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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예진 Aug 12. 2021

술알못이 맥주맛 감별사가 된 이유

해리는 어째서 샐리에게 달려간 걸까



운전을 하고 가다가 어떤 가족을 봤다. 대기가 가뭇가뭇해지는 저녁, 관광객의 활기로 가득한 다운타운을 등지고 주택가 쪽으로 걷고 있는 일가족이었다. 아빠가 세 아이 중 막내를 무등 태워 걷고 있었다. 이런 광경을 접하면 백만 년 전에 본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샐리가 남사친으로 지내는 해리에게 전 애인과 헤어지게 된 계기를 말하는 대목.


샐리와 전남친은 ‘동의 하에’ 자유로운 동거 커플로 지냈었는데, 어느 날 샐리는 남친과 주변 묘사하기 게임을 하던 중 지나가는 한 가족을 가리켜 말하면서 울어버린 것이다. ‘실은’ 가정을 이루는 결속력의 관계를 갈망하는 샐리의 본성이 담담하지만 멋지게 표현된 대목이었고, 그건 이 영화 플롯의 핵심이기도 했다.


이 영화가 로코의 클래식이 된 데에는, 아무리 지긋지긋하고 뻔해도, 연애의 법칙에서 결국 다수는 ‘그것’(=가정)을 원한다는 공감대를 설득력있게 그려냈기 때문일 것이다. 해리가 자정이 다가오는 뉴욕 거리를 달려 기어이 샐리에게로 갈 때, 관객들은 ‘안돼! 결혼이란 족쇄야!’라고 외치기보단 안도한다. 그만큼 결속력은 인간의 보편적 소망 아닐까.


오래 전 유학 시절의 나는 물 설고 말 설은 곳에서 혼자 살면서 이전에 알지 못하던 여러 측면의 나를 발견했었다. 그 중 하나는 내가 독신으로는 절대 살 수 없는 류의 인간이라는 자각이었다. 외로움을 잘 타는 나를 확실히 만나본 게 유학을 통해 얻은 수확인 것이 어이없긴 하지만 적어도 손해는 아니었다. 나 같은 사람이라면 어떤 것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때문에, 결혼은 커리어의 무덤이니 어쩌니, 경단녀가 되면 삶이 파괴라도 되는 것처럼 구는 사람들에 휩쓸리지 않고 내 위치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로 삶을 단순화하며 지내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언젠가 메이크업 아티스트 바비 브라운의 인터뷰를 흥미롭게 읽은 적이 있다. 밑바닥부터 일군 회사가 에스티 로더로 넘어갈 때 바비 브라운은 소유권 싸움을 하는 대신 월급 사장의 자리를 선택했다고 했다. ‘더 높은 곳으로’ 갈 수 있는 패를 버린 대가로 얻게 된 것은 저녁 6시면 칼퇴근을 해서 남편, 세 아들과 저녁을 먹고 함께 티브이를 볼 수 있는 일상이었다. 그 인터뷰를 읽고 그녀에게 호감이 갔던 기억이 있다.


아이들 없이 저녁을 먹게 된 날, 전채 하나로 간단히 떼우기로 하고 맥주 한 캔을 땄다. 갈수록 맥주 입맛이 까다로워지는 남편은 요즘 로컬 브류어리 맥주만 골라내 온갖 다양한 시도를 하는 중이다. 오늘 것은 캘리포니아 스타일 에일이란다. 뉴잉글랜드식이 레모네이드처럼 뿌옇다면 캘리포니아식은 라거 비슷하게 투명도가 높다고. 내 입맛에는 뿌연 게 맛있는데, 술 잘 못마시는 내가 맥주맛 감별을 그런대로 하는 건 그러니까 이런 거다. 방금 따른 맥주를 가장 맛있을 때 시음하듯 몇모금 홀짝거리다가 나머지를 양도할 상대가 있다는 것.


무등을 탄 아이의 뒤통수가 아빠의 걸음에 맞춰 들썩거리는 걸 볼 때, “한 가족이 걸어가고 있네.”라고 말하며 우는 대신, 내 아이들의 그때를 추억할 수 있는 시간을 지나왔다는 것. 그리하여 결국은 이렇게, 손 쉽고 간단한 것으로 부부만의 저녁을 먹는 날도 있게 됐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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