아빠를 향해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조카 또래인 것 같은데, 잔망스럽기도 해라. 이럴 때 느닷없이 여행이 좋아진다. 문득, 툭 하고.
최고의 페이스트리 셰프 중 한 명이자 크루아상과 도넛을 결합한 크로넛이라는 메뉴로 대히트를 친 도미니크 안셀이 아시아 유일 플래그십 스토어를 오픈할 곳으로 택한 곳은 역시 홍콩. 당웬리라는 상호의 디저트 샵 1호점이 하버시티 오션 터미널에 있었다. (추후 알게 됐는데 당웬리는 도미니크의 광둥식 이름이라고 한다) 오픈 첫 주 매일 천 명에 가까운 손님이 몰렸을 정도로 핫한 곳이었다는데, 시간이 조금 흘러서인지 다행히 자리가 있었다. 홍콩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디저트들이 담긴 쇼케이스를 구경하다 가장 유명한 레몬티 모양의 얼그레이크 케이크를 주문했다. 진짜 레몬티를 갈라 먹는 듯한 재미가 포함된 케이크는 달지 않아 물리지 않는 맛이었다. 내게 먼저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며 호감을 숨기지 않던 귀여운 아르바이트 생을 통해 가지고 있던 동전을 최대한 활용해 결제를 마쳤다. 유독 두껍고 무거운 홍콩 동전들을 드디어 소진했다. 지갑이 가벼워졌다.
다시 센트럴로 넘어와 미슐랭에 이름을 올렸던 brass spoon에서 고수를 추가한 쌀국수로 이른 저녁을 먹곤 소호로 올라왔다. 소호에 있는 작은 와인샵 la cabane 방문이 오늘의 마지막 일정이었다. la cabane은 내추럴 와인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곳으로 평소 마시지 못했던 종류의 와인을 추천받을 수 있는 곳이다. 작은 와인샵에 몇몇의 사람들이 둘러 서 와인 시음을 하며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오늘은 혼자 와인을 골라보겠다 하니 직원이 와인 저장고 문을 열어주며 편히 둘러보라 했다. 투명한 문 안에 서늘하게 보관되어 있는 수 백 개의 내추럴 와인이 나라와 종류 별로 구분되어 있었다. 오랜만인 홍콩에선 기분 좋은 탄산이 필요하니 스파클링 와인 코너에서 한 병을 골라 들었다. 대부분 마시던 와인만 마시는 편이라 이런 와인샵에 들러 낯선 와인을 사는 것이 내겐 여행의 또 다른 재미다. 사실상 제일 마음에 드는 라벨이 붙은 와인을 고른 셈이지만 내추럴 와인은 본래 모험을 감수해야 한다. 여행처럼. 트램을 타러 이동하는데 어느 사케 전문점에서 정대만 사케로 불리는 미이노고토부키 준마이 긴조를 발견해 바로 한 병 구입했다. 이건 집에 가져가 고이 모셔놔야겠다.
인파가 가득한 트램 몇 대를 지나쳐 보낸 뒤 조금 한산한 트램에 탑승해 1층에 자리 잡았다. 홍콩에서 현지인처럼 다녀보고 싶다면 트램이나 버스 1층에 앉아볼 것.
컨시어지에 요청해 받은 아이스 버킷에 아직 미지근한 와인을 담아놓고 오늘 하루 2만 보 넘게 걸은 종아리를 주물렀다. 홍콩만 오면 빨간 구두라도 신은 양 걸음을 멈출 수가 없다. 꽉 찬 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적절해진 온도가 된 와인을 깨끗하게 비우고 딱 적당한 감도의 침구에 누웠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눈을 뜨니 어제와 비슷하게 희뿌연 하늘의 아침. 거짓말 같은 4월 1일이 되었다.
