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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Sep 03. 2019

32. Happy JK Day

방탄소년단 덕후 일기 32


 '아, 겨울이구나. 진짜 한 해가 얼마 안 남았네.' 하며 감상에 젖게 하는 것들이 있다. 따뜻한 김을 뿜어내는 붕어빵이나 지글지글 굽는 소리까지 맛있는 호떡, 슬그머니 등장하는 크리스마스 장식과 일찌감치 날짜부터 픽스되는 송년회, 그리고 몇몇의 거래처에서 가져오는 내년도 탁상달력이 그렇다. 올해 주요 일정들을 기록하고 있는 탁상달력은 작년 말, 지금은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어떤 작은 광고대행사 대표가 허리를 굽혀가며 직접 건네주고 간 것이었다. 


 탁상달력을 넘기며 '2019년이면 내 나이가 벌써 몇이야' 하는 푸념보다 빠른 건 공휴일을 스캔하는 눈동자였다. 추석이 좀 짧긴 해도 이 정도면 선방이다. 공휴일의 분포가 괜찮네. 전체 달력을 들춰본 뒤 다시 2월로 돌아왔다. 2월, 3월, 6월, 9월, 10월, 12월. 차곡차곡 멤버들의 생일과 데뷔일에 표기를 시작했다. 이른 겨울과 봄, 가을과 늦은 겨울에 고루 분포된 멤버들의 생일을 성심껏 축하하며 지내다 보면 한 해가 지날 것이었다. 눈치껏 가늠해 요령껏 떠나던 내 유일한 도피 '휴가'는 안중에도 없었다. 한 해를 맞이하는 마음가짐이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8일간의 중국 출장이 끝난 뒤 출근한 사무실. 마감과 계획 수립이 함께 몰아닥칠 겨울 전까진 루틴 한 일상 업무와 세 권의 보고서 작성만 진행하면 된다. 물론 보고서 제출 기한까지 일정에 좀 여유가 있다. 그렇다면,


 "이제 중국 막 갔다 왔는데 일이 많아? 쉬엄쉬엄해"


 엑셀 파일을 켠 채 심각한 표정으로 표를 작성하고 있는 나를 지나치며 부장님이 한마디 쓱 건네셨다. 'Happy JK Day'라는 제목이 안 보이에 스크롤을 슬쩍 내려놓고 있었던 터였다. 이럴 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것이 상책. "그러게요. 미리 정리 좀 해두려구요." 적정히 답을 하곤 모니터에 집중했다. 단축키를 빠르게 누르며 검색창과 엑셀을 부지런히 넘나 들어 작성하는 자료는 9월 1일, 정국이의 23번째 생일을 알차게 보내려는 나만의 일정이었다. 


 구글과 네이버 지도, 트위터를 켰다. 정국이의 생일을 축하하고 기념할 수 있는 정보들을 수집했다. 컵홀더 이벤트 카페(음료를 주문하면 정국이의 이미지와 생일 축하 문구가 담긴 특별 컵홀더를 끼워주며, 보통 포토카드가 함께 증정된다)만 해도 수십 곳에 생일 축하 전광판이 게시된 곳도 여러 곳이고, 정국이의 활동 모습을 담은 사진 전시도 몇 개의 갤러리에서 진행될 예정이란다. 지하철 3호선 중 일부 차량은 정국이 사진으로 래핑이 되고, 한강 세빛섬은 정국 섬으로 꾸며져 실내 및 옥외 전시로 채워지고, 몇몇 팬들은 자비로 커피 트럭을 준비하거나 무료 나눔 등을 진행한다고 한다. 서울만 해도 이 정도였다. 정국이의 고향인 부산에선 다대포 분수쇼를 비롯한 각종 행사가 곳곳에서 열릴 예정이고, 세계 주요 도시에서도 팬 이벤트가 기획되고 있었다. 


 그동안 여러 나라, 여러 도시를 여행하며 익힌 취사선택 과정의 짬바가 빛을 발할 때다. 지도에 장소를 검색하곤 거리를 쟀다. 최대의 효율은 최소의 동선이 필수였다. 남준이가 다녀갔던 전시 중 <야수파 걸작전>은 전시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아 이번에 다녀와야 했다. 컵홀더 이미지와 선물 구성이 좋은 카페를 추리고, 전시장의 위치에 따라 방문 순서를 배치했다. 모든 곳을 수월하게 다닐 수 있는 중간 위치의 숙소도 골랐다. 기회비용을 따져 가며 정리하고 나니 만족스러운 스케줄이 나왔다. 이젠 정국이 생일까지 디데이를 쇠며 마음을 고조시키는 것만 남았다. 


