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이 Aug 18. 2019

30. 단상들 pt.4

방탄소년단 덕후 일기 30



 1. 착한 일 하면 포도 주시나요



 초저녁 잠이 많은 내가 제일 견디기 힘들어하는 이 시간. 곧 밤 11시로 넘어가려는 시계를 한숨을 푹 쉬고 바라봤다. 가만히 소파에 앉아 있으면 그대로 눈이 감길 것 같아 부산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세수도 하고 머리도 감고 화장도 하고 옷도 갈아입었다. 자정이 넘어 회사에 도착해야 했기 때문이다. 턱이 아플 만큼 하품을 쩌억- 했다. 중국에서 한국을 방문하는 어린이 합창단과 그들을 취재하는 취재진들을 인천 공항에서 맞이한 뒤 일주일간 한국 일정을 인솔해야 한다. 여기서 인천 공항까지 족히 4시간은 걸릴 터. 그 생각만으로도 다시 하품이 나왔다. 턱이 아프게 하품을 쩌억-. 


 그래도 이 시간의 도로는 이런 색을 띠고 있구나. 매일 루틴 하게 오 다니는 출퇴근길 네온사인이 새삼스럽다고 생각하며 빠르게 차를 몰았다. 회사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인솔 업무를 맡은 다른 직원들과 함께 관광버스에 올라탔다. 불편한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선잠에 들었다가 가로등 불빛에 깼다가를 반복하니 인천 공항 도착층에 도착했다. 풋잠 탓에 더욱 때꾼해진 눈두덩을 꾹 누르며 버스에서 내렸다. 그러고 보니 누구를 맞이하려는 목적으로 인천 공항에 나온 것도 처음이고, 그래서 출발하는 3층이 아닌 도착하는 1층으로 도착하는 것도 처음이고, 이 이른 새벽 시간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를 기다리는구나, 하는 생각도 처음 했다. 피곤함을 걷고 나니 낯선 감각들이 몰려왔다. 이런 경험들은 확실히 나쁘지 않다. 


 환잉 니 먼(欢迎你们, 여러분 환영합니다), 니하오(你好, 안녕하세요).


 겨우 내뱉을 수 있는 두 단어로 인사는 끝. 버스 두 대로 인원을 잘 나눠 태운 뒤 동튼 인천의 아침을 가르며 출발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위주의 합창단과 취재진을 비롯한 성인 인솔자(높은 급의 시 간부들도 섞여 있었다)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일정을 짠 덕에 오히려 인솔자라는 역할로 그들과 함께 하는 편이 사무실에 앉아 업무를 처리하는 것보단 나았고 실제로도 일부 그랬지만 사람을, 그것도 살아온 문화적 역사적 배경이 다른 다수의 사람을 상대하는 일은 모든 진이 빠지는 일이었다. 특히 자신들이 하고 싶은 것이나 원하는 것이 있으면 주저하지 않고 그때그때마다 당당하게 요구해오는 탓에 최대한 가능하게끔 해결해주어야 했는데, 전체 인원이 호텔에 입실한 것을 확인한 뒤 호텔 로비 소파에 앉으면 누군가에게 두드려 맞은 듯 온몸이 아파왔다. 


 많은 수의 방이 필요해 도심에서 떨어진 근교의 호텔을 예약했다 보니 이렇게 퇴근 한 뒤 집까지 1시간 넘게 운전해 오면 그대로 뻗어버리는 일주일이었다. 신호가 많지 않은 도로를 리드미컬하게 달리며 방탄소년단 노래를 큰 소리로 따라 부르는 해방의 시간이 없었다면 진작에 몸져 누웠을 것이다. 일정을 잘 마친 방문단이 무탈하게 떠났고, 나는 감기를 얻었다. 


 ‘컨디션 최악이야.’