베이크하우스는 에그타르트를 비롯해 식사 빵 등을 파는 곳으로 요즘 홍콩에서 가장 인기 있는 베이커리다. 이른 아침을 먹기 위해 완차이 점을 찾았는데 테이크 아웃 줄은 아침 식사를 사러 온 사람들로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다행히 내부 식사가 가능한 자리가 한 자리 비어 있어 1층을 내려다볼 수 있는 2층의 바 좌석에 바로 앉을 수 있었다. 다양한 종류의 메뉴가 하나의 플레이트에 나오는 브렉퍼스트를 먹고 싶었는데 오늘은 주문이 불가해 사워도우 타르틴으로 주문했다. 구운 마늘과 버섯, 수란이 올라간 사워도우 빵은 이곳이 왜 빵 맛집으로 이렇게 유명한지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맛이었다. 손바닥 보다 훨씬 큰 크기라 배부르겠다 싶었는데 어느덧 싹싹 비운 접시.
나는 여행 시 그 도시에서 들을 노래들을 미리 선곡한 재생목록을 지참한다. 도시에 노래가 결합되면 추억의 기한이 무한정으로 길어진다는 걸 경험한 이후부터다. 계산을 마치고 나와 가방에서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고 망설임 없이 곡목을 클릭했다. A thousand dreams of you. 장국영의 노래다.
조금 더 굵어진 빗방울을 맞으며 트램을 타고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로 이동했다. 가까운 정류장에 내려 걷는데 앞서 가는 여성분의 하얀 에코백에 레슬리란 이름과 함께 장국영의 실루엣이 그려져 있다. 횡단보도 하나를 건너면 바로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근처에 다다랐다는 느낌은 이 향기 때문에 안다. 매년 4월 1일이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전달한 화환과 꽃들이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의 벽면에 놓이고 주변은 꽃 향기로 뒤덮인다. 꽃들에, 장국영에 가까워졌다. 호텔 직원이 나와 사람들이 수월히 지나다닐 수 있도록 안내를 하고 있었다. 제일 먼저 보인 빨간 장미 속 단어 哥哥. 만우절 거짓말 같았던 그날. 어느덧 20년이 지났다.
내가 4월 1일에 맞춰 홍콩을 찾았던 건 2017년이 처음이었다. 3월 31일엔 해피 밸리의 작은 꽃집에서 손짓해 가며 산 하얀 백합을 들고 동연각원에 갔고, 4월 1일엔 프린스 애드워드 꽃시장까지 가서 산 주황색 투톤 장미를 만다린 오리엔탈 앞에 놓았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홍콩 영화나 홍콩 배우의 리즈 시절에 자라난 키드도 아니고, 그가 사망하던 때엔 그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어린 학생이었다. 나는 다 자라 장국영을 알았고 다 자라 그의 대표작을 보았다. 그러니 어떻게 그의 눈빛을 잊을 수 있나. 예정된 끝을 이미 알고 보는 그의 삶을 어떻게 지나칠 수 있나. 이 서글픈 이끌림.
읽지 못하는 글자들 중 한글이 있다. '우리의 영원한 슈퍼스타, 국영오빠. 영원히 기억할게요. from. Korean Fans.'
사진 찍고, 꽃을 놔두고, 움직이지 못하고 호텔을 향해 가만히 서 있는 사람들. 4월 1일이 되면 어쩌지 못하고 이곳으로 올 수밖에 없는 마음들. 나이 먹었나. 멋쩍게 이 앞에서 조금 울었다.
그 앞에서 좀 더 서성대다 걸음을 옮겼다. 디즈니랜드를 예약해 놓았기 때문이다. 일정 중에 디즈니랜드는 갈 생각이었고, 입장 날짜를 지정할 때 붐비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는 날짜에 맞췄더니 그게 나중에 4월 1일이라는 걸 알았다. 날짜를 바꿔보려다 말았다. 4월 1일, 나는 디즈니랜드를 향하기로 했다. 내가 4월 1일에 홍콩에 있을 수 있고, 홍콩을 여행할 수 있고, 디즈니랜드를 갈 수 있는 것도 모두 그 때문이니까. 그로 인해 만들어질 수 있었던 하루니까 많이 웃어보겠다고.
