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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Oct 04. 2019

34. 넌 나의 구원

방탄소년단 덕후 일기 34



 1. 김석진 가라사대



 우리 국(局)엔 총 13명의 직원이 속해 있다(정년을 앞두고 안식월에 들어가거나 일신상의 이유로 회사에 출근하지 못하는 두 명의 노(老) 선배가 포함된 숫자다). 13명 중 여성은 4명이고, 나는 이 중 유일한 정규직 여성 직원이다. 내가 입사한 지 햇수로 7년이 된 올해, 우리 국에 드디어 신입사원이 채용됐다. 


 "그래도 이왕이면 남자애가 낫지" 


 최종 면접자를 가르는 실무 PT 발표 후,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발표가 인상적이었던 여성 지원자에게 높은 점수를 주던 내게 모 국장이 대놓고 하던 말이 스쳤다. 모 국장은 최종 선발 심사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위치에 있었다. 7년 만에 뽑은 신입사원은 인상적인 PT 발표나 화려한 경력이나 인상적인 언변을 지닌 자가 아닌, '조직에 잘 녹아들 것 같은 싹싹한 인상의 남성'으로 결정됐다.


 3개월의 수습 기간 때부터 후배는 남성적인 회사 물에 설탕처럼 잘 녹아들었다. '아빠'를 자청하는 선배가 생겼고, 퇴근 후 배드민턴을 함께 하는 동료가 생겼으며, 거의 매일 저녁 회사 사람들과 술자리를 가졌다. 출근 후면 '아빠' 선배와 담배를 피우고 들어왔고, 숙취에 시달려 죽겠다면서도 항상 묘한 승리감을 띤 얼굴을 했다. 후배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업무 연관성이 높은 식사 자리에 음주가 동반되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그 날따라 부서장이 과음을 하고 돌아왔나 보다. 속이 허해 도저히 안 되겠다며 사무실에서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받더랜다. 그러자 후배가 구내 식당으로 달려가 김치를 챙겨 부서장에게 대령했다던 얘기도, 그 모습에 부서장이 '하는 짓이 귀엽다'라고 했다던 것도, 환기가 잘 되지 않는 사무실에서 후루룩후루룩 컵라면을 먹는 소리가 울렸다던 것도, 후배가 뿌듯한 표정을 했다는 것도,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진 그 시간이 고작 오후 세시 경이었다는 것도 카카오톡 메시지를 통해 내게 쉴 새 없이 전해졌다. 휴가를 내고 콘서트를 보기 위해 날아온 시카고 Speak yourself 팝업스토어에서 MD 상품을 더 살까 말까 하는 것만이 모든 고민이었던 당시의 내겐 '요즘에도 이런 구시대적인 이야기가 다 있구먼' 하는 정도의 감상만을 남겼을 뿐이었다. 그게 얼마나 큰 파장을 몰고 올 것인지는 상상도 못 한 채. 


 ***

 

  20일 설명회 작년처럼 사회 가능?  오전 9:39


 또다. 같은 부서에서 같은 회의를 하면서 나만 몰랐던 일정이 또 나왔다. 설명회도, 20일이란 날짜도, 전달받은 것이 하나도 없는데 의사를 묻는 척 사실상 통보인 부서장의 카카오톡 메시지가 떡하니 내게 도착했다. 이건 도대체 어느 흡연 구역에서 어느 술자리에서 나와 어느새 확정된 일정인 것일까. 


  PPT 발표 말씀이실까요    오전 9:50

  PPT도 그렇고 진행도?    오전 9:51


 사장님을 비롯한 회사 간부와 권역 시군 지자체 홍보팀들이 참석하는 회사 주요 정책 및 사업 설명회의 진행과 PT 발표 업무가 설명회까지 고작 나흘을 앞둔, 16일인 오늘 오전, 카카오톡 메시지 한 줄로 지시됐다. 파워포인트 자료부터 만들어야 하나 싶어 난감한데 그건 걱정하지 말란다. 후배에게 이미 업무 지시가 내려져 자료를 만들고 있노라고. 후배는 미리 알고 있었던 설명회 날짜는 그러니까 대체 언제 어떤 흡연 구역에서 어느 술자리에서 확정되었던 것일까.


