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보통날 13-2
* 본 여행기는 1,2편으로 나누어 발행하였습니다.
* 이 여행기는 추후 짧은 버전으로 수정되어 타사이트에 게재될 예정입니다.
키치죠지를 살고 싶은 동네로 만드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건 아마도 이노카시라 공원 때문일 것이다. 이노카시라 호수를 품고 있는 이 공원은 역시 벚꽃 피는 봄에 더욱 아름다운 곳이다. 며칠 동안 계속 비가 내려 물기를 머금은 꽃잎이 바닥에 떨어져 질척거리고 있었지만 두 사람씩 짝지어 보트에 올라타 노 젓는 이 특유의 호젓한 분위기는 그래도 봄의 멋이다. 같은 공간, 같은 거리에 있어도 벚꽃이 피는 속도는 나무마다 다르다. 초록잎으로 갈아입은 나무와 벚꽃만으로 생생한 나무가 뒤죽박죽 섞여 있다. 다 자기만의 때가 있는 법. 그렇다면 나는 대부분의 벚꽃이 피어날 때 같이 피어나 다수로 묻어가는 것이 편할 4945847183번째의 벚나무.
어느덧 맑게 갠 하늘. 이럴 땐 시모키타자와.
오후의 시모키타자와는 생동하는 젊음 그 자체로 반짝이고 있었다. 빈티지 가게들과 작은 공연장들로 대변되는 곳답게 개성 있게 차려입은 학생들이 삼삼오오 몰려다녔다. 커다란 가방에 가득 담긴 헌 옷들. 가게들마다 득템을 위한 손놀림이 바쁘게 움직인다. 예전과 달라진 점은 새로운 복합 공간들이 몇 생겼다는 것. 역 옆에는 츠타야 서점을 비롯한 다국적 요리들을 파는 가게가 깨끗하게 늘어선 미칸 시모키타가, 옛 오다큐 전철 선로 위엔 와인바, 문구점, 카페들을 포함한 리로드(reload)가 새로 생겼다. 볕 좋은 날 벤치에 앉아 사람 구경하기 좋은 분위기를 가진 곳들이었다. 다양한 잡화를 취급하는 빌리지 뱅가드에서 <슬램덩크 그로부터 10일 후> 일본판 버전을 구입했고, 베어폰드 에스프레소에서 커피 한 잔을 마셨다.
시모키타자와는 홋카이도식 수프 카레를 파는 곳들이 많아 일정 부분 카레 냄새로 기억되는 곳이다. 저녁 장사 준비를 하는 식당들에서 새어 나오는 맛있는 냄새가 곳곳에. 맛집이라 소문이 난 곳에서 수프 카페로 저녁을 먹을까 하다 이동했다. 예쁘게 찍힌 사진 한 장으로 그 맛이 궁금했던 메뉴도 카레라 그곳으로 가자 싶었기 때문이다. 이왕이면 좀 더 다양한 장소들을 다니고 싶은 것, 그게 단지 한 끼의 식사때문이기도 한 것. 여행이라 불사할 수 있는 것.
LP와 위스키가 진열된 작은 바에서 파는 카레라니. 식당 이름 자체도 '커리 & 바 모쿠바자'다. 모쿠바자는 하라주쿠와 센다가야, 가이엔마에를 삼각형으로 그으면 그 딱 한가운데인, 애매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 늘 붐비는 하라주쿠에서부터 걸어오니 어느덧 몇몇 아이들이 공놀이를 하며 까르르 웃는 소리만 울리는 골목 초입이 금방이다. 세련된 맨션 사이에 나무 문을 가진 작고 이질적인 가게. 오픈 시간이 되자 강아지를 안은 두 명의 손님이 각자의 예약석에 앉았고 나도 그 가운데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의 시그니처인 듯한 메뉴는 키마카레. 그중 아보카도와 치즈, 계란 노른자가 올라간 메뉴와 하이네켄 생맥주를 주문했다. 대부분의 손님이 한 명씩 들어와 조용히 식사를 하고 나가는 공간. 말소리 대신 시간대를 상정할 수 없는 오래된 음악들이 공간을 메우고 있었다. 카레는 밥 한 톨도 남기지 않고 싹싹 긁어먹었을 정도였다. 계산을 하며 잘 먹었다는 인사를 건넸다.