 이 일주일에 대한 결과 보고를 작성하느라 사무실에 종일 꼬박 묶여있던 하루를 보낸 다음날이 또 출장이었다. 이번엔 고등학생 약 70명이 참여하는 2박 3일의 행사를 진행해야 했다. 큼큼. 내내 마이크를 잡고 전체 일정을 리드해야 하는데 목소리가 잘 나오질 않는 데다 몸도 더 무거워졌다. 고작 그 일주일에 체력이 바닥났다. 시간이 날 때 몸 관리가 아닌 덕질에 모든 힘을 쏟아부은 결과다. 이 출장을 끝내면 헬스라도 알아봐야 하나. 남준이가 필라테스 꾸준히 해서 자세도 좋아지고 몸도 좋아졌던데. 일도 덕질도 더 잘하려면 무엇보다 내가 건강해야 돼. 그런 생각을 하며 터덜터덜 집을 나섰다. 


 출발 장소까지 카카오 택시를 부르고 짐을 다시 점검하는데 핸드폰 충전기를 빼먹었다. 차 안에 여분이 있어 주차장을 향하는데 어라? 조수석 문 쪽에 까만 검댕이가 묻어 있다. 간밤 비의 흔적인가. 차에 가까워져 가는데 어…? 어…?? 조수석 문을 가로질러 한 뼘 길이로 흠이 나 있다. 꼭 누가 자를 댄 채 무게 있는 무언가로 꾸욱 누른 것처럼.


 “뭐야? 누가 긁고 갔네?”


 내 차 오른편에 주차된 차가 핸들을 꺾어 빠져 나가면서 차 왼쪽 뒷 꽁무니로 긁은 것 같다. 이 와중에 혹시나 싶어 물티슈로 까만 검댕이를 지워보려 한 흔적까지 있다. 매일 여닫는 운전석 쪽도 아니고, 긁고 간 차주가 전화를 걸어 사정만 얘기했다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을 텐데 이 지워보려고 한 뒤 잘 지워지지 않은 걸 확인하고도 연락 하나 없었다는 것이 이마에 주름을 빡- 지게 했다. 


 ‘아니. 이렇게 혹시- 하고 닦아볼 거였으면 전화를 해서 알려주던가.’ ‘아니야. 다 닦아지지도 않았는데 그냥 그대로 튄 거잖아? 생각할수록 괘씸하네?’로 이어지는 생각의 고리. 주변의 CCTV나 블랙박스를 확인해봐야겠다 싶은데 예약 글자를 반짝인 택시가 앞에 멈춰 선다. 아, 나 지금 출장 가는 길이지. 약간의 분노를 억누르고 핸드폰 충전기를 챙겨 문을 잠갔다. 출장 가는 동안 주변인들에게 의견을 물어보고 진행해도 늦게 않겠다 싶다. 인솔단을 배웅했던 이틀 전에 차를 운전했을 때만 해도 없었던 흠이니 그젯밤부터 오늘 아침까지로 시간은 특정된 거니 출장을 다녀온 뒤 체크해도 늦지 않겠다 싶었다. 택시에 올라탔다. 어깨가 더 무거워진 것 같다.


 2박 3일 내내, 열일곱살의 반짝반짝한 아이들 틈에 껴 있었더니 감기에 걸린 사실도, 차 뺑소니도 모두 신경 쓰이는 범주 바깥으로 밀려났다. 모둠별로 토론을 할 때 사기를 북돋는 신나는 노래들을 틀어주는데, 방탄소년단 노래를 틀었더니 쉬는 시간마다 방탄소년단 팬이라는 아이들이 찾아와 한참을 얘기를 나누다가 갔다. 티를 덜 내보겠다고 활동곡들이 아닌 앨범 수록곡 위주로 틀었더니 오히려 더 덕후임을 강조하는 꼴이 되었다. 여자 아이들 중 상당수가 방탄소년단 팬이었고, 아이들 앞에서 다녀온 지난 방콕이나 시카고 콘서트, 부산 매직샵 등에 대해 얘기하니 “쌤은 제 롤모델이에요.”하는 소리를 들었고 “그래. 우리 잘 커서 더욱 힘내서 덕질하자.”라고 답했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내게 아이들이 써 준 빼곡한 롤링페이퍼에선 '2박 3일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가 쌤과 방탄이야기 한 거예요' '쌤이 아미셔서 너무 반갑고 좋았어요' '같은 아미로서 대화할 때 즐거웠고' 등의 문장들로 가득했다. 두 배 가까이 차이 나는 나이 차이는 덕후란 미명 아래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비가 내릴 듯 말 듯 잔뜩 흐리기만 한 습한 날씨 덕에 기차역에서 서둘러 환송식을 마쳤다. 모두와 아쉬운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왔다. 늘어난 건 하나도 없는데 왜 가방이 더 무거워진 걸까. 여름빛을 머금어서 그런 걸까. 거실 바닥에 길게 누운 여름 오후 다섯 시의 빛은 의식을 몽롱하게 만드는 나른함의 완벽한 헌신이었다. 에어컨을 틀어놓고 씻고 나와 차갑게 식은 바닥에 그대로 누웠다. 설풋 잠이 들었나. 정신을 차리니 사위가 어두웠고 불을 끈 채 텔레비전의 채널을 돌리는 엄마의 기척만이 느껴졌다. 꿈뻑꿈뻑. 아직 오늘이 지나지 않았구나, 더 자도 괜찮구나. 그걸 깨달으며 다시 까무룩 잠이 들었다. 


