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이 Feb 23. 2019

13. 너와 함께라면 더 : G.C.F in Tokyo

방탄소년단 덕후 일기 13

 

 ‘처음’이라는 단어가 주는 강렬함을 따라잡을 수 있는 게 있을까. 처음 마셔 본 커피, 처음으로 맞춘 교복, 처음 좋아했던 너, 처음 생긴 내 차, 처음 갔던 콘서트 등. 지금은 익숙해져 그걸 행하고 있다는 걸 인지조차 못 하는 루틴들도 거슬러 올라가면 모두 처음이 있었다. 온갖 처음들을 모아 놓으면 설렘이란 토대 위에 하나의 거대한 형태가 솟아날 테지.      


 내게 가장 강렬한 ‘처음’을 선사한 건 20대 초반, 혼자 떠났던 첫 도쿄 여행이었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혼자'인 것도, ‘해외'를 나간 것도 ‘처음'이었고, 이 처음을 위해 ‘여권'을 만든 것도, ‘비행기'를 타는 것도(심지어 그전까진 제주도도 가본 적이 없었다), ‘공항'에 가는 것도 모두 처음이었다. 이토록 ‘처음’이 강렬할 수 있을까. 그러니 내게 이때의 도쿄가 잊힐 리가.      


 일본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서 도묘지가 마키노에게 첫 데이트를 신청하며 만나자고 했던 에비스 플레이스에선 <꽃보다 남자>의 OST를 무한 반복하며 거닐었고, 도쿄타워 아래에선 고개를 잔뜩 젖혀 하늘과 첨탑을 오랜 시간 올려다봤다. 긴자와 시부야, 키치죠지의 골목들을 마치 지도를 그리러 나온 사람 마냥 구석구석 오 다녔고 오다비아의 레인보우 브릿지를 향해 앉은 벤치에선 몇 캔의 맥주를 마셔도 당최 취하질 않았다.


 비 오는 요요기 공원을 하염없이 걷기도 했다. 미리 정해 온 여행 스케줄에 딱 맞춰야만 한다고 생각해 비가 와도 계획대로 공원을 찾았던 거였다. 요령도 없고 융통성도 없이 그랬다. 그래도 좋았다. 온갖 낯선 것들만 가득한 곳에 처음 와 있는 데다가 일상과 똑 떨어져 시덥잖은 수만 가지의 생각과 수만 가지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다녔기 때문이다. 이 처음을 행하고 있다는 감동들만으로도 충분해 외롭다든가 누가 같이 있었으면 좋겠다든가 하는 감각은 끼어들 틈이 없었다. 딱 하나, 사진 찍을 때만 빼고.     


 컴팩트한 디지털카메라 하나만 챙겼던 터였다. 타이머 기능이 있어서 괜찮은 곳에 올려두고 셀프 촬영하면 되겠다 싶었는데, 찍어보려고 하면 주변에 사람이 너무 많거나 올려 놓을만한 곳이 없거나 구도가 나오질 않거나 그랬다. 쭈뼛대다가 짧은 팔을 뻗어 대충 셀카를 찍고 있으면 모두 나만 보고 있는 것 같아서 대충 몇 장을 찍고 자리를 떠 버렸다. 일정을 마무리하고 돌아온 숙소에선 그렇게 찍은 셀카 사진을 지우는 데에만 한참이었다. 제대로 각 잡고 찍어도 잘 나올까 말까인데. 도망치듯 찍어놓은 사진들은 당연히 온통 엉망이었다.


 분명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나면 궁극엔 흐려지고야 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어쩌면 내가 봤던 드라마나 누군가에게 들었던 이야기, 어딘가에서 봤던 글이 합쳐져 내가 하지 않았던 것도 한 것처럼, 말했어도 하지 않은 것처럼 기억되고 있는 것도 많을 것이다. 사람의 기억력이라는 게 고작 그 정도니까. 몇 장의 풍경 사진들만 남은 그때의 도쿄. 잊힐 리 없는 처음의 도쿄라지만 그 이후 경험한 도쿄나 남들이 경험한 도쿄가 합해져 다른 도쿄를 지금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때 더 열심히 기록하지 못한 걸, 조금의 창피함을 무릅쓰고 사진을 좀 더 찍어보지 못한 걸, 사진보단 동영상을 찍어놓는 것도 좋았을 거라는 걸 여행이 끝나고 돌아오는 내내 아쉬워했다. 처음은 강렬함만큼이나 강한 후회도 남겼다.      


