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과 젊음의 이야기
중경삼림 (重慶森林, Chungking Express)을 보았다.
중경삼림은 홍콩을 배경으로 혼란스러운 젊은이들의 만남과 헤어짐에 대한 큰 가위 (왕가위의 그야말로 옛날식 유머) 감독의 영화다.
중경삼림은 94년에 만들어졌고 우리나라엔 95년에 개봉했다고 하는데 내용이 기억이 안나는 것을 보니 그때 못 보고 지나친 영화 같다. 그때 난 이런 유명한 영화도 안 보고 뭐 하고 있었을까?
손가락으로 그 어려운? 뺄셈을 해 보니 나에게 94년은 의대 본과 2학년의 무게가 지워진 해였다. 두꺼운 임상 과목 교과서들을 책상에 쌓아 놓고 공부하다가 졸다가를 반복하던 한 해였던 것 같다.
비밀번호를 잊어버린 사람처럼 기억을 더듬어 헤쳐보았다. 아! 그 해는 슬픈 일들이 유난히 많았던 것 같다. 성수대교가 무너져 많은 사람들이 숨진 일도 비극이었지만 나에겐 고등학교 친구 원태가 교통사고로 하늘나라로 갔던 일이 더 충격적이었다. 그 친구는 내가 대학 재수 후 합격 발표날 학교에 같이 가서 합격자 명단을 함께 보았던 친구였다. 서로 붙잡고 얼싸안으며 세상을 얻은 듯한 기쁨을 나누었던 친구. 그 친구가 먼저 갔다는 비보를 듣고도 난 장례식에 가지 못했다. 왜 못 갔을까? 이미 20대 청년이지만 친구의 죽음을 인정하기엔 아직 어렸고 어려웠던 것 같다. 원태야 잘 있지? 그때 내가 좀 더 성숙했다면 너를 그렇게 보내지는 않았을 텐데... 정말 보고 싶다.
94년보다 3년 앞선 91년. 난 홍콩에 한번 가본 적이 있다.
미국의사시험 본다고 갔던 길이었다. 준비도 별로 안 해서 낮은 점수로 간신히 커트라인을 넘겼던 것 같은데, 그 후로 한국에 눌러앉아서 의미 없는 시험이 되었다. 시험 점수보다 기억나는 것은 그 텁텁한 홍콩의 거리에 복잡한 상점과 식당이다. 그때 그 시절 풍경이 중경삼림에 보여 추억을 소환한다. 중경삼림(Chungking Express)의 영어 제목은 홍콩 침사추이 지역에 있었던 chungking mansions와 늦은 시간까지 운영하던 작은 음식점인 midnight express에서 따 온 제목이다. 왕가위식 현란한 카메라 움직임과 색상이 어지럽다. 아마도 청춘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이리라.
벌써 30년 가까이 지났네, 허허.
영화 속에는 그 유명한 임청하와 양조위가 보여 반가웠지만, 에피소드 2의 여주인공인 왕페이가 나와 같은 69년생이라니 느낌이 새롭다. 영화 속 그녀의 모습에 아마도 30년 전 내 청춘의 조각이 숨어 있어서 더 정겨웠던 것 같다.
아! 홍콩, 중국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예전의 모습이 아닐지 모른다. 그렇지만 언젠가 홍콩 침사추이에서 30년 전 젊음을 다시 만나고 싶다.
난 이런 옴니버스 영화가 좋다. (내친구ㅠㅠ 김태용 감독의 '가족의 탄생',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우연과 상상'과 같은)
영화 한 편 값에 여러 편을 보는 것 같아서일까? 그보다는 같은 주제와 정서를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풍성함에 그 매력이 있는 것 같다.
이 영화에는 배우, 감독, 영화의 구도, 미장센, 홍콩 역사 등 다양한 이야깃거리가 있지만 역시 음악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1960년대 노래, 마마스 앤 파파스의 California dreaming.
에피소드 2의 왕페이가 미드나잇 익스프레스 소시지 가게에서 흥겹게 몸을 흔들며 음악에 몸을 맞긴다.
https://www.youtube.com/watch?v=Yh87974T6hk
All the leaves are brown and the sky is gray
I've been for a walk on a winter's day
I'd be safe and warm If I was in L.A.
California dreamin'
On such a winter's day
나뭇잎새마다 색은 누러지고 그 위로 하늘은 잿빛인데
어느 한 겨울날 난 산책을 나갔었지.
LA에 있었다면 난 따뜻하게 잘 있었으련만
꿈속에서나 그려보는 따듯한 캘리포니아
이렇게 추운 어느 겨울날에
Stopped into a church I passed along the way
Well I got down on my knees and I pretend to pray
길을 헤매던 중에 한 교회에 들렀었지
무릎을 꿇고서 난 기도하는 척했었어.
그런데, "California dreaming. 니가 왜 여기서 나와?"
아마도 97년 중국에 반환되기 전의 홍콩, 불안하면서 자유를 그리는 마음이 60년대 히피들이 동경했던 캘리포니아와 맞닿아 있는 것 같다.
그런데 2023년, 아직도 그 따듯한 캘리포니아는 멀리 있다.
홍콩 시민에게,
우리 모두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