 조용하게 쉬는 주말을 보낸 뒤 출근을 위해 채비를 갖추고 집을 나섰다. 모처럼 푹 잤더니 목소리도 괜찮고, 몸도 가뿐하다. 신경 쓰였던 두 개의 행사를 치렀고, 휴가 계획을 세워볼 참이다. 콧노래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아침. 주차장에 도착해 가방을 놓으려고 조수석 문을 여는데, 아차차. 이 검댕이가 아직도 그대로다. 맞다. 나 뺑소니 당했지. 잊고 있었다. 가만 그 흠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문을 닫고 운전석에 가서 앉았다. 기간이 특정돼 있으니 좀 늦게 확인해도 괜찮을 거니까. 


 사무실에 앉아 업무를 처리하던 중 띠링 트위터 알람이 왔다. 10월 말, 잠실주경기장 3회 개최가 확정된 방탄소년단 Speak yourself 파이널 콘서트 예매 안내다. 하던 일을 바로 멈추고 내용을 확인했다. 크게 응모와 티켓팅으로 나누어진 방식이었다. 그라운드 좌석과 1층 좌석은 팬클럽 가입자에 하에 응모를 한 뒤 당첨자를 발표하는 방식이고. 2층과 3층 좌석은 9월 이후 예매 사이트를 통한 티켓팅을 통해 좌석을 얻을 수 있단다. 응모는 8월 1일부터 7일까지. 미리 한다고 해서 좋은 좌석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응모가 시작되는 8월 1일을 달력에 크게 체크해두었다. 벌써 떨리기 시작했다.


 회사 업무를 하고 퇴근해 지난 달려라 방탄을 다시 보다가, 위버스(방탄소년단의 일상을 확인하고 팬들과 소통하는 커뮤니티 서비스. 7월 1일부터 새 서비스를 시작했다)에 멤버들이 다는 답글을 읽고, 사진을 저장하고, 글을 좀 썼다가 와인을 좀 마셨다가 노곤해지면 잠드는 하루하루를 보내니 어느새 달력에 표기해 둔 8월 1일이 되었다. 응모가 시작되는 오후 2시에 맞춰 울린 알람. 몇 초의 버벅거림을 참고 위플리(공식 MD 스토어 애플리케이션. 빅히트 샵이 위플리로 통합돼 이제 방탄소년단 공식 상품 구매 및 팬클럽 가입은 위플리 앱을 통해 진행된다)에 접속했다. 1차, 2차, 3차 지망에 맞춰 날짜를 확인한 후 응모했다. 


 와인 몇 병을 사서 퇴근했다. 와인 셀러에 채워놓고, 미리 사놓았던 샴페인 하나를 꺼내 마셔야겠다고 생각하며 조수석 문을 열어 장바구니를 꺼내는데 다시금 채 덜 지워진 검댕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나마 매일 여닫아야 하는 운전석이 아닌 게 어디야.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거슬림이 느껴지는 건 반대로 굳이 눈으로 보지 않으면 거슬릴 일이 없다는 것이니까. 그리고 오늘 방탄소년단 콘서트 좌석 당첨에 응모했으니, 응모 결과가 나오는 날까지 착하게 살아야 한다. 그래, 이것쯤이야. 쿨하게 넘어가자. 