 8월 31일 토요일. 아침 8시 39분의 SRT에 몸을 싣기 위해 부지런을 떨었다. 에코백에 가득 이틀간의 짐을 챙겼다. 출근하는 주중보다 더 일찍 일어나고 더 일찍 집을 나섰다. 미세 먼지 없이 푸른 하늘이 껑충 높아 있다. 토요일 이른 시간의 맑은 하늘의 색감과 높이를 가늠해본 적이 요 근래 있었던가. 역에 금세 다다랐다. 아침 해의 알싸한 빛을 그대로 받고 있는 역에는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 덕에 마땅히 앉을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그들을 이동하게 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내 모든 추진 동력은 방탄소년단으로부턴데. 


 두 시간 동안 푹 잔 뒤 수서역에 내렸다.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탄 뒤 점심을 먹기 위해 이동하는데 오른편으로 사람들이 줄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정국이 전시가 열리는 곳이었다. 입장이 12시부터라 그전에 먼저 점심을 먹고 천천히 이동해와 입장하려고 했는데. 벌써부터 줄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조금만 늦게 오면 입장에만 한참을 기다려야 할 듯했다. 점심을 먹으러 가는 마음이 벌써부터 바빠졌다. 전시장을 지나쳐 두 정거장 다음에 내렸다. 이른 점심을 먹기 위해 찾은 곳은 67soho. 그전부터 궁금했던 곳이었는데 마침 전시장과 멀지 않아 바로 찾아왔다. 11시 20분도 되지 않았던 터라 너무 이른 건 아닌가 하며 전단지가 흩뿌려있는 신사동 골목길을 걸어 가게에 다다랐는데 하얀 천 안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실루엣이 꽤 여럿이다. 유명한 곳은 역시 다르구나. 


 어느 노부부는 식사를 벌써 마쳤고, 아이를 데리고 온 젊은 부부는 식사가 한창이었다. 커피와 프렌치토스트를 받아 든 친구 무리는 각도를 바꿔가며 까르르 사진을 찍고 있었다. 창가에 길게 놓인 나무 테이블이며 곳곳에 놓인 카페 드 플로르 잔이며 와인병, 소품들 덕에 순식간에 파리로 이동한 느낌이었다. 크레페와 어니언 수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곤 창가에 앉았다. 파리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는지 평범하게 돌아다니는 지민이의 목격담이 파리에서 들려오는 요 며칠이라 만약 이런 파리의 카페에서 지민이를 만나게 되면 어떨까 하는 괜한 상상을 하며 있었더니 주문한 음식이 금방 나왔다. 이런 개인 카페에서 음식이 제때 빨리 나오면 그 가게에 대한 호감도가 상승한다. 군더더기 없고 핑계가 없는 듯해서. 꼭 한 번씩 찾곤 하는 어니언 수프는 따뜻한 하루를 보내게 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주게 하기 충분했고, 크레페 역시 달걀노른자를 터트려 부드럽게 적셔 먹을 때까지 맛있었다. 그러나 더 깊게 감상할 시간이 없었다. 이미 오는 길에 전시장의 대기줄을 봐 버렸던 터. 여운을 즐길 새 없이 바로 빠져나왔다. 


