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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Feb 21. 2023

완전하지 않아서

어쩌면 보통날 12


배수아 작가의 산문 <작별들 순간들>을 읽었다. 정원이 딸린 낡은 오두막에서 읽고 쓰는 데에 많은 시간을 쓰는 일상과 직접 마주한 자연에 대해 유려하게 쓴 문장이 가득한 책이었다. 표현된 묘사를 통해 베를린 인근 시골 마을의 오두막에서 이 책 저 책 손이 가는 대로 읽어가며 사는 전원의 삶을 상상했다. 그러나 이내 포기했다. 책 곳곳에 나오는 이름들인 수레국화와 앵초, 메꽃과 바다케일, 투야나무와 딱총나무, 백양나무와 맨드라미 등을 전혀 이미지화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몇 년 전부터 빠져들어 한참 마셨던 와인에 어느 순간 흥미를 잃은 것도 와인이 가지고 있는 다양하고 섬세한 자연의 향을 도무지 구분할 수가 없어서였다. 분명 이 품종은 자두와 앵두 향이 느껴진다는데. 저 품종은 블랙베리와 제비꽃, 삼나무 향이 느껴진다는데. 대체 앵두와 제비꽃 향이 뭔지 알아야 말이지. 아무리 마셔도 와인 간의 유의미한 차이를 느끼지 못했고 그러다 보니 차츰 와인을 마시는 횟수가 줄었다. 이제는 기념할 만한 날에만 겨우 품종의 특징이 명확해 몇 가지의 향과 맛이 구분되는 특정 소비뇽 블랑이나 샴페인 정도만 고른다.


장미와 튤립, 은행나무와 단풍나무 정도의 외형만 구분 가능한 자연 무지렁이. 모래 놀이를 하던 초등학교 운동장에 드리운 나무의 그늘이 어디서부터 비롯되는지 하늘을 올려다본 적 없던 나는 줄곧 자연의 세계를 궁금해하지 않은 상태로 자랐다. 앵두를 찾아 만져보고 살펴보고 냄새를 맡을 생각을 하지 않는 호기심의 부재. 누군가가 손에 쥐어주고 먹어보라 하지 않는 이상 나는 끝까지 앵두 냄새를 모르고 살 것이다. 나무와 흙과 달과 꽃과 바람에 대해선 책상머리 배움보단 손 끝 체득이 필요한 것인데 나는 나를 알고, 나는 결코 체득하려 하지 않을 거니까.


직전 글을 업로드 한 날짜를 보니 1월 말. 벌써 한 달 가까이 글을 쓰지 않았다고 자각해 모니터 앞에 앉았다. 글을 써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하는 건 '이 내용을 써야지'보다 '일단 뭐라도 써야지'다. 아무 문장을 썼다 지우고, 아무 단어를 썼다 지우고, 게 중 괜찮아 보이는 단어는 남기고, SNS에 짤막하게 적었던 문장을 옮기고. 


글은 이렇게 몇 번이고 썼다 지우며 신중하게 쓰는데 말은 왜 그렇게 빠르고 쉽게 내뱉어버리는 걸까. 며칠 전 지인들과 점심을 먹으며 나누었던 한 시간 여의 대화 속에 회사 상사의 흉이나 TV 예능 속 연예인 이야기 등 내가 소재를 던지고 내뱉은 말들 중 괜찮았던 부분이 하나도 없던 거 같아 돌아오는 내내 스스로가 끔찍하게 느껴졌던 기억이 떠오른다. 


글과 말이 합일되는 삶을 추구하고 싶다. 글을 수정하고 또 수정하는 것처럼. 당장은 어렵겠지만 뇌를 거치지 않고 일단 열고 보는 입의 속도를 조금만 늦추는 것부터. 말을 할 땐 좀 게을러도 된다는 마음으로. 


