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
사전에 따르면 '피하거나 쫓기어 달아남'이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 도망가 본 경험은 있다. 동생 몰래 라면을 끓여 먹거나 숙제를 안 했을 때, 아니면 그저 학원에 가기 싫어서 도망친 적도 있다. 하지만 선생님, 그것도 담임 선생님이 학기 중 사라지신 사람은 잘 없을 것이다.
그 일은 지금처럼 설날 무렵에 발생했다. 한국과 달리 서양 학교들은 9월에 시작하여 6월경에 학기가 종료된다. 겨울 방학은 3주 정도로 매우 짧고, 선생님, 친구들과 새해 인사를 나누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우리 학교는 미국계라서 영어 대신 모국어로 떠들면 벌금을 내야 했는데, 다들 활발한 친구들이 대다수라 한 학기가 지나자 벌금 항아리는 순식간에 꽉 찼다. 그 벌금으로는 피자 파티를 하기로 해서 내심 기대하는 상황이었다.
설날 연휴가 끝나고 드디어 그날이 찾아왔다. 필자를 비롯한 다니엘, 제임스는 들뜬 마음으로 교실에 발을 들이고 수업 준비를 했다. 그러나 5분, 10분, 심지어 30분이 지나도록 선생님은 나타나지 않으셨다. 캐나다에서 오신 프랑스계 선생님 마이클, 늘 밝고 성실하셨던 분이라 학생들도 긴장했다.
상황은 점점 심각해졌다. 선생님이 나타나지 않아 다음 교시 친구들까지 몰려들어 교실은 아비규환이 되었다. 결국 다른 반 선생들이 모여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네..? 정말이라고요?'
전화를 끝낸 선생님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현장에서 우리 반 해체 작업에 들어갔다.
'너는 샐리 선생님 반으로 가. 너는 존 선생님 반으로 가고. 나루 킴? 넌 샐리 반으로 가기로 정했다.'
'네..? 선생님은요?'
'그건 묻지 마라. 이제 선생님은 이제 못 오신다.'
옆 반 선생님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반 학기를 함께했던 우리 반은 선생님의 실종과 함께 막을 내렸다. 우리는 뿔뿔이 흩어져 다른 반으로 분산 수용되었다. 다행히 제임스는 나와 같은 반으로 갔지만 다니엘은 다른 반이 되었다. 늘 영어 수업을 했던 교실은 빈 방이 되어 다시는 가지 않게 된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일까, 새로 배치된 반의 수업은 이해하기도 쉽고 친절했다. 덕분에 필자는 고등학교 진학을 위한 테스트를 통과하고 강제 귀국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면했으니, 어쩌면 지금 필자가 있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셈이다. 하지만 담임 선생님은 어떻게 된 걸까나. 우리의 피자 파티는 종잇장처럼 구겨져 없던 일이 되었다.
얼마 뒤에 선생님의 행방이 밝혀졌다. 선생님이 아끼던 장식물들과 피자 파티를 위해 모아 둔 돈이 밤사이에 사라진 것이다. 소문에 의하면 도주하신 선생님이 기물을 챙기기 위해 밤에 몰래 다녀갔다고 했다. 정말일까. 텅 빈 교실에 들어가니 과연 돈과 장신구들이 사라져 있었다. 잡힐 위험을 무릅쓰고 올 만큼 그것들이 중요했을까.
'선생님, 감시를 피해 몰래 도망가신 거라는데? 무슨 일이 있었나 보다.'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가 말했다. 학교 뉴스에 '마이클 선생님, 실종되었다'라는 기사가 올라왔으나 아무도 그 행방을 알지 못했다. 학교와 모종의 불화가 있어서 야밤에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 사정이 궁금했다. 하지만 내가 그 학교를 떠나는 날까지 선생님은 돌아오지 않으셨다.
그 이야기는 이후 일종의 전설처럼 변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왔다고 한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지만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가명을 사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