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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Apr 08. 2023

벚꽃 피는 계절에, 도쿄 1

어쩌면 보통날 13-1


* 본 여행기는 1,2편으로 나누어 발행하였습니다. 

* 이 여행기는 추후 짧은 버전으로 수정되어 타사이트에 게재될 예정입니다. 




봄. 나는 이 한 음절만으로 당장에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다. 시작하는 단계에 서 있는 기분, 한 해를 뭔가 잘 살아보고 싶은 다짐, '좀 더 걸어보자' 혹은 '창문 열어 바람 통하게 하자'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시기. 


봄. 계절의 변화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편은 아니지만 역시 이 한 음절은 기분이 좋다. 지긋이 바라보는 느낌까지 든다. 봄을 바라 봄, 봄을 지켜 봄, 봄을 봄. 봄 봄. 목련, 매화, 개나리 그리고 벚꽃. 식물에 무지한 내가 겨우 몇 외우고 있는 꽃 이름들은 대부분 봄에 만개하는 것들이다. 색마저 밝고 화사한 봄의 정령들. 


그러나 이렇게 말한 것치곤 봄을 제대로 만끽해 본 기억이 별로 없다. 출퇴근하느라 바쁘다고, 숙취에 시달려서, 미세먼지나 꽃가루 때문에, 결국 귀찮아서.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오가는 차창 너머의 도시 색감이 훌쩍 달라져 있곤 했다. 봄이란 한 음절을 채 발음해 보기도 전에 쉽게 지나쳤다. 


"내년엔 벚꽃 구경 제대로 해야지"란 다짐을 올해는 하지 않으리라. 그러니까 '올해' 벚꽃 구경 제대로 해보리라. 현 회사에서 만 10년을 꼬박 일한 대가로 특별 휴가와 소정의 휴가비가 주어졌고, 여행지는 쉽게 결정됐다. 3월 말, 벚꽃이 흐드러진 도쿄로 가자.


꽃. 나는 이 한 음절만으로도 당장에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다.

벚꽃. 두 음절로 늘어나니 기분이 더 좋아졌다.



    ♧


6년 만에 다시 온 도쿄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입국 수속을 비교적 빠르게 받고 나와 짐을 찾았다. 목적지인 롯폰기 역까지 가기 위해 게이세이 나리타 스카이 액세스 열차 탑승구로 이동했다. 한국에서 미리 일본 교통카드인 스이카(Suica)를 애플 페이에 등록해 충전도 해놓은 참이었다. 화면이 켜지지 않은 아이폰을 개찰구 단말기 위에 가져다 댔더니 자동으로 스이카 결제가 완료되고 문이 열렸다. 플랫폼 곳곳에 여행객들의 질문을 받는 직원들이나, 열차가 들어올 때 호루라기를 불며 안전을 주의하는 역무원들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지만, 개찰구 앞에서 가방을 더듬어 지갑을 찾는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6년의 간극이었다.


호텔에 짐을 풀고 우산을 챙겨 나오니 어둑한 오후. 지도를 확인한 뒤 TV 아사히가 보이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내가 도쿄를 처음 여행한 건 16년 전. 해외여행도 처음, 혼자 여행하는 것도 처음이었던 2007년이었다. 로밍하지 않은 폴더 폰, 출력해 온 종이 지도와 지하철 노선도, 일정에 딱 맞게 환전한 현금과 한 권의 여행책이 필수였던 시절. 그때 챙긴 여행책의 표지가 TV 아사히 건너편의 츠타야 롯폰기 점이었고 그래서 당시 꼭 들러야만 했던 곳이었다. 16년 전의 모습과 거의 달라지지 않은 서점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을 보며 일본 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을 들었던 어린 날의 내가 저기쯤에 앉아 있었던가. 서점 내 스타벅스에서 벚꽃 한정판 유아히어 일본 머그를 구입해 나왔다. 