 작년에 내가 만들었던 자료를 바탕으로 몇 가지의 수정을 한 후배의 자료가 그 날 오후 국장께 전달됐고, 한 시간 뒤 나는 국장실 테이블에 앉아 그 자료를 그대로 받아 내 자리로 돌아왔다. 내용을 좀 더 임팩트 있게 조절하고 수정을 하는 일은 다시 내 몫이 되었다. 몇 번의 자료를 다이렉트로 국장과 함께 수정했고, 최종 컨펌받은 자료에 맞춰 원고 작성을 시작했다. 파워포인트 자료에 필요하다며 영상 자료를 받으러 다니고 내내 끌어안고 있던 후배의 일주일이 문득 궁금했다. 


 급작스럽게 설명회 진행을 맡았다고 해서 다른 업무가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회사에선 기존의 업무를 하고, 퇴근 후 집에 돌아와 발표 준비를 했다. 내 말투에 맞춰 원고를 다시 수정하고, 지루하지 않게 강약을 조절하고, 중간중간 적절한 비유를 섞어보고, 시간을 맞춰 가며 몇 번이고 반복했다. 시작이 어떻게 됐든 설명회를 끌어갈 역할을 맡겠다고 수락한 건 나였고, 이왕 할 거면 역시 잘해야 했기 때문이다. 녹은 아이스크림이 들러붙은 듯한 찝찝함은 반복 암기에 잊혔다. 이런 일들은 대동소이하게 늘 있어 왔다.


 설명회 디데이 아침이 밝았다. 단정하면서도 프로페셔널해 보이기 위해 흰 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미들굽의 힐을 신었다. 설명회 장소는 회의실을 갖춘 근교의 한옥이었다. 선배들이 들고 나는 짐 몇 가지를 나누어 들고 회사 봉고차에 몸을 실었다. 덜컹거리는 봉고차 가장 뒷 좌석에서 선배와 후배가 나누는 잡담을 차단하는 이어폰에 의지해 원고를 외우고 또 외웠다.


 흐린 채 맑은 하늘 덕에 한옥은 운치 있었다. 참석 인원 명단에 맞춰 자리를 배정하고 다과와 음료 세팅을 마치고 나니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약간의 시간이 돼 양해를 구하고 나왔다. 빼곡한 대나무와 푸른 잔디, 멋을 간직한 한옥의 처마며 얕은 시냇물, 거의 180도로 젖혀 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낮은 벤치, 중절모를 쓴 신사의 철사 조형물 등이 걷는 재미를 선사했다. 올해 초였던가, 이 주변을 여행한 뒤 남준이가 트위터에 사진을 올려준 적이 있었는데. 혹시 여기도 둘러보았을까. 남준이 생각을 하며 산책하다 보니 저 멀리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건너왔다. 참석자들이 하나 둘 도착하는 모양이다. 남준이를 잠깐이라도 떠올릴 수 있는 푸르름이었다. 그 잠깐의 짬으로 충분했다.


 자리에 참석한 인원을 체크한 뒤 소개 멘트를 점검했다. 정면의 사장님을 비롯해 양쪽으로 국장과 부서장이 앉았고, 디귿자 모양으로 배치한 자리엔 가나다순의 외부 참석자들이 착석했다. 톡톡. 마이크 음량을 체크한 뒤 메인 자리에 섰다. 화면이 잘 보이게 조명이 꺼졌다. 안녕하십니까- 나흘간 준비한 설명회가 시작되었다.


 박수소리와 함께 1시간 20분 여의 시간이 끝났다. 약간의 긴장을 떨치지 못해 경직됐던 초반의 페이스가 아쉬웠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운 진행이었다. 몇몇 분들이 찾아와 설명을 잘 들었다며 인사를 건네줘 기분 좋게 명함을 교환했다. 몇몇 선배들은 식사 자리로의 인솔을 위해 자리를 먼저 떴고, 남은 몇몇은 회의실을 정리했다. 자료 작성의 업무까지 내게 넘어온 터라 선배를 따라 마트에 가 다과를 사 오고 이름표를 만들고 타이틀을 넣은 현수막을 발주하는 역할을 했던 후배는 큰 일을 직접 치렀다는 상기 가득한 얼굴을 했다.