기분 좋게 부른 배에 천천히 호텔로 돌아가 볼까 지도를 보는데 호텔까지 지하철로는 29분, 걸음으론 45분이 나온다. 지하철로 걸리는 29분 중 역까지 걷는 시간만 10분이 넘는 코스다. 이럴 거면. 배도 조금 꺼트릴 겸 산책을 선택한 여행객. 아오야마 영원을 가로지르는 길을 안내하는 지도를 따라 움직였다. 이만하면.
지도에 초록색 바탕을 가진 곳이라 그저 공원이겠거니 했던 아오야마 영원은 초입부터 분위기가 조금 이상하다 싶더니 길 양 옆으로 비석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다. 아오야마 영원이란 이름을 그제야 클릭해 보니 도립 공원묘지라는 설명이 보인다. 그런데 이 길, 자세히 들여다봐야 비석들이 있다는 걸 알 정도로 길가에 벚꽃이 만발해 있고 조명도 아주 밝다. 이따금씩 택시나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지나고, 운동복 차림으로 러닝 하는 사람들도 있다. 택시나 자전거가 속도감 있게 지나면 바람에 벚꽃 잎이 순간 우수수 흩날리며 떨어졌다. 도립 공원묘지란 설명 옆에 벚꽃길이 유명하다는 수식어가 붙어 있는 게 이제야 보인다.
설명을 미리 읽었다면 굳이 택하지 않았을 길. 초속 5센티미터로 떨어지는 벚꽃 잎들을 눈에, 동영상에 담았다. 저 멀리 불 켜진 도쿄타워 첨탑이 비쭉 보였다.
삶과 죽음은 멀지 않다. 적어도 죽음이 이런 거리감이면 그리 두려운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죽음이 묻힌 곳이 벚꽃이 화려하게 핀 봄의 아오야마 영원 같은 것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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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떠나기 전 날. 여전히 아침 일찍 이동했다. 가장 이른 시간 입장으로 예약해 놓은 국립 서양 미술관의 특별전을 보기 위해서였다. 내가 여행하는 시기에 국립 서양 미술관에선 <영감의 원천 브르타뉴-모네, 고갱, 구로다 세이키의 시선>이라는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는데 재밌게도 국립 신 미술관에선 <루브르 미술관, 사랑을 그리다>를, 도쿄도 현대 미술관에선 <크리스찬 디올 디자이너 오브 드림즈>를 전시 중이었다. 이 나라 프랑스에 참 진심이다 싶다.
서둘러 예약을 마쳐놓곤 관람을 기다렸던 특별전은 사실 그렇게 집중해서 보지 못했다. 나카무라 요시요의 커다란 의복 트렁크에서 오는 이질감. 대부분 1880년부터 1920년 정도까지 프랑스로 건너가 그림을 배워 그린 일본 작가들의 작품이 모네와 고갱 작품 옆에 나란히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있으니 그림을 그릴 담배나 껌 종이를 구했던 작가와 생존을 위한 시장터에서의 사람들을 남겼던 작가의 작품들이 뒤따라 생각났다. 말미암은 그림들. 남은 작품들은 보지 않고 상설 전으로 이동했다.
성서화부터 중세화, 인상주의와 현대미술까지. 이름 있는 작가들의 작품들이 많아 특별전보단 상설전이 훨씬 볼 만했다. 특히 르 코르뷔지에와 뭉크 작품이 상설 전에 포함되어 있어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작품 수가 무척 많은 작가임에도 쉽게 볼 수 없었던 뭉크의 작품이라 더욱. 관람을 마치고 나오니 우에노 공원은 벚꽃 구경 하러 온 인파로 가득했다. 다양한 언어들에서 벚꽃을 보기 위한 마음이 읽힌다.