미슐랭에 이름 올린 적이 있는 이마카츠라는 작은 돈가스 가게로 저녁을 먹으러 왔다. 저녁 오픈 시간보다 이르게 도착했는데 이미 꽤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일행과 대화를 나누는 목소리를 들으니 내 앞쪽은 대부분 한국 사람들이었고 내 뒤쪽은 대부분 일본 사람들이었다. 일부 좌석이 예약되어 있어 내 앞의 앞까지만 1차 입장이 가능했다. 그 1차 입장에 성공한 인원의 90%가 한국 사람들이라 속으로 조금 웃었다. 먹는 데에는 정말 진심인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 같아서. 성실한 일본인들을 이기는 건 빠른 한국인들. 내 차례가 되어 식당에 입장하기까지 1시간이 넘게 소요됐다. 빠를 거면 아예 빠르던가, 성실히 기다릴 거면 여유 있게라도 오던가. 이도 저도 아닌 나 같은 사람이 이 앞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


이마카츠에서 가장 유명한 메뉴는 닭 안심살 카츠. 그렇지만 다른 메뉴도 먹어보고 싶어 히레, 로스, 멘치카츠, 새우튀김이 함께 구성된 모둠으로 시켰다. 먼저 나온 양배추 샐러드에 생맥주 반 잔을 비울 즈음 정식 메뉴가 나왔다. 얇은 튀김옷을 입은 부드러운 닭 안심살 카츠를 베어무니 달큼한 육즙이 부드럽게 씹혔다. 다른 카츠들을 조금씩 맛본 뒤 남은 잔을 마저 비우고 "ビール おかわり(맥주 한 잔 더)" 외쳤다. 그럴 수밖에 없는 맛이었다.


도심을 여행지로 가장 볼만하게 만드는 것은 사람이다. 사람이 만든 건물, 사람이 밝혀놓은 불빛,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소음. 높은 빌딩 숲의 롯폰기 미드타운의 밤. 미드타운 초입의 조각 <BLOOM>을 시작으로 히노키초 공원까지 이어지는 도로 양 쪽으로 만개한 벚나무가 늘어서 있었다. 조명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꽃잎이 꼭 막 튀긴 팝콘 같다. 늘어진 가지가 눈앞까지 내려와 있어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육교에 올라 도로 양 끝을 사진에 함께 담기도 하고 꽃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구경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이곳에 와야 했던 이유가 온통 여기에 있다. 



    ♧


여행이구나 싶을 때가 이렇다. 출근을 위해 역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의 무리를 나 홀로 거슬러 걸음 할 때. 번화한 롯폰기 역 출구의 건너편의 작은 골목으로 꺾어 들어오자 금세 고요하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아침. 큰 벚나무 하나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아래에 블루보틀 카페가 있었다. 가로로 긴 테이블 가운데엔 벚꽃 가지를 꺾어 담은 커다란 화병이 두 개 놓여 있었고, 그 사이에 자리 잡아 카푸치노 한 잔을 마셨다. 노트북으로 업무를 하는 사람, 엄마와 식사를 하는 사람, 연인과 함께 온 사람 사이 혼자 온 여행객 하나.


츠키지 시장으로 늦은 아침 겸 점심을 먹으러 왔다. 비가 꽤 거세어졌는데도 좁은 골목은 우산을 쓰고 지나가기 어려울 정도의 인파로 넘쳐났다. 신선한 해산물을 먹기 위해 이름 있는 가게마다 줄이 길게 서 있었고, 그중 미리 봐둔 스시쿠니 앞 대기줄에 자리를 잡았다. 다찌석이 9석, 4인석이 4개인 작은 식당이라 많이 기다려야 하나 싶었는데 생각보다 대기 시간은 길지 않았다. 내 앞의 일행이 6명이라 그들의 자리가 만들어지기 전 내가 먼저 입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혼자 여행하는 이점은 이럴 때 발휘된다. 한 사람의 자리쯤은 있어주는 것.


줄을 설 때 이미 주문을 받았던 터라 자리에 앉아 마자 레몬 사와 한 잔이 먼저 나왔고, 눈앞에서 메뉴들이 만들어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으니 어느덧 우니동이 나왔다. 홋카이도 산 성게알이라는 설명이 곁들여졌다. 젓가락으로 적당량을 덜어 먹으니 비리지 않고 고소한 성게알의 맛이 느껴졌다. 곁들임 음식으로 준 가리비 무침에 짭조름한 장국까지. 사실 한 그릇에 6천 엔이 훌쩍 넘는 가격이었지만 지불할만한 가격이라는 생각이 든 식사였다. 허리가 굽은 나이 든 여성과 젊은 여성이 번갈아가며 서빙을 하는 작은 식당. 계산은 현금만 가능했다. 