 쪼르륵. 잔을 채 운 와인을 마시며 마음속으로 기도 했다. 종교는 없으니 모든 신을 다 불러 모아. 하나님 부처님 알라님 산타 할아버지. 저 오늘 뺑소니범을 용서한 날입니다. 그러니 제게 방탄소년단 콘서트 포도알 하나를 허락해주십시오. 아멘.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인살랴. 안 울게요. 



 P.S


 이번엔 한국의 어린이 합창단과 우리측 취재진을 이끈 인솔자의 역할로 중국 청두에 왔다. 37,8도로 이어지는 날씨에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 덕에 고군분투하며 지내던 중, 스픽콘 응모 결과가 나오는 날이 되었다. 단체 버스가 출발하기 전, 막간을 이용해 들어간 대형 슈퍼마켓에서 결과를 확인했다. 두근두근.


 <아쉽지만 당첨되지 않았습니다. 응모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작 착한 일 한 번에 너무 많은 요구를 했던걸까. 똥손다운 결과가 나왔다. 곧 출발해야하는 버스 시간에 맞춰 빠르게 슈퍼마켓 탐방을 마쳐야 하는 미션을 수행하던 중이라 좌절에 빠질 시간이 없었다는 게 다행이었다. 손짓발짓해가며 계산을 마쳤다. 버스에 올라 타 짐을 머리 위 선반에 올려놓고 숨을 골랐다. 결과가 바뀔 리 없으나 응모 결과 버튼을 또 눌러봤다. 


 <아쉽지만 당첨되지 않았습니다. 응모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차 당첨자 발표: 2019년 8월 22일(목) 오후 2시


 일주일 후 2차 응모 결과가 또 한번 나온다. 그때까지 착한 일 계속 할게요. 그러니 제 자리 하나만 꼬오옥 남겨주세요. 제발. 




 2. <Bring The Soul:The Movie>를 봤다



 2017년 윙즈(Wings) 투어를 다룬 <번 더 스테이지(Burn The Stage)>에 이어 2018년 러브 유어셀프(Love yourself) 투어를 다룬 영화 <브링 더 소울(Bring The Soul)>의 개봉 소식이 전해졌다. 개봉 날짜는 8월초. 긴 해외 투어를 끝마치고 활동 휴식기에 돌입할 때에 찾아 올, 선물같은 타이밍이다. 며칠 뒤 영화 예매 사이트에 정식 포스터와 함께 짧은 예고편이 올라왔다. 무대 위에선 반짝이는 일곱 명의 아티스트가 무대 뒤에선 평범한 20대임을 강조한 카피와 함께였다. 파리의 어느 루프탑에 모여 앉아 와인을 건배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편안한 모습도, 무대 위에서 거대한 존재감으로 빛나는 가수로서의 모습도, 그 무대를 위해 숨가쁘게 움직이고 또 휴식을 취하는 모습까지 모두 예고에 담겨 있었다. 또 얼마나 찬란하고 아프고 단단하고 아름다울 2018년의 방탄소년단일까. ‘좋아요’ 빨간색 하트를 클릭하고 위시 영화에 등록했다. 내가 본 영화 편 수 수백 개, 내가 쓴 평점 영화 편 수 수십 개 옆. 위시 영화 편 수가 0에서 1로 늘었다.


 퇴근 시간에 맞춘 회차를 예매한 영화 개봉일.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습관처럼 접속하는 트위터, 위버스, 커뮤니티를 멀리한 하루였다. 쿠키 영상이 있으니 영화 스크롤이 다 올라간 뒤에도 남아 있어야 한다는 고급 정보만 얻은 상황. 중국 출장 준비를 정신없이 해도 겨우 3시고 여러 통의 전화로 문의 사항을 해결하고 나도 겨우 4시였다. 애꿎은 인스타그램만 새로고침 하기를 여러 번. 드디어 퇴근이다.


