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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석 Apr 11. 2023

비 오는 화요일


아침부터 잔뜩 흐려 울먹울먹 하던 하늘이 기어코 비를 쏟아냈다. 화요일에 내리는 비는 월요일과 수요일과는 다른 더 잿빛이고 조용해서 잊고 있었던 슬픈 마음을 잔잔히 펼쳐준다. 이런 날엔 노오란 불빛들이 제 역할을 해준다. 회색빛에 싸인 세상을 따뜻하게 비춰주어 그래도 아주 슬프지만은 않게 한다.


어릴 적 비 오는 날엔 무조건 종로에 나갔다. 비 냄새, 지나가는 사람들, 어둡지만 꽤 선명하게 보이는 건물들이 마음을 차분하게 해 줬다. 낙원상가에 가서 좋아하는 악기를 구경하며 맘껏 상상하는 기분도 쏠쏠했다. 주머니에 몇 천 원밖에 없었지만 분식집 라면 한 그릇 먹을 정도면 부족함이 없었다. 그리고 다음 코스는 영풍문고. 가는 길에 지하철 가락국수집에서 팔던 가락국수는 말해 뭐 할까. 영풍문고에 가서 몇 시간 책 구경, 음반 구경, 문구 구경, 사람 구경을 하면 하고 싶은 일이 떠오르고 두근거리는 일들을 계획하게 된다. 비 오는 날은 꾹꾹 숨어 있던 생각을 꺼내어 차곡차곡 정리해 주었다.



성인이 되어 비 오는 날은 짜증 나는 날이었다. 이른 아침 출근길 만원 버스와 지하철에서 젖은 우산이 뒤엉켜 이리저리 휩쓸리고 또 내려서 회사 가는 길에 발목까지 빗물이 튀어 신발은 젖고. 거래처에 가려고 회사를 나서면 우산을 쓰고 다니는 것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온통 축축한 하루였다. 아무튼 사회생활을 하던 시절 비 오는 날은 우울한 날이었다. 상황이 비를 좋게도 나쁘게도 만들었다.


시간이 흘러 나이가 들고 보니 상황의 좋고 나쁨에 관계없이 비가 주는 이로움을 많이 생각하게 된다. 비를 간절히 기다리는 농부, 산불난 곳에 비를 기다리는 사람들, 꽃을 피우기 위해 비를 기다리는 나무, 적절한 강수량으로 필요한 식수를 확보해야 하는 일 등 비가 주는 많은 이로움을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 이 비도 내 상황과 관계없이 감사하다.


그럼에도 비는 가끔 내 생각을 두드리고 감정을 건드리라는 것은 변함없을 것 같다. 봄비, 여름비, 가을비, 겨울비, 때에 따라 내리는 모든 비가 나름의 온도와 색을 가지고 다시 내게 방문하길 기대한다. 오늘은 화요일의 봄비를 즐겨야겠다. 커피 한 잔을 방금 전 마셨는데 글을 쓰고 나니 잔을 다 비웠다. 한 잔 더 내려서 마셔야겠다. 아내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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