 도쿄를 떠올리면 이 모든 처음을 얘기해야만 한다. 이다음부턴 시간 나고 여유 있으면 항공권부터 검색하는 ‘여행 권유자’로 여권을 갱신할 정도로 수없이 여행을 다니고 있지만, 이 첫 도쿄만큼 자극에 강하게 노출되었던 적은 그 이후 단연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습 영상이나 대기실 모습 등 기획사에서 관리하는 방탄소년단 유튜브 공식 채널에 낯선 제목으로 올라 온 <G.C.F in Tokyo>를 처음 봤을 때, 진심으로 떨렸다. 디렉터 JK, 액터 JM. <G.C.F in Tokyo>는 지민이와 둘이 ‘처음’으로 같이 떠난 ‘도쿄’ 여행을 담은, 정국이가 직접 제작한 영상이었다.     


 사실 그땐 입덕한 지 그리 오래지 않은 때라 이 영상이 처음 나왔을 때의 엄청난 반응이 의아했었다. 멤버들끼리야 서로 워낙 친하니까 같이 여행 갔다오는 게 뭐 대수라고 싶었는데, 예전 영상들을 모조리 섭렵한 후에야 이해했다. 15살에 연습생이 되어 17살에 데뷔한 정국이는 데뷔 초, 사춘기를 앓는 예민한 청소년의 모습이 의도치 않게 드러나곤 했는데 형들 중 말투나 행동이 특히 다정한 지민이의 애정 표현을 불편해하는 듯한 내색을 비추곤 했던 거다. 당시 일부 지민의 팬들은 그런 정국을 향해 섭섭하다는 표현을 많이 하곤 했단다. 그 두 사람이 함께 여행을 다녀왔으니. 그런 반응은 당연한 거였다.  


 게다가 이 영상은 여행하는 동안 내내 정국이 지민을 찍은 컷들을 편집한 것으로 마치 지민에게 바친 헌사와도 같이 편안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가득 차 있다. 사춘기를 모두 지난 성년으로, 동성끼리의 애정 표현이 부끄럽고 민망했던 어린 마음에서 벗어나 가끔 친구 같기도 하고 동생 같기도 한 형 지민에게 많이 자란 어른의 시선으로 따뜻한 애정을 감추지 않고 오롯하게 내보이고 있다. 지민이 정국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런 두 사람이 함께 떠난 여행이 처음이란 것과 그곳이 도쿄라는 것만으로도 마치 내가 보고 느꼈던 처음의 도쿄와 어딘가 비슷했을 것만 같았다. 그러면 기분이 이상해지곤 했다. 게다가 나는 없었던, ‘네’가 있는 여행이다. 덕질에 있어 ‘의미 부여’만큼 뗄 수 없는 말이 있으랴. 이런 감정들은 이 영상의 배경음악인 Martin Garrix, Troye Sivan의 <There for You>를 어느 순간에나 그냥 흘려들을 수 없게 만들었다. 꼭 내 여행의 배경음악이었던 것 마냥.     


 <G.C.F in Tokyo> 및 당시의 인터뷰와 트위터, 일부 목격담을 기준으로 정리하면 여행의 전말은 이랬다. (여행이 진행된 순서는 다를 수 있다.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Love yourself (承) ‘her’> 앨범이 발매되고 한 달이 지난, 2017년 10월 말. 정국과 지민이는 바쁜 와중에 짬을 내 도쿄 여행을 떠났다. 한가해질 때까지 기다리려면 한도 끝도 없었을 거다. 오히려 공백기가 되면 해외 투어 스케줄에 다음 앨범 작업에 더 정신이 없어질 게 분명했다. 게다가 몇 년 전부터 기회가 된다면 정국과 같이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지민이었다. 10월 13일 지민이의 생일 기념으로 정국이는 10월 말에 떠나는 도쿄 항공권을 준비했다.      


 여행 출발 당일. 정국의 아버지와 지민의 동생의 배웅을 받으며 김해국제공항에서 탑승 수속을 밟았다. 매니저도 없이, 다른 멤버들도 없이, 게다가 익숙한 인천도 김포도 아닌 김해에서 출발하는 모든 게 ‘처음’인 여행. 에어 브릿지를 건너는 지민의 뒷모습에서 감출 수 없는 흥분이 드러났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도쿄. 벌써 어둠이 내렸다. 짧은 여행 기간에 비와 어둠은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는다. 비슷한 생김새에 비슷한 도심 분위기. 서울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도쿄라지만 후드 모자와 캡모자를 눌러쓴 채 우산을 쓰고 나니 이토록 익명성이 완벽하게 보장되는 곳이 없다. 많은 사람들 틈에 껴 횡단보도를 건너고 길을 걸었다. 펍에서 술 한 잔을 나누고 다트도 던졌다. 할로윈을 곧 앞둔 분위기도 제대로라 영화 ‘스크림’ 마스크도 샀다.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분장을 하고 다니는 틈에 이걸 쓰고 돌아다녀도 전혀 튀지 않을 터였다. 가면을 쓰고 히로오에서 시부야까지 30분을 넘게 걸어 다녔다. 기분만큼은 완전한 자유였다.     


