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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Nov 30. 2024

도쿄 단상

소극적 일상 03


1. 11월 중순이 넘어가도 춥지 않은 날들의 연속. 가을 재킷을 입고 출근했던 날 어둑한 퇴근길의 하늘을 보며 알았다. 계절의 온도는 변해도 계절의 시간만은 변하지 않는다고. 낮이 귀신같이 짧아졌고 밤이 길어졌다. 정시에 퇴근해도 야근을 한 것만 같은 찝찝한 날이 곧 다가올 것이다. 계절의 시간으로.


2. 여행 하루 전. 여행지에서 들을 노래 재생목록 중 제일 첫 곡은 요아소비의 <아이돌>. 사랑한다는 거짓말로 쌓는 커리어라니. 언제쯤 이 가사가 슬프지 않을까. 가급적 현지 노래로 차곡차곡 쌓은 재생목록도 준비 완료.


3. 11월 20일 아침. 인천공항이 혼잡해 활주로에서 한 시간 정도 대기하던 중, 이제 이륙까지 앞으로 10분이 남았다는 기장의 안내방송이 나왔다. 우리말, 영어에 이은 일본어 방송까지 기장이 직접 진행했는데, "약 10분 뒤에 이륙합니다"의 10분을 한국어 '십분'으로 발음한 실수에 웃었다. 그러다 얼마 있지 않아 바로 앞뒷말 다 생략하고 대뜸 じゅっぷん(10분) 걸린다고 정정해 속으로 좀 더 웃었다. 아무렴. 3개 국어로 생방송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4. 엄마는 내가 세 살 때 나를 영재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때 이미 한글을 깨쳤기 때문이다. 주변 어른이 간판 하나를 가리키면 내가 그 상호명을 읽고, 그런 나를 보며 모두가 웃고, 다른 어른이 다른 간판을 가리키면 내가 그 상호명을 읽고, 모두가 나를 천재라고 불러주는 일이 엄마에겐 엄청난 즐거움이었다고 했다. 눈에 보이는 글자를 읽을 수 있는 게 좋았는지 재잘재잘 끊임없이 무언가를 읽어댔다는 나. 전혀 기억조차 없는 어린 시절의 일화지만 아마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전철 내부에 가득한 광고와 안내문의 일본어들을 하나하나 읽어볼 생각에 무척 신났다. 방범카메라 작동 중 / 대망의 감사가격으로. 이번 가을 겨울 첫 세일 유니클로 / 아이 키우기 응원 공간 / 우선 좌석 / 이 창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 부동산업을 개업하자 / 파워를 보존하는 활력 충전. 이만큼이나 읽을 수 있었다. 칭찬해 주는 다른 어른은 없지만 이미 어른이 된 내가 나를 칭찬한다. 그간 공부 열심히 했다, 잘했어.


5. 전철 의자에 앉아 무릎을 붙이고 발 끝을 안쪽으로 향하게 한 남성 두 명을 보았다.


6. 호텔이 있는 지하철역을 가려고 환승역에서 내렸다. 캐리어를 든 관광객들의 숫자가 훅 줄고, 현지인의 숫자가 훅 늘었다. 갈아타야 할 전철이 곧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고 백팩을 멘 사람들이 일제히 가방을 벗어 앞으로 메거나 손으로 들었다. 그 완벽한 군무에 속으로 열심히 환호했다.


6. 전철 의자에 앉아 무릎을 붙이고 발 끝을 안쪽으로 향하게 한 남성 한 명을 더 보았다.


7. 호텔의 일본인 직원이 내년 1월에 서울 여행을 간다고, 추천해 줄 만한 곳이 있냐고 물어보았다. 경복궁, 성수동, 한남동까지 말하니 더 이상 생각나는 게 없었다. 음, 그게, 아무래도 저는 도쿄보다 서울을 더 모르는 지방 사람이라서요. 물론 마지막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8. <서진뚝배기> 일본 팝업스토어 정보를 검색하는 일본인 여성 두 명과 본인의 이름인 아사히를 넣어 로제의 아파트를 부르는 일본인 가족 사이에 디즈니랜드 입장을 기다리는 한국인인 내가 있다.