 지하에서는 정국이의 사진 전시가, 1층에서는 컵홀더 증정 이벤트를 진행하는 카페가 동시에 운영되는 곳이었다. 사전에 미리 예약을 해두었기에 입구에서 이름을 확인받고 입장했다. 줄이 길어 서둘러 온 것에 비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은 입장이었다. 선물이 걸린 미션들도, 생일상처럼 꾸며놓은 포토존도, 그동안 정국이가 했던 예쁜 말들을 모아놓은 한쪽의 벽도 흥미롭게 지나친 뒤 전시장으로 입장했다. 무대 위에서 가장 행복해하는 정국이 답게 콘서트장과 시상식 공연 등의 사진 속에서 누구보다 빛난 얼굴이었다. 어쩜 이런 눈빛을 내지. 투명한 안광과 정면으로 마주할 때마다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우리 정국이 진짜 멋있고 잘생겼구나. 사진 앞에서 하- 한숨을 내쉬는 몇몇 팬들의 소리에 나도 모르게 슬쩍 웃었던 건 그 한숨에 완벽히 공감해서였다. 특히 이 전시장엔 정국이의 '누나' 팬들이 많았는데, 초등학생 아이를 데리고 온 엄마부터 나이 든 어머님들까지 마냥 예쁜 '우리 정국이'를 담는 눈빛들은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따뜻했다. 


 전시장에서 만나면 인사를 나누자는 메시지를 주고받았던 인스타그램 친구분(이 표현에 대해 무척이나 고민했다. 이런 '표면적'인 단어 안에 너무 많은 의미가 있어서. 그러나 마땅한 단어를 찾지 못해 이렇게 쓴다.)과 때마침 시간이 맞아 직접 만나 인사를 나누고 함께 전시를 보며 정국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아이디를 오랫동안 사용하고 있어서 그 안에서 만난 다양한 '인친'님들은 실제 친구들보다 서로의 취향과 일상 등을 더 잘 공유할 정도로 내적 친분을 쌓고 있었는데, 이렇게 직접 만나는 일만큼 설레는 일이 없다. 서로를 이미 잘 알고 있기에 어색한 소개를 건너뛰고 바로 편안하게 말을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기 때문이다. 


 혼자 봤으면 한번 쓱 보고 전시장을 나섰을지도 모른다. 대화를 나누고 분위기를 공유할 수 있는 대상이 있었기에 완전히 다른 관람이 될 수 있었다. 혼자 너무 빡빡한 스케줄을 준비한 터라 먼저 전시장을 나서게 됐는데, 미리 준비해왔다며 와인 한 병과 쿠키 등이 담긴 봉투를 선물로 주셨다. 화이트 와인을 주로 마시는 취향까지 고려해 고르신 와인이었다. 내 빈 손이 머쓱해 어쩔 줄을 몰랐다. 영화관에서 일하는 어느 인친님은 <브링 더 소울>의 엽서가 많이 남았다며 몇 개를 챙겨 우편으로 보내주기도 했고, 이번 <Speak yourself> 일본 콘서트를 다녀왔다며 롤 스티커와 럭키드로우를 나눠주신 인친님도 있었다. 덕질 덕에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만난다. 방탄소년단이 좋아서 좋은 사람들을 모으게 하는 것일까. 


 짐을 두기 위해 호텔에 체크인했다. 창가에 침대가 디귿자 형태로 놓인, 좁지만 포근한 방이었다. 전시 도록이며 구입한 물건들, 집에서부터 이고 지고 온 짐들, 선물 받은 와인과 쿠키까지 빠르게 정리해둔 뒤 바로 나왔다. 호텔 바로 앞 정류장엔 정세운의 데뷔 2주년을 축하하는 광고가 걸려 있었고 그 앞에서 두 명의 팬이 서로 번갈아가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알고 보니 호텔 바로 옆이 정세운이 속해있는 기획사가 있는 건물이었다. 소속사 앞 정류장을 꼽아 광고를 걸었을 그 마음과 이 광고를 찾아온 팬들의 마음을 그냥 다 알 것 같아서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조건 없는 사랑이 바탕인 모든 덕후는 진실로 위대하다. 


 작은 카페들의 수가 많은 만큼 컵홀더 이벤트가 가장 많이 진행되는 곳이 바로 홍대, 합정, 상수 일대다. 방탄소년단 덕분에 알게 된 지인이 직접 참여하고 있는 카페 어스에 제일 먼저 들렀다. 카운터 옆 대형 TV 모니터에선 방탄소년단의 공연 모습을 데뷔 때부터 순차적으로 틀어놓고 있었고 마침 팬들이 레전드로 꼽는 무대 중 하나인 <말하자면>의 커버 무대가 나오고 있었다.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JK 쿠키를 가운데에 두고 지인과 대화를 나눈 뒤 정국이 사진으로 꽉 채운 포토존에서 사진도 찍었다. 컵홀더와 포토카드 외에도 슬로건, 포스터 등을 증정한다는 카페가 근처에 있어 찾았더니 이미 솔드 아웃됐다는 안내 문구가 붙어 있었다. 거리엔 컵홀더를 쌓아 담은 와인 봉투나 플라스틱 통을 들고 지나다니는 팬들이 많았다. 부지런한 새가 먹이를 먹는다는 말은 덕질에 있어 가장 와 닿는 명언이다.


