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긴 하루의 시작, 작약이 알려주는 계절, 조금 더 빛나게 만들어주는
해가 긴 하루의 시작
러시아의 5월은 해가 길다. 해가 오전 4시면 떠오르고 밤 8시가 넘어야 어둑어둑해진다. 러시아 하면 막연히 추운 나라일 것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던 나는, 우리의 여름처럼 해가 길어질 것은 생각을 못 했다. 암막 커튼을 쳐 놓아도 나의 생체시계는 새벽 3시 반에서 4시 사이에 알람처럼 작동했다. 살며시 떠진 눈꺼풀 위로 보이지 않는 빛이 새어 들어온다. 옆에서 자고 있는 딸은 미동도 없다. 혼자 뒤척이며 새벽을 보내고 딸이 일어날 때까지 아침을 기다리며 시간을 달래야 했다.
해가 지는 시간에 맞춰 예약한 모스크바강의 유람선을 타기 위해, 오전 느지막이 브런치를 먹을 계획이다. 브런치는 빵이 나올 거기에 난 밥을 한 숟가락 미리 먹고 나가기로 한다. 딸의 라면 끓이는 조그만 전기냄비는 전자레인지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햇반의 밥을 쏟아 약간의 물과 다시 데워 진밥의 형태로 만든 것이다. 용기째 끓이면 시간이 오래 걸리기에, 집밥 고수의 스킬이 나온다. 따뜻한 밥에 김, 고추 참치와 볶은 김치만으로 맛있는 속전속결 아침이다. 그 맛은 집밥의 익숙함이었다. 우리나라의 통조림과 간편식이 타지에서 고향을 느끼게 하는 순간이다.
작약이 알려주는 계절
지하철만 타고 다니다 처음으로 러시아 버스를 타본다. 저상버스도 많고 신기하게 버스와 버스를 연결한 것도 있다. 이층 버스가 위로 쌓았다면 러시아의 버스는 옆으로 긴 형태다. 유난히 푸른 하늘 아래에 햇볕은 따갑고, 선글라스의 도움 없이는 눈을 뜨기도 어렵다. 그래도 화창한 날이어서 좋다. 버스에 앉았는데 통로를 사이에 두고 옆자리에 앉으신 할머니의 장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나의 장가방 같으면 파의 초록 부분이 나와 있었을 텐데, 파 대신 예쁜 진분홍의 덜 핀 작약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작약꽃을 보고 계절을 느꼈다, 머리 하얀 할머니의 장가방 작약은 미술관 가족의 뒷모습만큼이나 기억에 남는다.
딸아이가 말한 맛있는 브런치 카페는 백화점 내에 입점된 프랜차이즈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도 매장을 보았다고 하니, 쉽게 서울에 본점이 있고 부산에 체인을 가지고 있는 격이다. 브런치 플레이트와 샌드위치, 스틱 페이스트리, 음료를 시켰다. 여행 중 환율은 1루블이 17원이었다. 한 끼니에 한화로 사만 원 가까이 지불했으니 외식물가가 싸진 않았다. 맛까지 없었다면 속상했을 테지만 다행히도 맛있었다. 가격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면 소중한 이와 함께 나눈 한 접시의 기억일 것이다. 게다가 그 소중한 이는 나의 딸이 아닌가.
조금 더 빛나게 만들어주는 이야기
오늘의 핵심 계획은 모스크바의 마지막 미술관 투어인 트레치아코프 구관 관람이다. 브런치 먹은 곳에서 다시 버스로 몇 정거장을 가서 내린 후 골목길을 따라 십 분 정도 걸었다. 미술관의 뒤편을 돌아 정문에 도착했다. 사진으로만 보던 팔짱 낀 트레치아코프의 동상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미술관 건물 입구는 묵직한 시간의 문을 두드리게 했다. 십 만점이 넘는 12세기에서 20세기의 작품들이 시대별 작가별로 소장되어있다. 지난번 신관의 오류를 범하지 않으려 브로슈어 먼저 챙겨 들었다. 전시실마다 표시된 두세 점의 그림을 보고 ‘이 그림들이라도 제대로 담고 가자’라는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랜 과거의 그림들은 여왕이나 여인들의 초상이 많았고 신화나 성경을 바탕으로 한 그림들이 많았다. 여인들의 표정이 담긴 그림들도 좋았고 성경을 바탕으로 한 대작들도 멋졌다. 화려한 그림과 잔인한 그림 편안한 그림은 모두 저만의 이야기를 담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필립 말라빈의 <회오리바람>. 처음 보고는 강렬한 붉은색이 꽃인가 싶었는데 멀리서 보니 전통의상을 입은 여인들이었다. 러시아 혁명 전후의 격변기를 겪었다는 작가는 민속적 소재와 강렬한 색감의 아름다움 뒤에 자유에 대한 염원을 회오리바람처럼 강하게 나타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새로고침 서양미술사’ 책에서 러시아 가기 전날 보았던 그림을 직접 만났다. 일리야 레핀의 그림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였다. 흥분을 참지 못한 이반 4세(이반 뇌제)가 아들(이반)을 분노에 차 살해했다는 설화에 기초한 그림으로 충격적이고 강렬한 역사화로 기억한다. 폭력에 대한 후회와 슬픔과 광기 어린 여러 감정들이 눈빛에서 말해 주고 있다.
끔찍한 그림을 보고 난 후라 그랬을까. 복숭아 몇 개가 놓여 있고 씨를 파내는 도구가 놓여 있는 그림 앞에 발길이 멈췄다. 마치 인상주의의 빛과 부드러운 색감이 가득 담긴 그림 같다. 두 손에 작은 공을 쥐듯 복숭아를 들고 있는 평범한 여인의 모습이 담겨있다. 발렌틴 세로프의 <복숭아를 든 소녀>다. 아. 보. 하(아주 보통의 하루)를 대표하는 그림이어서 그랬을까 이유 모를 편안함을 느꼈다. 나에게도 햇빛 드는 거실 창 아래 컴퓨터를 켜두고 지난 여행을 추억하며 글을 쓰는 지금이 아. 보. 하다.
미술관을 나오며 라즈베리 아이스크림을 사 먹던 상큼함과 시원함은 미술관의 마지막으로 기억되었고, 그 순간마저 그림처럼 가슴 깊이 담아 두었다. 해가 뜬 시간에 만났던 장바구니의 작약꽃, 붉은 회오리바람과 광기와 후회로 가득 찬 아버지의 눈빛, 평범한 복숭아를 담은 모든 기억은 나의 하루를 조금 더 빛나게 만들어주는 이야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