9. 당일 예약이 가능한 긴자의 오마카세 식당 <스시 유>에서 2시간이 넘는 동안 즐겁게 식사를 했다. 카운터 좌석이 총 6석밖에 안 되는 작은 가게라 각각 셰프님과 대화를 주고받다 자연스레 옆 사람과, 그러다 전체와 대화를 나누게 되는 신기한 가게였다. 대화 주제는 고향과 결혼과 회사와 초밥을 넘나들다 곧잘 일본어를 할 줄 아는 혼자 온 외국인인 나를 향하게 되었는데 도쿄에선 어디가 가장 좋냐는 말에 고민이 길어지자, "바로 여기 아닌가요?"라고 대신 답한 손님을 향해 건배를 외쳤다.


10. 도쿄에서 어디가 제일 좋은가. 여행하는 내내 고민하다 알았다. 이곳에서 듣기 위해 선곡해 온 노래를 들으며 산책하는 그때의 동네. 그게 제일 좋다는 걸.


11. 삼각형 모양이 생각나는 걸음걸이. 거리를 걷다 보면 안짱다리로 걷는 여성들을 이따금 마주친다. 이 걸음걸이에 대해 로런 엘킨은 <도시를 걷는 여자들>에 이렇게 썼다.


다른 외국인들에게 여자아이들이 왜 그러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어릴 때부터 변태들이 치마 속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무릎을 모으라고 교육을 받아서 그래"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중략) 귀여워 보이려고 그러는 거라고 다른 사람이 말했다. 그런 걸음걸이를 X-갸쿠(다리)라고 부른단다. (중략) 여자들이 도자기 인형처럼 레이스와 러플이 가득한 옷을 입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안짱다리로 종종거리며 걷는다.


몇 해 전 내 뒤에서 걷던 여자 상사가 내 걸음이 팔자라며 보기와 다르게 걷는다고 했던 말이 떠올라 내 발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우리 집에서 "여자애가" 이렇게 걸어야지, "여자애가" 조신해야지, "여자애가", "여자애가" 하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는 걸. '보이는 게 나쁘다'라고 가르치는 환경에서 자란 결과물은 불편한 걸음걸이를 만들어내고 만다. 지금처럼 편하게 마음껏 걸어야지. 여자가 걷는 게 아니라 사람이 걷는다.


12. 부족한 돈, 끝이 잘린 종이 지도, 모자란 용기를 가지고 처음 여행을 왔던 그때의 도쿄. 촘촘하게 짜 온 계획은 늘 조금씩 어긋났고, 어긋나며 생긴 틈을 어떻게 메워야 할지 몰랐던 어린 나는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장 오래 도쿄의 풍경을 내다볼 수 있는 JR 야마노테센에 탑승했었다. 한 바퀴 빙 돌아 출발지로 다시 돌아오는 동안 어떤 마음을 가졌던가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주 오랜만에 탄 야마노테센에서 그때의 여행이 조금은 그리운 것 같다는 무척 사치스러운 생각을 했다.


13. 우리 현실과 아주 동떨어지지 않으면서도 완전히 우리 같지 않은 정도의 판타지가 좋아 남들이 여러 가지의 미드, 영드를 볼 때 나는 몇몇의 일드만을 반복해 봤었다. (지금도 다른 장르는 전혀 관심 없이 드라마만 찾아본다) 나만의 기준이 모여 지금의 나를 이루었다. 이게 그랬던 나를 거친 이러한 나다. 메이지 신궁 외원 은행나무 거리에서 <꽃보다 남자> 츠쿠시와 루이를 떠올리며.


14. 만원의 전철에선 자꾸 나를 시험하게 된다. 만약 내가 내릴 역에서 지하철 문이 나와 가까운 쪽에서 열리면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그리고 보통 이런 시험을 하고 있을 때면 어김없이 내가 바라는 쪽의 문이 열리곤 한다. 운이 내게 말한다. 알아서 맞춰 줄 테니, 쓸데없는 시험에 마음 쓰지 말라고.


15. 8일간의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날. 공항에 다다를 즈음 비행기 지연 안내 메시지를 받았다. 11월이라는 게 믿을 수 없을 만큼의 폭설로 인천공항이 거의 마비 상태라는 걸 그제야 뉴스를 보고 알았다. 오후 1시 20분 출발 예정이었던 비행기는 4시간이 넘게 지연되어 출발했고, 인천공항 활주로에 도착해서도 약 2시간을 대기해 겨우 한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짐을 찾고 나오니 자정. 집까지 가는 별다른 수가 없어 공항 도착층 끄트머리에 자리를 잡고 쪽잠을 잔 뒤 첫 차를 타고 내려왔다. 기상 이변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작금의 상황을 몸의 피로로 느낀 날. 여행에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이지만 이 정도의 '시간'만으로 해결이 되었다는 게 다행이었다. 역시 아무래도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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