 다행히 다음날은 날이 맑았다. 고만고만한 건물을 내려다봤다. 롯폰기도 좋지만 쇼핑도 하고 밥도 먹기 위해 오모테산도 쪽으로 이동했다. 하라주쿠 역에서 오모테산도 역까지 이어지는 넓은 거리는 늘 차와 사람들로 가득하지만 안쪽 골목으로만 들어서면 같은 공간이 맞나 싶을 정도로 한가해진다. 상점에 들어가 옷도 골랐고, 홈시어터를 갖추기에 필요한 장비들도 샀다. 이미 한국 사람들한테 유명한 ‘레드락’에서 스테이크 덮밥도 싹싹 긁어 먹었다. 식당에서도 그렇고 거리에서도 그렇고 우산이란 장치가 사라지니 알아보는 시선들이 종종 있다. 사진도 몰래 찍히고 있다. 그래도 스케줄처럼 마비가 되듯 다니지 못할 정도가 되는 건 아니니 이쯤이면 충분히 괜찮다.      


 어디 멀리 간 것도 아니고 그저 이 부근만 오 다닌 것뿐이었는데 금방 해가 졌다. 일상의 공간에서와 여행의 공간에서의 시간은 다른 속도로 흐르는 듯하다. 택시를 타고 디즈니랜드로 향했다. 낮부터 신나게 돌아다니며 놀이기구도 타고 사진도 찍고 하면 좋았겠지만 북적거리는 낮의 디즈니랜드를 감당할 수 없을 터였다. 이 시간부터의 디즈니랜드라니. 짧은 시간은 아쉽지만 역시 시도를 안 하는 것보다야 낫다.      


 밤의 놀이공원처럼 낭만적인 게 있을까. 밤의 회전목마, 밤의 신데렐라 성, 밤의 가로등, 밤의 미키마우스, 밤의 헐리우드 거리. 야간의 디즈니랜드는 낮보다 더 동화적이다. 가로등의 조명과 불빛과 그 아래에서 반짝이는 사람들의 웃음들. 고개를 살짝 숙이고 이동할 수밖에 없지만, 신이 난 발걸음으로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몸이 꼬리처럼 붙은 미키마우스 모자를 하나 사서 썼다. 까딱까딱 움직이는 머리 덕에 미키마우스의 몸은 자주 상하로 흔들리고 있었을 거다.     


 앨리스의 찻잔 모양을 한 회전 컵 놀이기구를 탔다. 이게 이렇게 어지러운 놀이기구였나. 어지러워서 표정 관리가 하나도 안 된다. 모자가 떨어질까 꼭 붙잡았다가 회전 컵 가운데를 잡았다가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너무 재밌다. 입이 떨어져 다물어 지지가 않는다. 놀이기구에서 내려와서도 이 기운이 가시질 않는다. 허리가 끊어져라 웃었다.


 별로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다시 입구로 걸어 나오면서 몇 번이고 멈춰 사진을 찍었다. 이제 돌아가면 윙즈 해외 투어에 아메리칸 뮤직 어워즈 참석, 각종 미국 스케줄에 연말 시상식 준비까지 할 게 많지만 그럼에도 좋았다. 올해 무엇이 가장 기억에 남느냐는 질문에 이곳을 바로 떠올릴 정도로 기억에 남을 여행이었다. 조금이라도 시간이 나면 연습실에만 있었던 때에서 조금 자랐다. 내가 행복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행복한 기운을 가지고 돌아가 힘낼 수 있을 것 같다. 여행이 끝나간다.

