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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예진 Oct 16. 2018

미국의 공허를 여과하지 않은 이들

에드워드 호퍼, 레이먼드 카버, 쳇 베이커

이미지: 에드워드 호퍼 <nighthawks>



시월을 미워하는 자 있을까. 냉방도 난방도 불필요한 완벽한 온도. 자연이 마지막으로 색채를 발산하는 황홀한 기간. 동시에 너무 빨리 가버려 야속한 계절. 이맘때의 미국은 눈 닿는 곳마다 주황빛으로 영근 펌프킨, 단풍, 짚더미 등 할로윈 장식 일색이라 기온이 평년 같지 않더라도 계절을 감각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


철마다 달마다 배치된 각종 기념일을 순차적으로 시스템화해 떠들썩하게 즐기는 것이 워낙에 이곳의 풍습이긴 하지만 가을이 깊어졌을 때 만나는 할로윈만큼은 그 존재감이 유독 두드러져 보인다. 할로윈이라는 주술적 기념일을 ‘빅딜’로 부풀려 왁자지껄 즐기는 것으로서 춥고 긴 겨울을 목전에 두고 스산해지는 심경을 짐짓 모르는 척 해버리고자 하는 인간의 자기 치유 심리가 반영된 듯싶어서다.


처음 미국에 와 일 년 정도 살아보고 난 뒤 내 뇌리에 와 박힌 건 미국이라는 나라의 제도화된 조직성과 통일성이었다. 얼핏 편하기도 한데 시간이 지날수록 답답하고 지루하고 막막해졌다. 다시 말해 미국이라는 나라에서는 어느 지역에 살다가 어느 지역으로 이사를 가든 새로운 거주지에서의 일상을 쉽게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인데, 그것이 편리하다면 편리하고 답답하다면 답답한 것이다.


전라도 여수에 살다가 강원도 원주로 이사를 했는데 양쪽 어디에서든 이마트에서 장을 보고,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고, 반디앤루니스에서 책을 사고, 김밥천국에서 점심을 먹는 것 외에 딱히 선택지가 없을 때 느낄 수밖에 없는 지루함이라고 하면 알맞은 비유일까. 헌데 언젠가부터 이 일관성이 미국인들에게도 못 견디게 지루한 것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생겨났다. 미국인들 스스로가 느끼는지 못 느끼는지는 모르겠지만 미국인들의 일상을 지켜보면서 든 생각이다.


미국인들은 연 중 각 절기마다 이런저런 기념일을 줄 세워 놓고 기념하고 자축하는 데 상당히 적극적이다. 새해 첫 날이 있는 1월을 시작으로, 2월의 발렌타인데이, 3월의 성 패트릭데이, 4월의 부활절, 5월의 현충일, 7월의 독립기념일, 9월의 노동절, 10월의 할로윈, 11월의 추수감사절, 12월의 크리스마스까지.


친지를 불러 파티를 하든 야외에 나가 바비큐를 하든 어떤 식으로든 기념일들을 챙겨 지내고, 이 시기에 맞춰 모든 상점들은 기획 상품을 들여놓고 진열과 매장 장식에 변화를 줘 판촉에 박차를 가한다. 미국 어디서나, 매해 똑같이 돌아가는 풍경이고, 많은 사람들이 집 안팎의 장식도 이 기념일 순서에 따라 돌아가며 바꾼다.


이토록 조직적이고 규칙적으로 끊임없이 주변 환경을 바꾸고 기념하는 미국인들의 관습이란 앞서 적시한 단조롭고 특색 없는 환경에서 어떻게든 활기 있게 살아보려는 의지에서 생성된 안간힘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타 문화권에 의해 물질적 풍요로 비춰지기도 하고, 더러는 희화화되기도 하는 미국인들의 소비 동력이자 미국적 삶의 본질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껏 부풀려진 풍요 속에 사는 이들이라고 해서 시시때때로 가슴 언저리를 쓸며 지나가는 공허에 둔감하기만 할까. 깊이 드는 생각쯤 무시하고 즐거운 것만 보려고 노력하지만 자기 최면이라는 효과가 늘 일관성있게 도와주기만 하는 것은 아니니까. 역시 인생은 살만한 거야, 라는 주문도 먹힐 때가 있고 먹히지 않을 때가 있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해서 남들 떠들썩할 때 산통을 깰 용자 그 누구던가. 비관을 수혈 받고 싶어하는 이는 없다. 때문에 우리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감정을 남과 진정으로 나눈다는 게 가능할까 회의한다. 타인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위로받고 싶어 하지만 서로 받아주는 듯싶다가도 힘겨울 땐 감정의 쓰레기통이 되었다고 투덜거리는 게 우리네 자화상이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우리는 공감을 통해 위로를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마음을 응시해주는 대상을 만날 때 이해받고 있다고 느끼며 잠시나마 덜 외롭다.


예술의 존재감이 발화하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든 즐거이 살아가고자 하는 우리네 인간의 무릎을 꺾는 공허, 권태, 허무라는 삼종 세트의 윤곽을 뭉개지 않고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에서 에드워드 호퍼, 레이먼드 카버, 쳇 베이커가 이 가을에 쓸쓸한 위안을 준다. 화려하며 부질없는 것들로 껍데기를 장식한 다음 그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미국의 헛헛함을 그림으로, 문장으로, 트럼펫으로 끄집어내 세상의 진열대에 올려놓은 이들.


출생과 작고의 시기가 조금씩 다른 사람들이지만 나는 이 세 사람 모두가 미국의 본질을 대면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같은 길을 걸었다고 여긴다. 유행에 뒤떨어진 사실화를 고집하면서 외로운 고행을 한 에드워드 호퍼, 평생 생활고에 허덕이며 노동자 계급의 삶을 단편소설로 풀어낸 레이먼드 카버, 서글프도록 아름다운 감수성과 재능을 마약으로 소진해 버린 쳇 베이커. 이들의 작품을 보고, 읽고, 들을 때만큼은 미국의 속살을 만지고 있다는 짜릿함에 전율한다.  


에드워드 호퍼 <Automat>

레이먼드 카버 소설집 <대성당>

나른한 보컬, 동시에 트럼펫 연주자 쳇 베이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이들의 작품을 통해 감각하는 것은 어쩌면 미국적 삶이라기보다 그저 삶 자체인 걸지도 모르겠다. 고독과 허무를 떨쳐버리기 위해 끝없이 분투해야 하는 삶이 어디 지구촌 한 곳에서 뿐이던가. 브런치를 먹고, 쇼핑을 하고, 등산을 하고, 골프를 친다며 타인과 어울려도 내면의 외로움은 불쑥 불쑥 고개를 내밀게 마련이니. 사르트르의 말처럼 ‘타인이 지옥’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따금씩 우리는 읊조리지 않나. 내 맘 알아주는 이 아무도 없다고.


천박한 포장과 거짓 위안을 극도로 경계한 작품들만이 생의 ‘진짜 얼굴’들이 곁을 걷고 있다고 귓속말을 해줄 뿐이다. 결국 우리는, 백석이 시를 통해 전한 것처럼, 자신만의 흰 바람벽 위로 끊임없이 지나가는 상념들을 응시하면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난 존재들일지니.




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샷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을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아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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