 석 달 전, 연희동의 '밤의 서점'에서 정국이 혼자 촬영을 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서점과 정국은 대체 어떤 조합일까 내내 궁금했었는데, 나중에 공개된 영상을 보니 아마 5기 머스터 매직샵과 관련된 촬영이었었나 보다. 동네에 있는 작은 서점, 그것도 대부분 밤에만 여는 서점에서 촬영을 하는 동안 정국이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을까 궁금했다. 구글 지도는 갓 튀긴 치킨 냄새가 식욕을 돌게 하는 연트럴 파크로 인도했다. 미리 검색해봤을 때 이런 곳이 아니었는데. 갸우뚱하며 골목을 걷다 그제야 주소가 잘못되었음을 확인했다. 그럼 그렇지. 날 좋은 토요일 저녁을 즐기려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를 반대로 거슬러 빠져나왔다. 


 밤의 서점은 얕은 오르막의 한 골목 사이에 입간판 하나를 내놓고 멀뚱히 자리 잡고 있었다. 어둠이 내리기 직전의 시간. 서점 내 노란 조명이 밤의 서점임을 인증하듯 은은하게 골목에 퍼져 나오고 있었다. 띠링- 문을 열고 입장했다. 매직샵에 들어서는 정국이 된 것 같았다. 규모가 크지 않은 곳이었지만 주인이 얼마나 세심하게 책을 고르고 놓았을지가 단박에 느껴지는 곳이었다. 책을 포장지로 싸선 책 소개 글만 보고 책을 고르게 하거나 작가의 생일만 적어두곤 아무런 정보가 없는 블라인드 책들이 있었고, 설명을 세심하게 적어놓은 책들이 곳곳에 있었다. 짙은 남색의 어두운 벽과 브라운 책장, 곳곳에 떨어지는 핀 조명, 발소리가 들릴 정도의 작은 음악. 서가를 오다니며 구경을 하다가 9월 1일, 정국이와 같은 생일을 지닌 작가의 책을 비롯해 네 권의 책을 골라 들었다. 첫 방문이기에 도서 대출 카드 형식의 회원 카드를 작성했는데, 앞장은 간단히 자신의 정보를 적게 돼 있었고 뒷장은 구매해가는 책의 목록을 적게끔 돼 있었다. 영화 <러브레터>와 비슷하게 이름이 같은 다른 사람의 도서 구입 목록이 내게 적힐 일도 있을까. 기분 좋게 계산을 마쳤다. 정국이 덕에 좋은 곳 하나를 선물 받았다. 


 연희동에 꽤 괜찮은 내추럴 와인샵이 몇 군데 있다고 해서 들러보려다 고집스럽게 산 책으로 어깨가 무겁고 원경에 내리는 노을이 빨갛게 짙어 이 풍경을 보며 호텔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는 게 나을 듯싶었다. 다행히 바로 앞에서 타는 버스가 호텔까지 환승을 최소화해서 갈 수 있다.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호텔 룸서비스로 간단한 저녁을 주문했다. 아침부터 서둘러 이렇게 어깨 무겁게 이동하며 걸었던 적이 언제였던가. 피로함에 포만감이 얹어지니 눈꺼풀이 자연스레 감겼다. 멤버들이 올린 정국이 생일 축하 트윗과 정국이의 감사 인사는 목이 말라 자다 깬 새벽에 확인했다. 정국아 생일 축하해.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다시 푹신한 침구로 파고들었다. 9월 1일. 23번째 생일을 맞이한 '해피 정국 데이'다.