츠키지 시장에서 긴자, 도쿄역까지는 걸어서 금방. 소금빵의 원조라는 시오빵 메종도 들러 기본 소금빵과 트러플 소금빵도 샀고, 커피 한 잔을 마시기 위해 30분의 웨이팅을 감수한 본겐 커피에서 진한 오리지널 커피도 맛보았다. 기다림이 기꺼울 수 있는 게 여행의 묘미니까. 모든 상황을 긍정적으로 치환하는 것도 역시. 지난주가 생일이었던 7살 조카를 위해 긴자 포켓몬 센터에 들러 한 손이 부족할 정도로 선물을 샀다. 나를 위해선 이토야에서 형광펜 세 개를 330엔 주고 샀는데. 


이제 겨우 오후 네 시. 요요기 공원을 거닐까, 시모키타자와에서 저녁을 먹을까 고민하다 빗줄기가 도무지 약해질 것 같지 않아 결국 호텔로 돌아왔다. 개운하게 씻고 나와 호텔 방에 구비된 안마기에 몸을 구겨 넣은 뒤 캔맥주를 땄다. 도쿄에서 듣기 좋을 노래들로 선곡해 온 재생목록을 틀고 발목을 까딱까딱. 빗방울이 빗금처럼 붙은 창문에 입김을 하 불어 작은 하트를 그렸다. 하트 너머 도쿄타워가 흐릿하게 보였다. 



    ♧


미간에 주름이 지게 눈이 부셔 뒤척이다 일어났다. 어제 꽤 많이 마셔서 좀 더 자고 싶은데. 부은 눈을 뜨니 너른 창 밖으로 구름과 드문 드문 파란 하늘이 보인다. 이틀간 계속 날이 흐려 커튼을 따로 쳐놓지 않았었는데. 맞다. 원래 아침이 이런 느낌이지. 기상 예보를 전하는 뉴스 속 캐스터가 해 그림을 가리킨다. 몸이 절로 일으켜졌다. 나갈 채비를 금세 마치곤 캐리어에서 노란 핸드백을 꺼내 짐을 옮겨 담았다. 준비 완료.


하타가야, 요요기 우에하라, 요요기 코엔 역으로 이어지는 동네는 골목골목에 예쁜 카페나 상점, 바(Bar)들이 많아 현지인들 뿐 아니라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 곳이다. 요요기 코엔 출구로 나와 조금 걸으니 이른 시간부터 야외 좌석까지 손님으로 가득한 푸글렌 카페가 보였다. 예쁘게 세팅한 커피를 카페 외관과 함께 사진에 담으려 이렇게 저렇게 구도를 잡는, 아마도 여행객일 사람들의 곁을 지나며 이럴 때 여행이 좋다 싶었다. 모두 조금씩 부지런히 조금씩 서둘러 조금씩 행복해지려는 것. 


모노클 샵을 지나 조용한 카멜백 카페에서 솔티드 캐러멜 라테를 한 잔 마시며 이런 카페들이 아니면 굳이 이곳까지 올 일이 없는 동네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영어가 유창한 직원이 원두에 대해 설명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름부터 벚꽃이 붙은 요요기공원의 벚꽃 동산이 다음 행선지. 커피 잔을 든 채 걸으니 봄바람이 살랑 앞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린다. 마스크를 벗고 들이마시는 봄의 향기. 벚꽃 동산엔 돗자리를 깔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셀카봉으로 사진 찍는 사람들, 자전거를 타고 무심히 지나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간혹 흩날려 내리는 벚꽃 잎들. 잠깐 이어폰을 빼고 고개를 젖혀 하늘을 올려다봤다. 역에서 나오는 사람들의 방향을 반대로 가로질렀던 것처럼 늘 아래를 향하는 고개를 역으로 뒤로 쭉 빼보기. 