     

 위 문단들은 정국이가 때론 앞서서, 때론 옆에서, 때론 뒤로 물러서서 담은 지민이의 모습을 보이는 그대로 고스란히 베꼈을 뿐이다. 그럼에도 소설 같은 이유는 지민을 액터로 지칭한 것처럼, 대상화된 지민만을 진득하게 따라가는 정국이의 시선 때문이다. 그동안 유튜브 채널을 보며 익혔던 다양한 작업 스킬들을 적용한 편집과 색감, 배경음악도 한몫했다. 지민이 뮤즈여야 했던 이유는 물론 여러 가지가 있었겠지만 정국의 카메라 앞에서 서슴없이 행동할 사람임과 동시에 혹시나 촬영을 위한 요구들을 군말 없이 들어 줄 사람이라서가 아니었을까.  

    

 지민이 역시 iMovie를 이용해 짤막하게 편집한 영상을 업로드했었다. 다만 정국이의 고퀄리티 영상에 살짝 밀렸을 뿐이다. 누구 한 사람만의 일방적인 시선이 아니었다. 함께 함과 동시에 내가 아닌 상대도 오롯하게 응시했던 두 사람의 여행.

    

 가보고 싶은 곳이 많아진 터라 도쿄는 그 처음 이후 딱 두 번을 더 찾았었다. 한 번은 혼자서, 한 번은 여동생과. 혼자 다시 찾은 도쿄는 새롭지 않았다. 도쿄타워와 레인보우 브릿지는 새로울 게 없었고, 그때 식사했던 식당들도 다들 그 자리 그대로 있었다. 오모테산도나 키치죠지의 골목들은 여전히 깨끗하고 조용했지만 낯설지 않았다. 열흘이라는 시간 동안 가마쿠라나 요코하마같은 근교를 다녀왔을 때 빼곤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표정없이 걸어 다녔다. 이 곳에서 꽤 오랜 시간 지낸 유학생인 줄 알고 누군가가 말을 건네었을 정도였으니.


 하지만 여동생과 같이 간 도쿄는 달랐다. 갔던 곳을 다시 가도 새로웠다. 맛있게 먹었던 음식을 추천하고, 아자부 주반 쪽에서 걸어 나와야 도쿄타워가 골목에서 예쁘게 보인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시부야의 밤 거리를 걸으며 도쿄의 호오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혼자 다닌 수없이 많은 여행들이 준 기쁨은 모두 제각각 다른 모습으로 만족스럽게 남았지만, 누군가와 함께 했을 때만 얻어지는 것들이 있었다. 동생이 찍어 준 내 사진을 다시 찾았다. 나는 이렇게 웃었고, 동생은 나를 이렇게 바라봤었구나.     


 <G.C.F in Tokyo>를 다시 봤다. 정국이와 지민의 걸음에 내가 당시 도쿄 거리에 흩뿌렸던 모든 후회 모먼트가 상쇄되고 있다.


 이젠 도쿄 하면 ‘처음’의 강렬함만 기억해도 충분할 것 같다.  

 나의 후회는 자연 소멸됐다.             




 P.S          



 <G.C.F in Tokyo>를 막 업로드한 후 주변 사람들에게 처음부터 본인이 다 작업한 거라고 으쓱대며 자랑하는 정국이의 모습을 보던 남준이 아래와 같이 인터뷰했다.     


 ‘새벽 3시인가, 이제 집에 가려고 하는데 밖에서 막 똥땅똥땅 이러는 게 들리는 거예요.

 우리 작곡가들 참 열일하는구나, 했는데 작곡가 방에는 다 불이 꺼져있는 거예요.

 설마 얼마 전에 작업실이 생긴 우리 정국이가? 하고 방 앞에 갔더니 노래가 딱 들리는데,

 그게 엄청 훌륭한 거예요. 목소리가 약간 트로이 시반이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이야 얘가 진짜 미쳤구나, 얘가 진짜 곡 쓰는 데까지 재능이 대박이구나, 하고

 문을 딱 열었는데 지민이 얼굴이 빡!

 중간에 보면 50초 정도 쯤에 지민이 엽사 나오죠? 그 얼굴이 빡! 하고...’     


 새벽 3시에 한창 지민의 영상을 작업하고 있던 정국이와

 택시 안에서 불빛으로 장난치며 이상한 표정을 짓던 지민이의 표정이 50초 쯤에 나온다는 걸 알고 있는 남준이.      


 [나는 나를 보는 너의 시선으로 완성된다]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따뜻한 우리 애들 덕에 올겨울이 유난히 춥지 않은 것 같다고 한다면,

 덕후의 뇌내망상이 어디까지 갈 것인가 조금 무서워지는 것 같기도 하고...  





 <G.C.F in Tokyo> 가 궁금하다면, 아래 링크로

https://youtu.be/XrTNLkqGrlc




매거진의 이전글 12. 뷔와 태태와 태형 사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