 식사 장소에 뒤늦게 도착했더니 이미 왁자지껄한 채였다. 떡갈비 냄새를 맡자 입맛이 돌아 비어있는 끝에 자리를 잡았다. 주변에 함께 앉게 된 참석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식사를 시작했다. 오늘 설명회에서 나온 내용에 대한 질문에 답하며 몇 잔의 소주를 함께 마셨다. 가운데 테이블에선 벌써 많이 마셨는지 커다란 웃음소리와 박수가 오갔다. 별도의 공간에서 주요 인사들과 식사를 따로 하고 있는 사장님의 공식적 휘하 아래 음주가 허락된 자리다 보니 다들 일찌감치 오버페이스 중인가 보다, 하며 젓가락을 놀리는데 웃음소리가 나는 테이블 쪽에 앉아 있던 후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이 설명회 우리 막내가 다 준비한 거라면서요? 자 다 같이 박수!"


 누군가의 칭찬에 이어 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크게 났다. 언제 그렇게 마셨는지 얼굴이 벌게진 후배는 멋쩍은, 그러나 부끄러운 미소를 띤 채 그대로 원샷했다. 다 같이 잔을 비웠고, 그 이후 다시 박수가 이어졌다.


 핸드폰을 손에 쥐고 화장실로 향했다. 칸에 들어가 앉았다. 눈시울이 자꾸 차올라 눈에 최대한 힘을 주고 떴다. 괜찮다, 괜찮다며 지내왔던 인내가 몇 잔의 소주에 알량한 생색으로 전환돼 욕지기처럼 차올랐다. 후배를 데리고 다니며 직접 현장 준비를 해 온 선배도, 이 공간을 섭외하고 참석자들을 모은 업무를 담당한 선배도 박수를 받는 후배를 고생했다는 다정한 눈으로 바라만 보고 있지 않았던가. 그냥 일일 뿐인데, 잘 끝났으면 됐지, 뭘 바란 거야 하면서도 이렇게 해 봐야 내 몫이 아닐 것에 뭐에 그리 걱정하며 준비했을까 하는 마음이 끝없이 순환됐다. 


 석진이가 그랬는데. 모든 수고는 저 자신만 알면 된다고. 지금까지 해 온 수고도, 앞으로 할 수고도 내가 아는 걸로 다 된 거라고. 


 그래. 잘 끝났으면 됐다. 무엇보다 내 수고는 내가 아니까. 사진첩에 저장해둔 방탄소년단 사진을 넘겨보며, 커피를 못 마시는 태형이에게 그거 마시면 천 원 준다는 석진이의 장난과 그 말에 솔깃해하는 태형이의 영상을 보며, 본 보야지 촬영으로 뉴질랜드의 겨울 풍경을 건네 오는 최근의 윤기 트윗 사진을 다시 보며, 지친 호석이 앞에 알제이 인형을 놓아주는 석진이를 봤다. 거짓말처럼 눈물이 쏙 들어갔다. 


 툭툭 털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 잠깐 새에 자리가 한 번 정리됐는지 인원이 조금 줄었다. 테이블을 좀 정리하고 가운데에 모여 앉자는 누군가의 제안에 짐을 챙겨 자리를 옮겼다. 지금 들어가기엔 시간이 애매하다고 판단됐는지 아예 본격적인 자세들을 취한다. 이 상황에 설명회의 흥망 여부를 이 자리까지 끌고 온 사람은 나밖에 없을 테다. 설명회는 설명회가 진행됐던 그 시간으로 마무리된 거다. 새 잔에 소주를 따랐다. 한층 높아진 누군가의 선창에 맞춰 잔을 부딪혔다. 내 수고는 내가 안다. 오늘 고생했다. 


 ***


 점심 약속 잡지 마소~ 내가 오늘 살려고 그랬는데...