기요스미 시라카와는 도쿄 블루 보틀 1호점이 생긴 이래로 일명 '카페 투어'를 즐기기에 좋은 동네로 변모했다. 도쿄 관광 공식 사이트에선 이곳을 '커피 붐의 진원지'라고 소개하고 있을 정도다. 전통적인 일본정원인 기요스미 정원과 도쿄도 현대미술관이 공존하는 동네. 그러나 나는 이곳에 역시 먹기 위해 왔다.
미야코(Miyako)는 후카가와에서 자란 조개를 넣어 지은 밥을 파는 오래된 식당이다. 이 동네에서 커피를 마시러 돌아다니려면 일단 배부터 든든하게 채워야 할 것 같아 근처에 맛있는 곳 없나 하며 지도를 보다 우연히 발견했다. 작은 입구 앞에서 1명임을 밝히자 앉을자리를 정해준다. 신발을 벗고 짧은 복도를 지나 열린 미닫이 문 안으로 들어왔다. 두툼한 방석을 깔고 앉아야 하는 옛날식 다다미방. 방 안엔 식당의 역사가 담긴 바랜 사진들이 걸려 있다. 점심으로 시킬 만한 메뉴는 단출한 편. 기본 조개 밥에 회가 포함된 세트로 시켰다. 따뜻한 차를 몇 모금 마시고 있으니 쟁반에 담긴 메뉴가 금방 나왔다. 조개 향이 스며 있는 밥에 반찬들을 한 점 한 점 맛있게 곁들여 먹었다. 가게 규모에 비해 서빙하는 직원들의 숫자가 꽤 많아 보였는데 부산스럽지 않게 지나다니며 차를 계속해서 채워 주었다. 일본엔 혼자 방문해도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식당들이 많다. 남은 현금을 그러모아 계산을 마쳤다.
미야코 근처에 지나쳐서는 안 되는 곳이 있다. 원조 카레빵을 파는 카토레아다. 입간판부터 카레빵의 원조 집임을 내세우고 있는 곳에서 기본 카레빵을 사서 나왔다. 커피를 마시고 간식으로 먹으려고 했는데 진한 카레 향이 가방 안에서 솔솔 올라와 참지 못하고 길에서 다 먹어버리고 말았다.
넓게 퍼진 길에 가봄직한 카페들이 듬성듬성 분포해 있어 고민이 되었다. 어딜 갈까. 그나마 관광객들보단 현지인들이 좀 더 많은 IKI 에스프레소에 들러 입장 대기를 했는데, 드디어 내 차례가 되어 주문을 마치니 현금 결제만 가능하단다. 동전을 만들기 싫어 미야코에서 마지막 현금을 전부 소진해 버렸는데.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다 카페 대기줄을 보고 "오늘도 무리일까?" 하던 주민 두 명이 대기에 10분 정도 걸린다는 말에 "운이 좋다"며 함박웃음을 짓고 주차를 하러 갔던 반응을 알기에 아쉬움이 더 커졌다. 블루 보틀 1호점은 일전에 가 본 적이 있으니 런던에서 자주 찾았던 allpress로 옮겨 왔다. 뜨거운 태양을 등지고 앉아 아이스 라테 한 잔을 마셨다. 이번엔 카드 계산이 되는지 주문 전에 미리 확인했다.
어느덧 내일이면 도쿄의 마지막 날이다. 바로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홍콩으로 건너갈 계획이라 마지막이란 단어가 마냥 아쉽지는 않았다. 비현실적으로 파란 하늘에 커다란 뭉게구름이 느리게 흘러가는 따뜻한 날씨. 나는 이런 때 카페에서 편히 앉아 사색을 하는 편이 못된다. 빨간 구두라도 신은 듯 당장에 움직여야 하는 사람. 남은 커피를 털어마시고 짐을 챙겨 나왔다.
저녁 일정이 대부분 도쿄 역 근처라 기요스미 시라카와에서 긴자까지 걸었다. 오는 동안 스카이 트리도 보았고, 정장 차림의 중년 신사가 벚꽃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았다. 골목을 막고 공사를 하는 인부는 지나가는 내게 고개를 숙이며 양해를 바랐고, 브레이크 타임인 식당 안에서 테이블에 얼굴을 묻고 잠을 청하는 사람의 등을 보았다.