 개봉 첫 날의 영화관은 팬들로 가득했다. 늘 그렇듯 우리끼리는 금세 알아볼 수 있다. 저 티셔츠는 달방에서 태형이가 입었던 것, 저 운동화는 방탄소년단이 모델이었던 브랜드, 저 손풍기엔 코야의 얼굴, 저 핸드폰 배경화면은 윤기. 이 개봉 첫 날을 손꼽아 기다렸을 사람들이다. 티켓을 확인받고 입장했다. 영화 시작 전, 빌리 아일리시의 ‘Bad guy’가 배경음악으로 쓰인 광고가 나왔다. 눈을 가리는 긴 생머리를 흩날리며, 앞니 두 개를 뿅 내놓고 호텔방에서 즐겁게 춤추던 정국이의 얼굴을 이 영화관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떠올렸으리라. 상영관에 어둠이 내렸다. 드디어 시작이다. 


 2018년 10월 21일, 파리 바스티유 광장 근처의 어느 한 루프탑에 방탄소년단 멤버들이 모였다. 여기서 에펠탑이 보인다고 했다며 방향을 가늠하는 윤기와 배가 고파 죽을 것 같다며 에피타이저가 언제 나오냐는 석진이의 질문 곁엔 너른 식탁과 방탄소년단 만을 위한 코스 요리 및 다양한 와인들이 준비돼 있다. 높은 빌딩이 없는 파리의 구도심, 이 건물의 가장 높은 층. 다양한 줄기로 뻗친 파리의 태양이 거실에 내려 앉았다. 박물관에 다녀오느라 조금 늦은 태형이까지 합류해 식탁에 모였다. 잔을 채운 레드 와인. 일곱개의 잔이 허공에 부딪히며 챙- 소리를 냈다. 22회의 북미, 유럽 투어를 완료한, 후련한 축배였다. 


 테라스에 나와 공기를 들이 마신 정국이 겨울이 오는 냄새가 난다며 만족스런 미소를 띠었다. 바스티유 광장엔 늦가을의 날을 만끽하는 파리지앵들이 모여 있고, 건너엔 멀리 에펠탑의 꼭대기가 비쭉 솟아 있다. 여름을 맞이하려는 봄과 겨울을 맞이하려는 가을의 공기는 다르다. 정국이도 얼른, 이 냄새는 여름이 오는 냄새와 확실히 다른 냄새라며 재차 강조한다. 계절이 변화하는 길목에서 정국이가 내려다 본 파리의 거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잠실 주경기장에서 있었던 첫 콘서트부터 파리 콘서트까지 거쳐왔던 도시의 역사를 읊는 시간. 아무래도 제일 많이 준비하고도 그만큼 보이지 못한 느낌이 드는 잠실 주경기장 첫 콘서트는 여러모로 잊을 수가 없다. <시소(Seesaw)>의 함성을 잊지 못한다는 윤기도, <Love>의 가사를 다들 잘 못 따라 불러 당황했다는 남준이도, 음이탈 실수를 한 정국이에게도 처음의 기억이 강렬하게 남았다. 일산에 무대를 그대로 재현해놓은 세트장에서 무려 한 달 전부터 리허설을 해오며 준비했으면서도 가장 서툴렀던 첫 번째 콘서트. 모든 콘서트가 다 끝난 뒤, 파이널 콘서트가 되어서야 가장 좋은 모습을 보이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이치일 터. 그러나 2018년 8월 25일. <MIC Drop>의 전주가 흐른 잠실주경기장은 붉은 빛을 내는 아미밤으로 장관이었다. 모두의 열정은 처음일 수 없었던 날이었다.


 에피타이저를 비롯한 음식들이 화려하면서도 깔끔한 플레이팅으로 서빙되었다. 부드럽게 썰리는 스테이크도, 음식을 씹어 넘기기 수월하게 마시는 와인도, 파리의 눈부신 햇살도 왜인지 '성공했다'고 느끼게 하는 주요한 지점이었지만, 브래드 바스켓에 듬뿍 담겨 나오는 호떡을 보곤 인당 하나씩 먹을 수 있냐는 석진이나 한국에 돌아가면 포장마차에서 파는 ‘오뎅(이럴 땐 어묵보다 오뎅이 제 말같다)’을 제일 먹고 싶다는 태형이나, 요즘은 오뎅에 간장을 직접 바르는 게 아니라 분무기로 뿌려 먹는 건 줄 아냐며 신나는 정국이나, 그 말에 신기하다며 반응하는 윤기라니. 전용기를 타고 이동하고 유수의 브랜드의 옷을 입고 좋은 곳을 다니는 초대형 슈퍼스타임을 실감하다가도, 자신들만을 위한 프라이빗한 프렌치 퀴진을 앞에 두고 여전히 오뎅 얘기에 제일 흥분할 수 있는 멤버들을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6년차가 넘었음에도 아직도 무대가 아쉬워 눈물을 흘리고, 참치캔과 김, 작은 컵라면만 있으면 신난 식사를 하고, 오랜 비행 시간이 힘들다고 하면서도 금세 이런 것에 징징대지 않겠다며 정정하는 멤버들을 본다. 자신들의 위치를 인지하고 명확하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짚어내는 멤버들을 본다. 대체 평소에 어떤 말을 나누고 어떤 걸 읽고 어떤 생각을 하면 이럴 수 있는 걸까. 감히 나같은 일반 직장인도 내일 더 쉽기 위해 노력하는데. 그렇지 않기 위해, 반대로 가기 위해, 절대 쉽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아이돌이라니.