일찍 서둘렀더니 배가 고팠다. 노부부가 운영하는 오래된 튀김집이라는 것 때문에 오래전부터 가고 싶었던 식당이 미나미 아오야마에 있었다. 요요기 공원에서 하라주쿠, 오모테산도까지 걸을만한 동선이고, 미나미 아오야마는 오모테산도에서 멀지 않으니 걸어서 가는 것으로 결정. 이 동네는 하라주쿠 다케시타도리처럼 유동 인구가 많은 곳과 진구 마에의 조용한 골목이 순식간에 뒤 바뀌어 나타나는 재미가 있는 곳이다. 걷다가 사람이 없는 골목을 만나면 잠깐 멈춰 사진도 찍었다. 


셰프 할아버지가 튀김을 튀기고 부인으로 보이는 할머니가 서빙을 하는 아주 작은 튀김집, 덴푸라 미야카와. 메뉴도 덴푸라 정식, 텐동 딱 둘 뿐이다. 식사 시간에 딱 맞춰 왔더니 이미 다찌석에는 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안내받은 자리도 역시 다찌석. 하얀 셰프 복을 입은 할아버지가 무뚝뚝한 얼굴로 재료를 튀기는 모습을 바로 앞에서 볼 수 있는 자리였다. 튀김을 하나씩 바로바로 튀겨 접시에 놓아주는 덴푸라 정식은 마음 바쁜 여행객에게 호사. 튀김이 한 그릇에 나오는 텐동으로 주문했다. 텐동은 평소에도 좋아하는 메뉴라 맛있는 곳이라는 얘기가 있음 곧잘 찾아다니는 편인데, 사실 먹다 보면 금방 물리는 메뉴이기도 했다. 그러나 덴푸라 미야카와에서는 마지막 밥 한 톨까지 싹싹 긁어먹을 정도로 끝까지 질리지 않았다. 식감과 맛이 다양한 재료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밥의 간이 딱인 데다 특히 장국이 진해 입 안을 깔끔하게 만들어주었다. 정말 맛있게 식사를 마쳤다.


미드타운, 요요기 공원 벚꽃 동산에 이은 도쿄의 벚꽃 명소. 메구로 강을 끼고 벚꽃이 양 옆으로 길게 피어있는 나카메구로로 향했다. 가까운 곳이라 지하철로 금세 도착해 출구로 나섰는데, 사람들의 숫자가 벌써부터 장난이 아니다. 오늘이 월요일이니 좀 낫겠다 싶었는데 도쿄 도에만 천 사백만 명이 살고 있는 걸 자꾸 잊어먹는다. 게다가 꽃 축제를 하고 있어 나를 포함한 관광객들도 가득. 역 출구에서부터 교통 경찰관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사람들의 동선을 정리하고 있었다. 벚꽃 반, 사람 반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시끌시끌한 동네. 메구로 강을 가로지르는 작은 다리 다리마다 벚꽃을 구경하는 사람과 푯말을 들고 통제를 하는 경찰관들이 서 있었다. 인파에 비해 보행이 어렵다고 느껴지지는 않는 정도. 이 정도만 되었어도, 적어도 한 방향으로 몰리게 하지만 않았어도, 란 생각이 불쑥 인다.


벚꽃이 만개한 때이니만큼 보이는 모든 상점마다 기다리는 줄이 있다. 전 세계 딱 여섯 곳이 있다는 스타벅스 로스터리 매장이 나카메구로에 있어 가보려고 했더니 입장 등록이 필요하단다. 별도로 마련된 부스에 가서 번호를 뽑아 차례가 되면 그때 입장을 할 수 있는 것이란다. 부스에서 번호를 받으니 1,625번. 앞으로 863팀이 남아 있었다. 벚꽃도 좋고, 나카메구로도 좋지만 혼자 조용히 봄을 즐기기엔 부산스러워 방향을 바꿨다. 조금만 더 이동하면 다이칸야마라 호기롭게 걸었는데, 다이칸야마도 앉을자리 없이 갈만한 곳들이 모두 북적북적. 결국 시부야까지 걸어 나왔다. 


꼭 에이스 호텔을 벤치마킹한 듯한 시부야의 트렁크 호텔의 로비 바에 자리를 잡았다. 시린 발목을 쉬게 할 샴페인 한 잔을 시켜 푹신한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부지런히 노트북으로 작업하고 있는 사람들의 숫자가 꽤 되었다. 역시 에이스 호텔 느낌이다.