조카 선물과 기념품들을 마저 구입하고 킷테로 향하다 문이 활짝 열린 펍이 보였다. 간판을 보니 더 프리미엄 슐츠 하우스라 적혀 있다. 산토리 프리미엄 몰츠 맥주만 전문으로 하는 펍인가 보다. 오후 4시라는 애매한 시간인데도 한 테이블에서 남녀가 생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지친 다리를 쉬게 하는 데에 여기만큼 적당한 곳이 없겠다 싶었다.
바 좌석에 앉아 기본 프리미엄 몰츠 생맥주를 시키니 직원이 눈앞에서 바로 맥주를 따른다. 잔을 기울여 4분의 3을 채우고 꼭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얹듯 그 위에 거품만 올린다. 거품 표면에 더 프리미엄 몰츠 20주년 기념 문구를 마저 새긴 생맥주가 나왔다. 여행의 피로가 풀리는 알코올의 힘. 많이 걸은 탓에 열이 올라 얼굴은 금세 홍조가 빨개졌지만 프리미엄 한 잔은 더 마셔줘야지.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두 중년 여성이 창가 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맥주를 한 잔씩 마시며 대화를 이어나가는 모습. 취향과 경험의 산물이 저런 걸까. 그런 시대를, 그런 삶을 살아왔을 테지. 나의 미래는 어떻게 만들어지게 될까, 하며 두 잔 째 맥주를 홀짝.
도쿄 역과 도쿄 역 지상 철로를 내려다볼 수 있는 킷테(KITTE)의 야외 정원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다. 킷테 쇼핑몰 내에서 저녁을 먹곤 이 야외 정원으로 나와 좋아하는 노래들을 일부러 선곡해 들으며 오랜 시간 앉아 있었다. 6층. 이 정도 높이가 딱 좋다. 너무 높지 않아 무섭지 않고 너무 낮지 않아 위압적이지 않은. 점점 불이 켜지는 도쿄 역. 어느덧 밤이다.
마지막 밤. 미리 예약해 놓은 벚꽃 투어 버스를 타기 위해 도쿄 역 마루노우치 남쪽 출구로 향하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예약 티켓을 확인하고 탑승해 버스 2층에 자리를 잡고 나니 이제 옆 사람의 말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로 빗소리가 거세졌다. 정장을 차려입은 운전사가 작은 수건을 하나씩 나눠주며 혹시 창이 뿌예지면 닦으라고, 날씨가 좋지 않아 미안하다 인사를 하며 다녔다.
밤 벚꽃을 2층 오픈탑 버스 위로 스쳐 지나며 느끼고 싶었는데. 어차피 이 비였으면 어딜 움직이지도 못했을 테니 드라이브하는 셈 쳐야겠다. 코스 설명으론 키타노마루 공원을 지나 도쿄 역으로 돌아온다고 되어 있었는데 창 밖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구글 지도를 켜놓고 현재의 위치를 가늠했다. 이 비를 맞으며 러닝을 하는 사람들과 역 출구에서 이도 저도 못하고 서 있는 사람들과 금세 웅덩이 진 빗물의 풍경이 창 밖으로 스쳐 지나간다. 가끔 조명을 받아 형체가 드러나는 하얀 벚꽃들까지.
여기다 싶은 곳 옆을 버스가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난다. 흐드러지게 핀 벚나무가 에워싼 듯한 형체였다. 지도를 보니 쿠단자카 공원이다. 이름을 눌러 위치를 저장했다. 벚꽃 피는 계절에 이 도시를 다시 찾게 된다면 이런 곳들을 찾아다니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약 40분 정도의 시간이 금세 흘렀다. 다시 익숙한 도쿄 역이 저 멀리 보인다. 옆의 커플이 비가 정말 '자와자와' 내렸다며 웃었다. 비가 많이 내리는 모양새를 표현하는 단어로 최근 문제집에서 봤던 단언데. 자와자와. 주룩주룩. 이건 정말 잊지 못하겠다.