 모처럼 개운한 아침이었다. 때꾼하지 않고, 숙취로 속 쓰려하지 않은. 비몽사몽 봤던 멤버들의 트윗과 정국이의 글을 다시 읽곤 오늘의 일정을 정리했다. 아침 일찍 체크아웃을 하고 용산역에 들러 짐을 보관했다. 마음이 급했더니 너무 서둘렀나 보다. <야수파 걸작전> 시작까지 시간이 많아 종각역에서 내려 세종문화회관까지 걸었다. 나뭇잎 사이로 스민 볕과 공기가 걸음을 부추긴다. 정국이 생일이라 날이 더 좋은가. 걷기에 이만한 날이 없다. 커피 한 잔을 한 뒤 10분 정도 여유를 두고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 도착했다. 전시 초입 포토월 바닥에 RM 표기가 돼 있었다. 이 포토월에서 찍은 사진을 남준이가 트윗에 올린 뒤 많은 팬들이 방문했나 보다. 포토월로 쓰인 야수파의 상징 <빅벤> 그림보다 RM 두 글자를 카메라에 더 많이 담았다. 


 오디오 가이드를 1번으로 빌려 입장했으나 벽에 빼곡히 적힌 전시 설명을 읽고 오디오 가이드를 들으며 천천히 이동했더니 어느새 수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인 형국이 되었다. 게다가 11시에 시작된 도슨트 설명으로 사람들로 꽉 막혀 이동에 제한이 생겼다. 남준이도 도슨트 설명을 들으며 전시를 관람했었는데. 그 분위기만 가늠하곤 뒤로 빠졌다. 처음부터 다시 천천히 이동을 시작했다.


 모네, 고흐, 마티스, 피카소. 그림을 잘 몰라도 익히 들어봤을 화가들의 이름이다. 이들은 미술사의 큰 사조가 된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야수파, 입체파를 각각 상징하는 화가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상주의나 야수파는 그 처음이 조롱으로 시작된 단어였다. 그래서 전시의 부제가 '혁명, 그 위대한 고통'이다. 기존의 것들을 뒤틀고 새로운 형식을 차용하고 완전히 다른 것을 내놓는 데엔 고통이 수반되니 말이다. 야수파의 대표적인 화가 마티스와 드랭, 블라맹크뿐 아니라 모리스 마리노, 라울 뒤피, 키스 반 동겐 등 색채를 파괴한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을 감상하다 벽에 적힌 설명글이 눈에 띄었다. 


 처음엔 모진 비난을 받으며 한 맺힌 시대를 살아와도 자신의 혁명적인 생각과 뜻을 굽히지 않고 오히려 주위로부터의 미움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내면적 힘을 키워가며 시련과 고통을 달래 왔다. 그 결과 그들의 미술은 시대를 가르는 분수령이 됨과 동시에 다음 시대를 여는 통로가 되어 세계 문명에 위대한 기여를 하게 된 것이다.


 작은 기획사의 힙합 아이돌로 데뷔했던 방탄소년단을 향한 눈매가 얼마나 매서웠던가. 조롱받고 견제받은 아픔은 또 어땠던가. 그러나 그들의 생각과 뜻을 굽히지 않은 채 묵묵히 길을 걸었고 걷다 보니 자연스레 그 길에 합류하는 많은 사람들이 생겼다. 이제는 남준이의 방문 자체가 마케팅 수단으로 쓰이는 때. 이 글귀를 읽었을 남준이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게 문득 궁금해졌다. 


 아트샵에 들러 파스텔 톤으로 따뜻한 분위기를 내는 모리스 마리노의 <노에 성당, 4월의 어느 오후> 작품을 구입했다. 전시의 가장 대표작보단 내가 가장 인상적으로 받아들인 작품을 고르는 것이 이 전시를 더욱 오래 기억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남준이도 전시를 본 뒤 아트샵에서 상품 몇 가지를 구매했다고 한다. 이 다양한 작품 속 남준이가 가장 인상적으로 받아들인 작품은 무엇이었을까.


 강남역에서 조금 걸어 나오면 있는 갤러리로 정국이의 전시를 보러 왔다. 무료 전시로 입장 시간에 맞춰 누구나 들어와 정국이를 감상할 수 있는 곳이었다. 어제의 전시보다 세 배 정도의 규모라 입이 떡 벌어졌다. 한 켠에선 정국이의 영상을 감상할 수 있는 존도 마련돼 있었다. 데뷔 초창기, 아직 채 자라지 않은 어린 정국이의 사진들이 많아 그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단발에 가깝게 기른 땀에 젖은 머리를 넘기며 각진 턱을 치켜세워 나른한 눈을 뜬 매직샵의 정국이 사진을 지나쳐 온 터라 순진한 눈망울로 해맑게 웃는 정국이의 얼굴에 일순 죄책감과 미안함이 스쳤다. 우리 정국이 정말 잘 자랐다. 