세상에서 가장 작은 디즈니랜드. 써니 베이 역에서 디즈니랜드 열차를 타고 입구에 도착하는 데에까지 채 몇십 분이 걸리지 않았다. 출력한 티켓의 큐알 코드를 찍고 입장했다. 점심시간이 다다를 때 도착했더니 신데렐라 성 앞에서 닉과 주디가 공연을 펼치고 있었다. 가까운 상점에 들어가 토끼 머리띠 하나를 사서 끼고 나왔다. 나이를 먹을수록 디즈니랜드가 더욱 좋아진다. 막연히 즐겁고, 막연히 행복할 수 있는 공간에서 막연히 웃는 일이 얼마나 귀한지 알아지는 나이.
메인스트리트를 지나 투모로우랜드부터 향했다. 앤트맨 와스프 나노 배틀, 하이퍼 스페이스 마운틴을 차례로 탄 뒤 토이스토리랜드에서 보 핍을 만나 사진을 함께 찍었다. '빅 그리즐리 마운틴 런어웨이 광산열차'라는 이름의 롤러코스터도 탔고 라이온킹 뮤지컬을 봤다. 슬링키 모양의 핫도그를 사 먹었고 포즈 취하는 것이 예사롭지 않던 데이지와 사진을 찍고 따뜻한 포옹을 나눴다. 높고 빠른 놀이기구를 전혀 못하는 쫄보에게 딱 맞는 어트렉션으로 가득한 공간. 아직 어둠이 지지 않은 시간에 디즈니랜드를 빠져나왔다. 이만하면 충분했다. 그가 내게 선물한 행복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식당이 사라지고 또 생기는 홍콩에서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는 식당들이 있다. 그중 오랫동안 미슐랭 빕그루망에 이름 올리고 있는 침차이키를 찾았다. 관광객들에게 워낙 알려진 유명 맛집인데도 홍콩을 열 번 오는 동안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던 곳이다. 오후 5시 즈음 도착하니 웨이팅 없이 바로 빈 테이블에 착석할 수 있었다. 침차이키에서 먹어야 하는 메뉴는 완탕면. 에그 누들의 완탕면을 주문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메뉴가 나왔다. 통통한 새우가 큼직하게 씹히는 완탕에 꼬들꼬들한 에그 누들, 해장이 바로 될 듯한 진한 국물을 먹으니 이제야 와 본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오랜 시간 사랑을 받는 식당엔 이런 한 방이 있다.
근처에 마켓 플레이스가 있어 간단한 야식 거리와 샴페인을 사러 가는데 예전에도 있었나 싶은 깔끔한 건물이 눈에 띄었다. 센트럴 마켓. 건물로 들어가 에스컬레이터를 올라탔더니 숍 인 숍 같은 느낌으로 작은 매장들이 깔끔하게 늘어서 있다. 홍콩 기프트 스트리트라는 안내 표시를 따라 이동했다. 옛 홍콩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나 그 당시의 물건을 파는 곳이 많았다. 유덕화, 여명, 양조위의 젊을 적 모습이 담긴 잡지나 포토카드, 웰컴마트 봉투와 밀크티 머그, 택시등도 판매용으로 진열되어 있었다. 그중 레트로한 홍콩 간판 하나를 샀다. 돌아가서 주방에 붙여놓아야지.
페리에 주에 샴페인에 간단한 핑거 푸드를 구입해 호텔로 돌아왔다. 같은 하룬데 여행만 오면 시간이 다른 차원으로 흐르는 기분이다. 벌써 내일 밤이면 홍콩을 떠나 일상으로 돌아간다.
내내 흐린 홍콩. 그러나 덕분에 덥지 않고 춥지 않아 걷기 좋다. 나는 홍콩에 오면 얼마든지 긍정적인 사람이 된다. 아침 일찍 짐 정리를 마쳐놓고 바다 아래로 뚫린 해저 터널을 지나 카오룽에 도착했다. 리츠 칼튼 호텔이 있는 ICC 건물과 카오룽 역 외에는 잘 알려진 곳이 아니라 굳이 찾아오는 동네는 아니었는데 홍콩 고궁박물관, 엠플러스(M+) 뮤지엄, 프리스페이스, 아트 파크가 있는 서구룡 문화지구(West Kowloon Cultural District)란 이름의 새로운 문화 공간이 생겨 꼭 와 보고 싶었다.