 잠실 콘서트 2회를 끝내고 떠난 미국투어. 모두 한 방에 모였다. 모니터 두 대를 설치한 뒤 그 전에 열렸던 콘서트 영상을 모니터링하기 위해서였다. 그냥 1곡씩 따로 해도 힘든 <IDOL> ,<Save me>, <Best of me>이 연달아 이어지는 오프닝. 그냥 보기에도 어려운 안무를 완벽하게 해내면서 라이브까지 하는 멤버들이 대단해보이는데 자신들은 부족하다 말한다. 이미 첫 곡에 저렇게 땀에 범벅이 되어있음에도 말이다. 앞으로 남은 콘서트 횟수를 지나치게 의식해 체력을 비축하려는 것 같다고, <IDOL>의 생명은 모든 힘을 쏟아낸 빡센 합이 만들어낸 무대에서 나오는데 그렇지 못했다며, 누구는 빠르고 누구는 느리고, 어디선 짧곤 어디선 길다는 호비의 지적에 모두가 반박하지 않고 동의한다. 


 평소에 멤버들이 주장하는 내용을 다 듣곤, 제일 마지막에 자신의 의견을 내놓는다는 중간자적 멤버인 호비가 제일 앞서 말을 하는 때다. 힘을 쏟아내라고, 동선을 맞추라고 호비가 멤버들에게 퍼포먼스에 대해 디렉션을 내리면 모두가 그의 말에 수긍하고 받아들인다. 팬들이 방탄소년단 콘서트에서 보고 싶어하는 부분이 무엇인지, 자신들이 잘 해내는 부분과 잘 해야하는 부분이 어디인지, 어떤 모습이 가장 무대에서 완벽할 수 있는지를 명확하게 아는 자들의 눈빛이었다.


 콘서트 중간 팬들에게 전하는 영어 멘트 흉내를 똑같이 내며 식탁의 분위기를 돋운다. 정국이는 윤기의 잔망스러운 “Because of you"를, 태형이는 지민이의 "Make some noise”를 똑같이 따라한다. 막내들의 재롱에 건너편에 앉은 형들이 흐뭇하게 웃는 장면은 2017년 호주 윙즈 투어 때 서로 무대를 바꿔 리허설을 진행했던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항상 서로에게 관심을 갖고 집중하는 멤버들의 우정, 그 스킨십의 역사를 생각했다.