 정국이가 지난 부산 매직샵이 끝난 직후 호텔 방에서 브이앱 라이브 방송을 했었다. 이 방송이 두고두고 회자되는 이유는 오랜만에 진행한 한국, 그것도 고향에서의 공연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들뜸을 숨기지 못하고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정국이가 무척 사랑스러웠다는 점 외에 무려 '음주 라방(라이브 방송)'이었기 때문이다. 쪼르륵 와인을 따라 마시며 쫑알쫑알 말이 많아지는 정국이의 모습은 정국이가 마신 와인 '우마니 론끼 비고르'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와인 생산지인 이탈리아 상공회의소에서 이탈리아에 정국이를 초대하겠다는 트윗을 올릴 정도의 전국적인 품귀 현상을 만들어냈다. 정국이 생일에 와인 한 잔은 해야 했고, 그렇다면 정국이 마셨던 와인이라면 더 좋을 것 같아 와인을 사서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컵홀더 이벤트를 하는 카페에서 음료를 한 잔 사 마시곤 가까운 와인 가게부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신이 나서 도착했더니 휴무일이다. 그다음 가까운 와인 가게까지 이동했더니 이번에도 문이 닫아 있다. 그나마 가까운 백화점으로 갔더니 내가 찾는 정국이 와인은 없었다. 열차 시간이 있어 여기서 더 와인 가게를 다녀볼 시간이 없을 것 같아 그나마 비슷한 다른 이탈리아산 와인을 포함해 네 병의 와인을 구입했다. 추석을 앞두고 좋은 가격들의 와인이 많아 용산역에 보관되어 있는 짐들의 존재를 깜빡한 것이었다. 잠깐의 무거움은 정국이 생일 앞에 별 거 아닐 수 있으니까. 들고 가 보지 뭐. 


 이고 진 짐들과 함께 열차에 탔다. 떠나려고 하니 날이 흐렸다. 오랜만에 주말 이틀을 바쁘게 보냈다. 꼭 여행지에서 그랬던 것처럼. 서울은 이렇게 목적이 있어야 오게 되는 곳이 되었고, 요 몇 년 사이 모든 목적은 방탄소년단이 선사해주고 있었다. 이런 이유도 없었으면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집 밖을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있었을 주말이었다. 나는 그렇게 버려졌을 시간을 주워냈다. 정국이 생일을 기념하며 보내겠다는 그 목적 하나로.


 태형이가 올린 드라이기 근육맨 정국이 사진을 내려오는 기차 안에서 확인했다. 하루가 마무리되는 느낌이었다. 택시를 타고 집까지 홀가분하게 달려와 짐을 정리했다. 엄청 많은 듯했으나 정리하고 보니 별 거 없다. 좀 더 사 와도 됐을 법했다. 이틀 동안의 이야기를 어딘가에는 털어놓고 싶어 인스타그램 라이브 방송을 켜선 사 온 물건들이며 전시 후기를 몇몇의 사람들과 나누었다. 안주 없이 와인을 홀짝댔더니 취기가 슬쩍 올라와 말이 빨라졌다. 와인을 마시며 브이앱 방송을 했던 정국이와 함께 있는 듯해서 몰래 행복해했다. 


 정국이는 오늘 어떤 하루를 보냈을까. 많은 사람들에게 축하받고 맛있는 거 먹고 즐거웠던 하루였을까. 전 세계 수많은 팬들이 정국이의 생일을 축하하고 기념하는 날들을 보냈던 만큼 정국이가 가장 행복한 생일을 보냈으면 좋겠다. 정국이 덕에 한 해 통틀어 이런 날이 며칠이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꽉 찬 이틀을 보내는 나도 있었으니까.


 누구보다 밝게 빛나는 스물셋의 정국이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해. 

 우리의 정국이가 되어줘서 정말 고마워.


 Happy JK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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