마리오 카트를 운전하는 여행객들을 지나 지역의 농산물을 이용한 음식을 판매하는 D&Dpartment의 d147식당에서 저녁을 먹곤 간단히 쇼핑을 했다. 시부야 스크램블 교차로는 여전히 복작거렸고, 건물 위 번쩍거리는 광고판에는 야구 선수의 모습이 주기적으로 반복되어 송출되었다. 아직 WBC 우승 기운이 곳곳에 남아 있다. 


일몰이 막 지난 저녁 시간에 맞춰 시부야 스카이를 미리 예약해 두었었는데, 이쯤 호텔로 돌아가도 괜찮을 것 같다. 모든 계획을 완벽히 지킬 필요는 없다. 다음을 위해 아쉬움 한 가지쯤은 남겨놔도 된다고 위안하며. 도쿄타워와 롯폰기 힐즈, 멀리 레인보우 브리지로 살짝 보이는 야경은 내 방에서 볼 수 있으니. 여행에 가득해지는 욕심을 조금 버린다. 다만, 시부야에서 롯폰기까지 갈아타지 말고 한 정거장 먼저 내려 걷는 것은 포기할 수 없지.


아오야마 잇초메 역에서 내려 호텔까지 걷는 동안 박스에 책을 담아 내놓은 작은 서점과 어린이 손님이 있는 에스테틱 샵, 처음 보는 사케들이 가득한 로컬 바들을 지나쳤다. 


방의 불을 완전히 꺼야 잘 보이는 바깥의 불빛. 씻고 누웠는데 눈앞의 도쿄 타워 색깔이 달라졌다. 첨탑은 그대로 주황색인데 몸통이 보라색이고 동그란 불빛이 점묘화 그림처럼 간격을 두고 밝다. 급히 검색을 해보니 오늘은 '인피니티 다이아몬드 베일'이라는 이름의 라이트 업이 있는 요일이란다. 


미리 알았으면 이렇게 깜짝 즐겁지 않았을 거다. 보라색에 의미 부여하는 사람에게 특히 더욱더.



    ♧


어느덧 넷째 날. 오늘도 비를 뿌리는 도쿄. 아침 일찍 서둘러 나왔다. 점심 식사 예약을 위해서다. 매장에서 직접 구운 함바그를 개인 화로에 서빙해 주는 맛집으로 유명한 히키니쿠토 코메는 반드시 예약을 해야만 식사가 가능한데, 그 예약이 굉장히 아날로그적인 방식이다. 


오전 9시가 되면 매장에서 직원이 나온다. 그때 대기하고 있는 순서대로 예약을 받는다. 식사 시간과 인원을 말한 뒤 가능 여부가 확인되면 코팅된 식사권을 나누어준다. 이후 예약한 식사 시간보다 약간 일찍 매장 앞에 돌아와 기다리고 있으면 시간에 맞춰 직원이 나와 예약자 이름을 부른다. 그때 코팅된 식사권을 반납하고 매장에 입장해 자리를 배정받는다. 만약 당일 오전 9시에 대기하는 사람이 많으면 내가 원하는 시간에 예약이 어려울 수도 있다는 점. 이쯤 되니 대체 얼만큼 맛있는 곳일까 궁금한 마음이 더 크기도 했다. 


출근하고 등교하는 사람들 틈에 껴 비교적 한산한 키치죠지 역에서 내렸다. 맛있는 점심 한 끼를 위한 기꺼운 걸음. 빗줄기가 거세 작은 우산을 꼭 쥐고 걸었다. 이런 데에 식당이 있나? 싶은 느낌인데 저 멀리서부터 우산을 쓴 행렬이 눈에 띈다. 오전 8시 40분쯤 도착했는데 벌써 열 명 남짓의 사람들이 줄 서 있다. 오늘은 비가 와서 줄이 짧은 편이라는 대화가 들려왔다. 오전 9시 정각이 되자 줄 선 순서대로 차례로 몇 명이 언제 식사할 건지, 예약자 이름은 무엇인지 등을 확인한다. 줄은 쑥쑥 빠져 내 차례가 되었다. 모든 설명이 일본어로만 되는데 괜찮냐는 말을 일본어로 물어왔고, 괜찮다고 일본어로 답하자 왠지 안도의 웃음 같은 것이 직원의 얼굴에 스쳤다. 혼자 식사할 수 있는 가장 이른 시간인 오전 11시 5분으로 예약을 마치곤 식사권을 받았다.