하차할 때 나누어 준 우비를 꼼꼼히 챙겨 입고 가까운 지하철 역으로 들어왔다. 습기로 가득한 가까운 지하철 역으로 들어와 입었던 우비를 물기가 흐르지 않게 잘 개어 담았다. 롯폰기 역에 금방 도착했다. 출구로 향하며 우비를 꺼내는데 어?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중 절반쯤이 우산을 쓰고 있지 않다. 그렇게 거세게 내리던 빗줄기가 거짓말처럼 부슬비로 바뀌어 있다. 타이밍도 참.
우비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걸어 나왔다. 호텔 창 밖으로 도쿄 타워가 깨끗하게 보이겠다. 마지막 밤을 보내기 좋은 시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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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 일어나 캐리어 정리를 마쳤다. 도시 한 군데를 더 여행해야 하는데 캐리어 무게가 벌써 간당간당한 기분이다. 묵직한 캐리어를 문 앞에 세워두고 호텔을 나섰다. 오전 7시부터 여는 빵집이 가까이 있어 이른 아침을 먹기 위해서였다. 하루를 보다 일찍, 누구보다 성실히 시작하는 것이 내가 여행하는 방식이다.
비가 내린 흔적이 남은 축축한 거리를 지나 도착한 Bricolage bread & Co. 도쿄에 도착한 첫날, 츠타야 롯폰기 점을 찾아갈 때 이 앞을 지났던 적이 있었다. 끝이 굽은 도로까지 뻗은 벚꽃이 만발한 것이 예뻐 사진을 찍느라 한참을 서 있던 곳이었다. 주말답게 안팎으로 사람이 가득해 그대로 지나쳤었는데, 이 시간에 나와야 그나마 한갓진 곳이었다. 벚꽃을 향해 난 야외 좌석이 꽤 비어 있다. 적정한 때 왔다.
진열된 빵이 아닌 가게 바깥 간판에 그려진 메뉴 중 에그 베네딕트를 주문하고 싶다고 말했고, 웃으며 엄지를 치켜 세운 직원이 계산대에서 바로 결제하면 된다 말해주었다. 진동벨을 받고 야외 좌석에 앉아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름 일본어로 문장을 잘 만들었다 생각했는데 고작 "뒤.. 메뉴.. 안.. 에그 베네딕트.. 주문..입니다"라고 말했구나.
앤티크 한 접시에 담긴 에그 베네딕트와 따뜻한 아메리카노. 이따금씩 벚꽃 비가 떨어지고, 새가 울고, 산책하는 강아지가 짖고, 찰칵 사진 찍는 소리가 들리는 길을 마주하며 먹는 아침. 여기서 일정을 마무리하려고 롯폰기에 묵었나 싶었을 정도다.
츠타야 롯폰기 점에 다시 왔다. 아직 서점은 오픈하기 전이라 스타벅스에서 커피 한 잔을 더 마셨다. 첫날엔 보이지 않았던 유아히어 도쿄 시티머그가 보여 함께 구입했다. 점원의 일본어를 처음부터 끝까지 알아 들었고, 대답도 일본어로 했다. 이런 패턴들이 익숙해졌다는 건 떠날 때가 됐다는 것이다. 생소하고 새삼스러운 과거의 그림으로 남는 것.
2007년 여름. 혼자 처음 도쿄에 도착한 첫날, 나는 식당에서 밥을 사 먹지 못했다. 처음으로 찾은 낯선 나라 낯선 도시에서 낯선 식당 문을 열지 못했다. 낯선 언어를 쓰는 곳에서 능숙하지 않은 모습을 보일 것이 무서웠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손짓 발짓하면 되는데 그러는 게 싫었다. 잘하지 못할 바엔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여행 계획을 세울 때 이런 내 모습은 예상에 없었고, 나는 예측하지 못한 내 모습에 얼떨떨해했다. 내가 이렇다고? 이렇게 형편없다고?