 <작별들 순간들>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플롯이나 형식이 없이 파편으로 이루어지는 FM(작가의 이름)의 글에 대해 물을 때 "그것은 내 가장 깊은 곳을 건드리고 깨어나게 했어,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이나 문장을 묻는 거라면, 나는 전혀 기억나지 않아"라 답한다고. 플롯과 형식이 잘 갖추어진 책을 몰입해서 읽었음에도 시간이 지나면 그 책에 대해 대부분 잊어버리는 내가 책을 조금이라도 기억하려는 방법. 써 놓는다. 이렇게. 


"우리는 때로, 결국은 핏속에 간직된 취향의 요소로 귀결될 수밖에 없을 것 같은 문제로 다르다. 그가 높이 평가하는 몇몇 작가들은 나는 좀 지루하다고 여긴다. 반면에 내가 좋아하는 몇몇 작가들을 그는 살짝 폄하하는 것이 분명하다." - <작별들 순간들>, 배수아


"우리의 궤적은 일정한 보폭으로 이루어진 단호한 행진의 걸음이 아니라 앞으로 갔다 멈추고 심지어 때로는 뒤로 가기도 하는 춤의 스텝을 닮아 있을 수밖에 없다고 믿고 있다.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만 아주 천천히 나아간다고" -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 백수린


나는 위 두 문단을 "정말 좋다" 소리 지르고 싶을 만큼 좋아 신이 나서 옮겨 적었지만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두 책을 다시 읽고 나면 '왜 이 문장을 꼽았지?' 하게 될지도 모른다. 독서엔 의외로 시의성이 발휘되므로. 그러나 결국은 핏속에 간직된 취향의 요소. 내가 나로서 여전하다면, 그때 더 와닿는 문장이 있을지언정 이 문장이 마냥 낯설지는 않을 테지.


즐겨 보는 유튜브 채널인 <원지의 하루>에 새 영상이 업로드 됐다. LA까지 가는 아시아나 항공의 편도 좌석을 비즈니스 클래스로 구입하여 가는 내용이었다. 라운지에서 식사를 마치고 탑승하기 직전, 원지는 "자본주의 끝판왕이 항공 좌석이 아닐까 한다"며 "돈만 내면 사람의 인성, 직업, 나이, 성별 상관없이 무조건 비즈니에서 맞는 대우를 해주는 것이 너무 무서우면서도 공평하다는 생각이 든다" 했다. 이코노미 좌석이나 비즈니스 좌석 모두 주어진 창문의 크기는 똑같지 않냐는 내 말에 그 창문이 이코노미 좌석에는 고작 하나가, 비즈니스 좌석에는 무려 세 개가 주어지는 게 항공기라는 세계라는 말을 어느 지인이 했었던가.


직전에 완독한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에선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었다. "친구의 집은 정말 아름답고, 나는 파리의 건물들과 오래된 골목, 시간이 깃든 것을 존중하는 파리를 여전히 좋아하지만, 6층까지 계단을 오르내리며 이동이 자유롭지 않은 장애인들에게 이 도시는 정말 열악한 곳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파리와 인연이 깊지만, 아이가 휠체어를 타고 생활하게 되면서 이제는 파리가 정말 싫어졌다던 사랑하는 친구 C의 말을 들은 이후 나는 파리를 예전과 같은 눈으로 바라볼 수 없게 됐다". 파리를 여러 번 여행하면서,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을 오르내리며 나는 단 한 번도 휠체어를 탄 사람의 입장에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단 걸 깨달았었지.


책을 읽으며, 글을 쓰며, 영상을 보며 생각한다. 놓치고 살고 있는 많은 부분에 대하여. 결국은 바꿀 수 없는 근본적 취향의 요소 덕에 구입하는 책도, 보는 영상도, 쓰는 글도 선호와 한계가 확실하지만, 내가 완전하지 않은 사람임을 인지하게 하는 건 그 어디에나 존재한다. 시야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확장될 수 있다.


방금 구글에서 투야나무를 검색하니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측백나무라 한단다. 측백나무를 검색하니 낯설지 않은 나무들의 사진이 주르륵 뜬다. 저 동글동글한 나뭇잎을 가진 듯 했던 게 측백나무구나. 하나 더 알았다. 알아가면 되는 것이다. 완전하지 않아서 알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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