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굽은 가지를 좋아한다.
바르고 곧은 가지는 꺾어버리고 옆으로 난 꽃을 기른다.
조금이라도 하늘로 향하면 바로 잘라버렸다.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다. 굽은 꽃이 인기가 더 많으니까.
사람들은 더 많이, 더 잘 팔리는 꽃을 만들었다.
꽃은 왜 피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피어야 했다.
그래야만 했으니까.
피우고 싶은 꽃이 아니라
남이 원하는 꽃을 피워야 했다.
꽃들은 굽은 가지 때문에 서로 엉켰다.
줄기가 끊어져 죽어버리는 꽃도 있었다.
어느 날, 한 시인이 무심코 화분을 깨버렸다.
화분에는 그 꽃의 성적표가 붙어 있었다.
성적표의 숫자로 보건대, 그건 가장 보잘것없는 화분이었다.
아무도 사려는 사람이 없어 구석에 버려진 꽃이었다.
그러나 시인에게 그런 건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는 줄기를 묶은 끊을 모두 풀어버렸다.
화분을 산산조각 내어 마음껏 자라도록 했다.
그리고 노래를 부르며 갈 길을 떠났다.
꽃은 조용히 가지를 뻗기 시작했다.
하늘을 향해서.
일주일이 흐르고,
십 년이 지났다.
시인은 자기가 풀어준 그 꽃을 다시 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길목부터 들어선 사람들로 한 걸음도 떼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분명 시골 마을이었는데, 지금은 그 어느 도시보다도 번화했다.
한적했던 부두도 각지에서 온 배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시인이 물었다.
'도대체 뭐가 있기에 이렇게 사람이 많소?'
'아직도 모르오?'
한 행인이 말했다.
'우리 마을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 있다오'
시인은 잠시 머뭇거리다 그 행인에게 귓속말을 해주었다.
행인은 놀란 표정으로 집으로 뛰어갔다.
다시 십 년이 흘렀다.
'가장' 아름다운 꽃은 더 이상 없었다.
저마다의 꽃을 피운 꽃들이
마을과 세상에 색을 칠해 주었다.
본 시는 청나라 무렵 작성된 수필 '병매관기'를 모티브로 작성되었습니다. 당시 작가 비판하려고 했던 것은 청나라의 문화 탄압이었으나, 오늘날의 수험생과 입시의 현실에도 그대로 적용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여 옮겨 보았습니다. 열심히 입시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입시는 꿈을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는데 그것이 전도된 것 같습니다. 좋은 대학에 가는 건 좋은 일이지만 그것이 인생 최대의 목표가 되면 안 되지 않을까요? 대학은 어디까지나 더 큰 꿈을 위한 계단에 불과하니까요. 만약 자신만의 꿈이 있다면 입시를 포함한 그 모든 과정이 찬란히 빛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 꿈을 가지고 공부를 하면 분명 성공할 수 있을 겁니다. 좋아하는 걸 열심히 하는 사람을 막기는 무척 힘드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