조깅하고, 산책하는 사람들 조금. 홍콩 섬을 바라보는 위치. 그야말로 휴식과 같은 공간이었다. 바닷바람에 머리카락이 잔뜩 흩날려도 기분이 좋다. 근처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사 마셨다. 날 좋은 날 몇 시간이든 앉아 놀 수 있는 공간일 듯했다.
개관 1주년 기념으로 쿠사마 야요이 특별 전이 개최되고 있는 엠플러스 뮤지엄에 입장했다. 특별 전은 전시 배치 자체가 쿠사마 야요이 작품 그 자체처럼 복잡하고 정신이 없었다. 전시 벽면 하나에 수 십 개의 작품이 걸려 있다가 특유의 '땡땡이' 무늬를 입은 조형물들이 갑자기 나타났다가 했다. 그중 작가가 비행기를 타고 바다를 내려다본 감상을 캔버스에 담은 작품들 앞에 오래 서 있었다. 멀리서 보면 단순한 '땡땡이' 무늬만 있는 듯한데 가까이 다가가면 물감의 마티에르가 제각각에 색감도 섬세하게 음영 지어 있다. 떠나고 있는 사람만이 그릴 수 있는 세계.
엠플러스 뮤지엄에서 쿠사마 야요이 전시만 진행되고 있는 줄 알았는데 같은 층에 전시관이 여러 개 있었다. 천천히 둘러보면 하루가 꼬박 걸릴 것 같은 규모다. 전부를 돌아보기엔 어려워 일부 전시관만 둘러봤는데 박서보, 하종현, 이승택 등 우리나라 작가 작품도 전시되어 있어 무척 반가웠다. 대만 작가 리밍웨이(Lee mingwei)가 The Letter Writing Project란 제목으로 설치해 놓은 세 개의 부스 중 한 부스에 들어가 편지를 한 통 쓴 뒤 빈자리에 꽂아놓았다. 편지 봉투의 개봉 여부는 관람객에게 선택할 수 있게 했는데 나는 양면테이프를 뜯어 꼭꼭 눌러 닫았다. 비밀로 부치고 싶은 몇 문장들이 그 안에 담겨 전시관 한쪽에 남았다.
미슐랭 3 스타를 받은 룽킹힌에서 식사를 하고 싶었지만 이미 몇 달 치 예약이 풀북. 대신 2022년에 미슐랭 2 스타를 받은 리츠 칼튼의 틴룽힌을 선택했다. 특별히 창가로 요청하지 않았는데도 안내된 좌석이 창가였다. 예상대로라면 홍콩섬과 빅토리아 항을 102층에서 근사하게 내려다보는 뷰가 펼쳐져야 할 자리지만 구름과 안개 덕에 창 밖은 그저 하얀색. 음식 맛에 뷰가 곁들여지는 곳인데 덕분에 음식 맛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네 가지의 딤섬에 추가로 내어준 디저트까지 깨끗하게 비웠다.
카오룽 역에서 출발해 난청 역에서 내렸다. 타이항과 더불어 골목골목 세련된 카페나 상점들이 많은 삼수이포가 걸어서 금방이었다. 가죽 전문 가게, LP와 카세트테이프를 파는 가게, 일본 레트로 상품 가게, 여럿 카페와 장국영이 주연한 영화 포스터가 붙어 있는 골동품 가게들이 보물을 발견하듯 튀어나왔다. 한국 노래가 플레이 리스트에 섞여 있는 Dozy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셨다. 카페가 만석이라 몇몇 사람들이 아쉽게 걸음을 옮기는 모습을 봤다.
이런 동네라면 장국영과 관련된 물건 하나쯤은 살 수 있겠다 싶었다. 골목을 지그재그로 꼼꼼히 돌다가 이거다 싶은 가게를 발견했다. 2000년대 초반 장국영 콘서트 포스터나 영화 속 모습을 재연한 그림, 옛 카세트테이프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이중 뭘 살까 신나게 고민하는데 장국영과 관련된 모든 물건에 붙어 있는 비매품 안내. 주인이 그저 자랑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쉽게 구경만 했다.