처음 두 끼는 편의점에서 해결했던가. 그러고 나서 겨우 간 곳이 맥도널드였다.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늘 자기 몫을 잘하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여행을 떠나와서 일반 식당도 못 들어가는 바보가 나였다. 야무짐은 가장이었을 뿐 나의 날 것은 이거구나 했다. 이 여행이 아니었으면 영영 모르고 넘어갔을 진짜 나를, 처음 보는 나를 여행하는 내내 발견했다. 내가 뭘 좋아하고 뭘 두려워하는지, 어떤 상황을 피하고 싶어 하고 어떤 상황을 즐거워하는지.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이의 심정으로 천천히, 하나씩 알아가며. 내가 어떻게 보일지 가장하지 않고, 내가 진짜라고 느끼는 나의 현재에만 오롯이 집중한 시간들.
나의 진짜가, 나의 처음이 곳곳에 남은 도시. 여행을 해야만 하는구나 알게 해 준 도시. 그로부터 16년이 흐른 동안 나는 변하기도 했고 변하지 않기도 했지만 확실한 건 지금의 나를 만든 계기가 된 것이 도쿄란 것이다. 나는 이 도시를 영원히 잊지 못한다. 처음은 그래서 무서운 법이니까.
이제 돌아가자. 롯폰기에서 다이몬 역, 다시 게이세이 액세스 특급을 타고 나리타 공항으로. 올 때와 똑같은 방법으로. 언제 돌아와도 날 것의 나를 기억해내게 하는 도시가 있다는 소중함을 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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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이자 비평가인 로런 엘킨은 자신의 저서 <도시를 걷는 여자들>에서 '도쿄는 걸을 수 있는 도시가 아니다. 너무 크다'라고 단언했다.
(중략) 동네에서만 돌아다니려고 해도 모든 게 너무 크다. 우리는 주도로 두 개가 Y자 모양으로 교차하는 지역에 살았는데(Y는 엔화, 돈, 부를 상징한다.) 도로 하나는 시부야로 이어지고 다른 하나는 황궁으로 가는 도로다. 내가 탐험해보고 싶은 곳들, 그러니까 신주쿠, 하라주쿠, 나카메구로, 오모테산도, 아사쿠사 등은 우리가 사는 곳에서 저 멀리에 있는 데다가 이곳들도 서로서로 멀리 떨어져 있고 걸어갈 수 없는 고속도로로 연결되어 있다. (중략)
은행 주재원인 남자친구를 따라 도쿄에 온 로런 앨킨이 살던 곳은 바로 롯폰기다. 롯폰기에서 오모테산도나 긴자까지, 시부야에서 나카메구로까지 모두 충분히 걸을 수 있는 거리다. 내가 직접 걸어 다녀봤으니까 안다. 본인이 선택해서 오지 않은 도쿄란 도시에 마음을 열지 못했던 것. 그녀는 걸어보지 않고 막연히 걸을 수 없을 거라 생각만 했을 것이다. <도시를 걷는 여자들>에서 묘사한 파리, 런던 등에 비해 유독 도쿄를 차갑게 서술한 건 역시 이 도시를 그녀가 걷지 않아서라고 생각한다.
그녀가 결코 걸을 수 없다고 단언했던 거리를 나는 걸었다. 요요기공원에서 하라주쿠, 오모테산도를. 나카메구로, 다이칸야마, 시부야를. 키타산도, 아오야마, 롯폰기를. 기요스미에서 니혼바시, 긴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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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서 홍콩으로 넘어가 며칠의 여행을 더 했다. 약 열흘 간의 일정을 마치고 새벽 비행기를 타 이른 오후에 집에 도착했다. 오후의 노란빛이 거실을 가로질러 떨어져 있는 시간. 캐리어를 놓아두고 일단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었다. 창 밖의 나무 한 그루에 하얀 벚꽃이 피어 있었다. 저게 벚나무였었나.
한참을 찾고, 돌아다니고, 넘어지고, 부딪히고, 기대하고, 실망하고 나서야 눈앞의 파랑새를 발견할 수 있었던 치르치르와 미츠르의 심정처럼. 미드타운과 요요기 공원, 이노카시라 공원과 우에노 공원을 헤매고 돌아와 눈앞의 벚꽃을 발견한다. 헤매고 돌아왔기 때문에 발견했다.
봄. 역시 나는 이 한 음절만으로 당장에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