 정국이의 부상도 있었고, 오랜 투어 기간에 감기를 달고 살았던 멤버들이었지만 그럼에도 펑크없이 무사히 투어 전 회차를 마쳤다. 다시 와인잔을 높이 들었다. 남준이 건배사의 권한을 정국에게 넘겼다. 쑥스러운지 살짝 웃던 정국이가 입을 열었다. 유럽 첫 콘서트가 있었던 런던에서 부상을 입어 유럽 투어 내내 의자에 앉아있어야 했던, 본인 성에 차지 못한 공연을 한 정국이었다. 묵묵히 최선을 다 해 무대를 하는 형들의 모습을 뒤에서 지켜봤다며, 뿌듯하기도 하고 뭉클하기도 했다는 정국이가 모두 공연 수고 많았다고 말을 마치자 모두가 쨍- 다시 잔을 부딪혔다. 건배사를 하는 정국이를 바라보던 남준이와 석진이의 미소가 글을 쓰고 있는 지금에도 잔상처럼 남아 있다. 무대에 대한 욕심이 너무도 컸던 정국이의 마음과 형들에게 건네는 감사 인사의 무게와 막내 정국이의 성장을 확인한, 그렇게 가장 따뜻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유럽 투어가 있었던 런던, 암스테르담, 베를린, 파리는 모두 일주일 이상씩 시간을 보냈었던 도시라 내 개인적인 애착이 많은 곳이다. 내가 직접 냄새 맡고 걷고 분위기를 읽고 사람들을 만나며 추억을 어지럽게 뿌려놨던 곳이라 그곳의 풍경을 업은 방탄소년단의 모습은 더 많은 마음을 쏟게 하기 충분했다. 호텔 밖에 나와 산책하는 멤버들의 배경이 되어주는 공간이 내가 아는 곳, 내가 걸었던 곳, 내가 좋아했던 곳, 내가 지냈던 곳이라니. 베를린 장벽을 따라 걷고, 베를린 돔 앞의 정원에서 휴식을 취했던 나와 같은 풍경을 보고, 그 곳에서 느꼈을 엇비슷한 감정을 느꼈을 거란 생각만으로도 순간 순간 울컥하기까지 했다.


 전세계 곳곳을 다니며 좋은 것을 볼 수 있다니 이 얼마나 행복하냐며 길게 누운 햇빛을 후광처럼 업은 호비가 얘기한다. 남준이나 태형이가 왜 호텔 밖을 나가 산책을 하게 됐는지, 멤버들의 마음을 또 이렇게 이해한다고 한다. 한국과 달리 해외에서 바깥을 나가려고 하면 경호팀과 매니저와 차량팀이 붙어 쉽게 얘기를 못하겠다는 석진이는 주변 스탭들의 노고를 얘기했다. 목격담이 뜨면 뜨는대로 뜨지 않으면 뜨지 않는대로 그들 나름의 시간을 보내고 있음을 이제는 안다.


 대기실에 마련된 의자에 널찍히 떨어져 앉은 멤버들. 말없이 스마트폰만 쳐다보고 있다. 그들 각자가 팬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그 나라 언어로 번역한 글을 열심히 외우는 중이다. 언어는 서툴러도 마음은 진심이다. 매 콘서트마다 하고 싶은 말을 이렇게 준비했다. 3시간에 가까운 공연을 마치고 나서 멤버들이 찾는 곳은 호텔 헬스장. 공연 중반의 <Fake love>에서 체력적 한계를 느꼈다는 지민이는 런닝머신을 달리고, 근력이 떨어졌다는 윤기는 가슴 운동을 한다. 이러다 금세 몸짱 되겠다며, 캡틴 코리아 되는 거 아니냐는 윤기에 모두가 빵 터졌지만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말 하나도, 체력 하나도 그냥 넘기지 않는다. 그 어떤 것에도 대충인 것이 없다. 


 유럽 투어의 마지막 도시인 파리. 태형이의 컨디션이 좋지 않다. 베를린에서 이미 기침하는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는데, 파리로 넘어오자마자 컨디션 난조가 더욱 심해진 탓이었다. 목소리는 쉰 지 오래. 게다가 고음은 전혀 올라가지 않는다. 어지럽고 죽을 것 같지만 무대에 섰다. 저음 부분의 파트는 그럭저럭 넘어갔으나 보컬곡인 <전하지 못한 진심>의 고음은 완전히 부르지 못 했다. 태형이의 파트는 팬들의 목소리가 메웠다. 태형이 말했다. 혹시 여기 콘서트를 처음 온 분들이 있냐고. 많은 팬들이 손을 들었다. 높이 솟아오른 수많은 손을 훑어본 태형이 말했다. 꼭 약속하겠다고, 더 멋있어져서 내년에 꼭 다시 돌아오겠다고.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어제보다 더, 내일보다 덜 사랑합니다(Je t'aime plus qu'hier mais moins que demain).