몽콕 역 근처에 표기해 둔 Hak Dei라는 잡화점에 가기 위해 삼수이포에서부터 쭉 걸었다. 다양한 가정용품과 생활 잡화, 홍콩산 복고풍 아이템 외에 해외 브랜드에서 큐레이션 상품들을 취급하는 독립 상점이다. 이미 캐리어와 핸드 캐리 가방 무게는 한계점이 도달한 상황이라 무거운 건 살 수 없어 꼼꼼하게 돌아본 뒤 도자기로 만든 홍콩식 숟가락을 구입했다.
만약 여행객으로 야우마떼이를 방문한다면 보통 미도 카페에 가기 위해서겠지만 나는 큐브릭 때문이다. 시네마테크 1층에 자리한 서점 겸 DVD 판매점 겸 카페인 곳. 안쪽의 DVD 코너에서 영웅본색 1편을 찾아 결제했다. 넷플릭스에서 검색하면 한국어 자막을 달아 편하게 관람할 수 있지만 굳이, 큐브릭까지 와서, 광둥어로 된 영웅본색 DVD를 구입하는 것.
날이 많이 저물었다. 바다를 건너는 버스를 다시 탔다. 어디를 갈까 하다 퍼시픽 플레이스에 내렸다. 콘란샵이 여기 안에 위치해 있었구나. 가격대 있는 인테리어 소품들과 하이엔드 가구들을 눈으로 훑다 눈에 띄는 노란 소파가 있어 앉아 봤다. 너무 푹신하지 않고 등 기대기도 좋아 독서용으로 하나 가지고 있음 딱 좋을 것 같아 가격을 확인하니 천만 원이 훌쩍 넘는다. 아무리 금전 감각이 없어지는 여행객이라지만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세상엔 천만 원이 넘는 1인용 소파를 구입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돌아가면 제일 아쉬울 식사는 아마도 딤섬. 그래서 마지막 저녁까지 딤섬이었다. 실험적인 딤섬을 선보인다는 딤섬 라이브러리에서 매콤함이 가미된 샤오룽바오와 생강 향이 매력적인 바오에 빼놓을 수 없는 하가우와 시우마이를 시켜 먹었다.
부슬비를 3일 내내 맞고 다녀도 괜찮았는데, 여행이 끝날 시점에서 감기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약국에서 종합 감기약 하나를 사서 그 자리에서 바로 삼켰다. 그럼에도 걸었다. 붉은 등이 켜진 리퉁 애비뉴를, 헤네시 로드를. 날이 어두워지니 더욱 빛을 발하는 빨간색 간판들을 질리지도 않게 바라보며, 일요일 저녁의 북적북적함이 있는 어느 신호등의 끝자락에 서서 신호가 여러 번 바뀌는 동안 이 풍경을 사진과 동영상에 담았다.
호텔에 맡겨 놓은 짐을 찾아 다시 A11번 버스를 타고 공항에 도착했다. 짐을 부치고 수속을 밟고 들어왔는데 밤늦은 시간이라 열린 상점이 몇 없다. 탑승구 근처에 자리를 잡고 잠깐 눈을 붙였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나. 항공기 탑승이 시작된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피로한 몸을 일으켰다. 돌아갈 시간이다.
이번 홍콩 일정을 돌아보면 바쁘게 걸은 기억이 먼저다. 팬데믹 기간 동안 새로 생겼거나 와 보지 않았던 곳들을 찾아다녔고, 딱 그만큼 매번 했던 것들을 또 했다. 경험과 상상이 뒤섞이는 곳. 열 번을 와도 이렇다.
홍콩은 흥미롭다. 변화하는 도시라서다. 스스로 말미암은 변화와 어쩔 수 없는 변화, 그 두 가지가 공존하는 도시다. 반갑기도, 두렵기도, 기대되기도, 무서워지기도 한다. 변화하는 도시라서다. 하지만 홍콩은 그런 채로 존재할 것이다. 홍콩이기 때문에, 홍콩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나는 같고도 다를 홍콩을 보러 또 올 것이다. 안 해봤던 걸 하고 해 봤던 걸 또 하려고. 이번과 크게 다르지 않을 여행을 하러. 어쩌겠는가. 이 정도의 애정을 보면 전생에 확실히 홍콩 사람이긴 했었나 보다고 여기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