 사장님께서 사주신다네.. 메뉴도 자네가 정하소         오전 10:34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뒤풀이 덕에 고스란히 잠에 헌정한 주말을 보낸 뒤 맞이한 월요일. 간부회의 때 사업설명회의 성료에 대해 말이 나왔다더니, 점심 식사를 사장님께서 사신다며 메뉴를 정하라는 국장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메뉴 결정은 뒤에서 고생한 선배께 물어본 뒤 식당을 골랐다. 부서 전체가 와인 한 잔을 곁들인 이탈리안 요리를 먹으며 서로의 노고를 치하했다. 모두 각자 자신의 일들을 잘 치른 덕이었다. 내 수고는 이미 스스로 알았다. 마음속에 콕, 구원처럼 자리한 석진이의 말 한마디에 다 괜찮을 수 있었던 일이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P.S

 

 며칠 전, '아빠' 선배와 점심부터 술을 마셨는지 후배가 인사불성이 된 채 사무실에 들어왔다. 눈은 다 풀려 있었고, 괜찮은 척 내뱉은 말은 알코올로 마비되어 있었다. 아직도 술에 관대한 남성적 회사 분위기 덕에 후배의 상태는 '자신의 주량을 넘어가면서까지 선배와 함께 하느라 고생한' 귀여움으로 둔갑되어있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술내음이 고스란히 내 자리로 전해 왔다. 불편함을 어필해도 그 자체가 왜 불편함의 범주에 들어가는지 조차 문제의식이 없는 조직에선 그저 작은 에피소드인 것이다. 


 수습 기간이 끝나 정식 사원이 된 지 약 3개월이 되어가는 후배는 아직도 본인만의 업무를 배정받지 못했다. 


 버티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지만 존버가 능사인 것이 회사 일이고 티켓팅이라고 이 곳에도 쓰지 않았던가. 적어도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이 조직에 있어야 여기서 더 나빠지는 것을 막을 것이다. 후배가 지금 얻고 있는 호의의 유통기한이 언제까지 갈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저 내 일을 해 나갈 것이다. 내 수고는 내가 알면 된다. 알다 보면 내 직급이 오르고 내 목소리도 커지고 내 역할을 할 시기가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체질을 개선하고 분위기를 바꾸는 데에 일조할 내게 스스로 수고했다며 잔뜩 칭찬해줘야지. 그때 후배가 같이 일을 하고 있을까? 글쎄. 지금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기를 바라는 수밖에. 그땐 '남자가 낫다'던 국장과 '아빠' 선배도 없고, 멋모르는 막내도 아니고, 나 같은 선배가 눈 딱 뜨고 지켜보고 있을 텐데. 


 일부러 생각하려 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스며든, 억지로 갖다 붙여 만들지 않아도 의미로 자리한 나의 구원자들 덕에 오늘도 힘을 낸다. 글을 쓰며 틀어놓은 스피커에서 <Best of Me>가 때마침 흘러나온다. 


 넌 내 하루하루, 여름, 겨울

 넌 몰라도 You got the best of me

 넌 나의 구원 넌 나의 창

 난 너만 있으면 돼 You got the best of me

 니가 필요해 So please just don't leave me




 2. 태형이었다면



 "음.. 그러니까.. 불편하면.. 괜찮아.."


 휴가 중인 부서장이 걸어온 전화. 급한 업무가 생겼나 했더니 불편한 용무 때문이었다. 평소와 달리 말끝을 흐리며 이어지는 말의 요지는 그러니까 어제저녁 모 대학병원의 대외협력실장과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내 얘기가 나왔고(대체 왜?), 소개해줄 만한 사람을 물색하다가 모 병원에서 근무하는 후배를 떠올렸고, 그 자리에서 그 후배에게 전화를 걸어 소개팅하라는 연락을 했고, 그렇게 나라는 당사자의 동의만 빠진 소개팅이 확정되었다는 것이었다. 