점심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다.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히키니쿠토 코메는 도쿄에 시부야, 키치죠지 두 군데가 있는데 롯폰기에서 가까운 시부야 대신 키치죠지까지 온 진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버스를 타고 20분쯤 지나 어느 학교 앞에서 내렸다. 무사시노키타 고등학교. 바로 슬램덩크 북산고의 배경이 된 학교다.


외지인이 들어갈 순 없어 학교 바깥을 어슬렁거리며 사진첩에 미리 저장해 왔던 슬램덩크 속 그림과 똑같은 건물을 눈에 담으며, 여기서 농구를 했을 북산고 멤버들을 상상했다. 학교 앞이 이렇게 벚나무로 가득한데 백호는 이 거리를 소연이랑 얼마나 같이 걸어보고 싶었을까 싶고, 그저 가깝다는 이유로 이 학교를 선택했던 태웅이는 어디쯤에 살았을까 싶고, 이런 풍경은 눈에도 담지 않고 농구만 하고 싶었던 대만의 마음은 대체 얼마큼 큰 것이었을까 싶고. 겉으로는 그저 벚꽃을 보러 멀리까지 나온 평범한 여행객이었지만 속으로는 덕후력 뽐내는 특별한 여행객이었다.


3월 중순 경 졸업식이 있고 4월에 입학식을 하는 일본이라 학교 건물에는 졸업생을 위한 현수막이 세로로 길게 걸려 있었다. 


축 졸업. 무사키타는 언제까지나 너희들의 서포터입니다.

(卒業ムサキタいつまでも君たちサポータです)


비도 그쳤고, 골목이 좁고 아기자기한 동네이니 걸으면 좋을 듯했다. 학교에서 히키니쿠토 코메까지 걸어서 40분. 천천히 출발하면 식사 예약 시간에 여유 있게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 걷게 만드는 무적의 플레이 리스트 장착하고 걷기.


동네를 구경하며 여유 있게 걸었더니 식사 시간에 거의 딱 맞춰 도착했다. 매장 앞에 대기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이름이 불렸다. 식사권을 받아 든 직원은 아침에 예약을 받은 직원과 다른 사람이었는데 주문하는 방법부터 먹는 방법까지 일본어로만 안내가 되었다. 세 덩이의 함바그가 순서대로 개인 화로에 놓이는 곳. 여기저기서 밥을 추가하는 소리가 들린다. 갓 지은 흰쌀밥과 달달한 함바그의 조합은 사실 맛이 없을 수 없는 조합. 노른자를 터트려 먹기도 하고, 간 무를 얹어 먹기도 하고, 소스를 첨가해 먹기도 했다. 밥 한 공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쯤 되니 번거로운 기다림이 인정되는 곳이었다.  


일본 드라마 <내가 연애할 수 없는 이유>에선 여자 주인공이 데이트를 키치죠지에서 한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굳이 키치죠지란 지명을 꼭 집어 말한 덕에 아주 오래전 본 드라마인데도 그 대사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키치죠지는 일본인들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동네로 자주 언급될 정도로 예쁘고 스타일리시하며 아기자기한 곳이다. 생활용품을 파는 작은 가게들과 카페, 한 집 건너 있는 카레집, 옷가게와 빈티지 가게들은 자주 걸음을 멈추고 쇼윈도를 건너다보게 한다. 


이중 제일 좋아하는 곳은 작은 공원을 향해 너른 창이 있는 마가렛 호월 카페. 간단한 식사를 하는 사람들 틈에서 하프 보틀 스파클링 와인을 시켰다. 작은 공원에 자전거를 주차하고 건너편 빵집에 들러 빵을 한 봉지씩 사가는 사람들이 꽤 많다. 저 건너의 도넛 가게보다 이 빵집이 주민들이 찾는 진짜 맛집이구나. 구글 지도에 꾹 저장했다.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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