 하얀 종이가루가 눈처럼 흩날리는 공연장. 앵콜 끝 곡인 <Love myself>를 부르던 태형이 결국 펑펑 울었다. 온전치 못한 상태로 무대를 한 아쉬움, 미안함, 팬들에 대한 고마움, 벅참. 어떤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다양한 감정들이 교차했던 모양이다. 무대에 내려와서도 쉽게 진정되지 않아 더 한참을 울어야 했다. 이미 DVD 영상을 통해 봤던 장면들이나 역시 면역이 되지 않는다. 내 옆에 앉은 관객은 이미 감색 자켓에 베레모를 눌러 쓰고 스카프를 목에 두른 태형이의 뒷모습이 나오자마자 어깨를 흔들며 울고 있었다. 태형이의 착장임을, 그 착장을 한 파리에서 몸이 좋지 않았고, 그렇게 선 무대에서 펑펑 운 사실을 생각해내지 않으려 해도 자동으로 붙어 나오기 때문이었다.


 다시 장면은 파리 루프탑으로 돌아왔다. 새벽 1시가 에펠탑이 가장 예쁠 시간이라며 같이 보러 갈 것을 약속하는 멤버들. 모든 음식 서빙이 끝나고 이 날의 음식을 책임졌을 셰프가 나와 술 하나를 권한다. 덴마크에서 크리스마스가 되면 여러 자리를 축하할 때 마시는 술이란다. 소주잔처럼 작은 머그잔에 한모금 양의 술을 건네 받았다. 유자향이 나는 독한 술. 콘서트 무대에 들어가기 전 함께 외치는 구호, 방탄방탄방방탄을 외치고 모두 원샷했다. 술이 약해 이미 온 얼굴이 빨갛게 익은 호석이는 그나마의 표정을 잃었고, 찌르르 넘어 온 독주에 태형이는 심장을 부여 잡으며 온갖 인상을 썼다. 정국이와 석진이는 입맛을 다신 술이었다. 약간의 취기와 홀가분함, 오롯한 장소, 그리고 밤. 모두 테라스로 나가 이 밤을 만끽한다. 노래에 맞춰 춤도 추고, 따라 부른다. 수십명의 스탭들에 둘러 쌓여 수만명의 사람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골똘했던 아이돌의 가면은 잠시 내려두었다. 이 밤,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


 <Love yourself> 투어의 연장선인 <Speak yourself> 투어를 위해 떠나는 2019년 4월의 인천공항. 그새 더욱 더 높아진 인기와 영향력을 실감하듯 수많은 취재진들과 팬들로 인산인해다. 익숙한 걸음으로 공항을 걸으며, 자신들을 찍고 있는 카메라를 향해 다시 시작된 투어 잘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건네는 모습으로 <브링 더 소울>이 끝이 났다. <번 더 스테이지>, <브링 더 소울>에 이은 새로운 시리즈를 기대하게 하는 엔딩이었다.


 완벽하지 않은 컨디션으로 무대에 섰을 때, 혹시 이 콘서트가 처음인 관객들이 있을까, 온전치 못한 무대를 처음으로 보게 했다는 미안함에 펑펑 울 수 있는 가수가 내 가수다. 기다리는 사람과 기다리게 하는 사람 차이를 고민할 수 있는 가수가 내 가수다. 힘들땐 언제든지 자신을 이용하라는 가수가 내 가수다. 많이 울까 걱정하며 봤지만 이 찬란한 청춘을 보내고 있는 내 가수에게 작은 도구 하나라도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영화를 보는 내내 진심으로 행복했다. 고마워 내 가수 방탄소년단. 어제보다 더, 내일보다 덜 사랑하는 오늘을 알려줘서.


 영화를 보고 나와 특전으로 제공되는 엽서와 영화 관람 인증 엠블럼을 받을 수 있는 큐알코드 명함을 받아 나왔다. 차 안에 들어와 방탄소년단 노래를 틀었다. 랜덤으로 재생된 첫 곡은 <이 밤>. 내일 같은 시간의 브링 더 소울 회차를 또 예매했다. 


 평소에 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나 팬들을 생각하고 있는 관점들이 예상치 못한 순간에 천재적인 문장으로 발휘하곤 하는 태형이가 우리 사이를 또 보석같이 정의했다.


 어제보다 더, 내일보다 덜 사랑하는 방탄소년단. 정말 보라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29. 왜 나는 방탄소년단이어야 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