 물론 본인들이 어제 취한 상태에서 진행했기에 원하지 않으면 거절해도 된다고 하면서도, 만약 거절하게 되면 본인이 난감해질 상황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어필하는 것 역시 잊지 않은 전화였다. 알겠다는 답을 하고 전화를 빨리 끊었다. 곧 엄청난 비를 뿌리려는지 무거운 구름이 내내 하늘을 뒤덮고 있는 날이었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10월 말 서울에서 열리는 Speak yourself 파이널 콘서트 티켓을 가지고 올 택배 기사님일까 싶어 반갑게 받았더니 관등성명을 대며 자신을 소개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 잊고 있었던 그 건이구나. 만날 날짜와 시간, 장소만을 간결하게 전달받은 뒤 전화가 끊겼다. 누가 봐도 거절하기 어려운 선배의 부탁을 마지못해 승낙한, 하기 싫지만 미루면 병 될 숙제를 치루는 목소리였다. 싹퉁머리 없는 말투가 고까웠다가, 피차일반의 상황이 우스웠다가, 나도 얼른 그 숙제 끝내고 싶었다가, '내 티켓은 지금 어디쯤 도착했을까. 이게 제일 중요한데' 했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달력이 10월로 넘어왔는데도 한여름의 불쾌지수가 고스란히 유지되고 있는 듯하다. 서두른다고 했는데도 퇴근길이 꽉 막혀 있다. 에어컨을 최대로 틀어놓았지만 하루 내 습기에 구불구불 말려있던 머리카락은 앞머리에 붙어 떨어질 생각을 안 한다. 약속 장소 근처에 주차를 한 뒤 식당에 들어섰다. 먼저 도착했던 그 분과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이런 자리가 처음은 아니지만 늘 처음처럼 설다. 


 보통 통화나 메시지를 주고받으면서 느껴지는 인상이 실제 만남에 이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숨길 수 없는 본질이라는 게 있어서. 아랫사람을 대하듯 부차적이고 부가적인 설명 없이 간결한 말투를 지닐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궁금하지 않은 질문을 생각해내며 대화가 끊어지지 않게 노력했다. 어찌 됐든 시간을 내어 나온 사람이니까. 손님이 단 투 테이블만 있었던 이 식당은 오픈 주방이었고, 우리는 할 일 없는 요리사들의 눈요깃감이 충분히 되어주었다. 후식으로 나온 커피까지 모두 마신 뒤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헤어져 차에 돌아왔다. 일어선 두 사람은 앓던 이를 뽑은 홀가분한 얼굴을 하고 있었을 테다.  


 사실 내내 이런 자리에 태형이가 상대로 나왔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했다. 물론 잘생긴 외모와 피지컬 덕에 첫눈에 반했을 거고, 그림과 도자기와 여행을 사랑하는 서정적인 태태 모드에 연신 공통점을 찾으며 맞장구를 쳤을 거고, 커피 대신 콜라를 시키며 멋쩍게 웃을 태형이를 보며 귀엽다 생각했을 거고, 몇 가지 말에 즐거웠는지 입을 네모나게 벌리며 짓궂게 웃는 얼굴을 멍하게 바라봤을 거고, 그 모습에 나도 똑같이 멍하니 웃어버렸을 거고, 그런 태형이에게 '나 꽤 괜찮은 사람이에요'를 어떻게 하면 알려줄 수 있을까 한껏 고민하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이 소개를 주선해 준 사람에 뭘 줘도 아깝지 않은 마음으로, 시간 가는 게 아쉬워 시계를 보기를 기꺼이 포기할 시간이지 않았을까.


 미혼인 여성 후배를 대하는 방식 역시 구시대적에 머물러있는 회사에 대한 얕은 분노도, 직업적 부심이 바탕으로 덜 매너를 차리던 상대에 대한 얕은 혐오도, 내 앞에 태형이가 앉아 같이 파스타를 먹는 상상 앞에서 사르르 무너졌다. 그냥 평소와 다름 없는 하루였을 뿐이다. 


 뜻 모를 자괴감에 빠질 시간을 제거하게 한 나의 구원자. 블루투스로 연결된 아이폰 목록을 훑었다. 검지로 스크롤을 내려 오늘도 <Best of Me>를 선곡했다.  


 넌 내 하루하루, 여름, 겨울

 넌 몰라도 You got the best of me

 넌 나의 구원 넌 나의 창

 난 너만 있으면 돼 You got the best of me

 니가 필요해 So please just don't leave me



 P.S


 "사실 내 마음속엔 방탄소년단이 있는데, 소개팅을 하러 나가는 것 자체가 이상하게 바람피우는 느낌 같아요."


 이 날 저녁, 소개팅이 예정돼 있다고 하며 덧붙였던 말. '어디 가서 그런 얘기 하지 말'라며 손사래 치던 선배 얼굴이 떠오르지만, 그래도 기록해놓으려고 한다. 바람피우는 일 따위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다. 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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