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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예진 Apr 10. 2018

학교라는 정글

테이프에 녹음된 진실



해야 할 일들은 고지식할 정도로 규칙적으로 처리하는 편인데, 놀 때는 편파적으로 하나에 꽂히는 경향이 있어 좀 풀어져 있자고 들면 일상의 리듬이 확 깨지고 만다. 줄창 드라마를 본다거나, 책 몇권을 쌓아놓고 연달아 읽는다거나, 그게 또 싫증 나면 구독하고 있는 팟캐스트의 최신 업데이트 내용을 따라잡느라 종일 헤드셋을 꽂고 있는 식이다.


최근 며칠간, 틈날 때마다 넷플릭스에 접속하게 했던 미국 드라마가 있어 일상에 진동이 좀 왔었다. 

<13 Reasons Why> 

미국의 평범한 고등학교가 배경인 소재로, 학교 내에서 마음 붙일 곳을 찾지 못해 고통스러워하던 여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해나가 죽고 난 어느 날, 해나를 짝사랑하던 클레이에게 상자 하나가 배달된다. 상자 안에는 해나가 자살을 결심한 후 만들어둔 열세 개의 카세트 테이프가 들어있다. 클레이는 테이프를 재생하고, 우리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해나의 목소리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그녀가 견뎌내야했던 심적 고통을 순차적으로 지켜보게 된다. 열세 개의 테이프에 담긴 열셋의 주인공들. 어떤 식으로든 해나와 엮여 그녀의 죽음에 영향을 미친 인물들이다.


해나가 겪어내야 했던 것들은 실제적이다. 누군가 혹은 어떤 무리가 작정하고 하나의 대상을 과녁으로 삼지 않았더라도 벌어질 수 있는 일. 얼핏 보면 흔히 있음직한 일들로 인해 한 사람의 영혼이 차츰차츰 황폐해지면서 파국을 향해가는 과정이 개연성있게 그려져 있다. 하지만 누군가는 의문을 품을 것이다.


해나는 왜 그랬을까. 왜 피하지 않고, 왜 알리지 않았을까.


관중의 자리에 있을 때 우리는 냉철하고 현명하다.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가깝게 지낼 사람과 거리를 둘 사람, 가야할 곳과 가지 말아야 할 곳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다. 하지만 생이라는 링 위에서 인간은 어떠한가.


걸핏하면 이성이라는 연장을 분실해 스스로를 늪에 빠뜨리며, 타인에게 고통을 주고, 더러는 인류에 해악을 끼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아이들은 해나가 될 수도 있고, 열세 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드라마를 보는 동안 해나와 함께 아팠다. 무분별하고 미성숙한 남학생들이 던지는 성적 조롱과 추행, 절친의 변심, 이기심 때문에 해나를 이용하거나 뒤통수 치는 교우들을 보면서 해나가 되어 흔들렸다. 


고통의 태풍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심지어 걸어들어가기까지 하는 해나에게 감정을 이입할 수밖에 없었던 건 모든 게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악을 알고도 행하는 이들, 악을 묻힌 화살인 줄도 모르고 이 정도 쯤이야 싶어 쏴버리는 말과 행동들, 악을 방관하는 무심함들. 모두 세상 도처에 널려 있는 것들이다.


청소년기, 누가 건드리지 않아도 존재 자체로 다칠 준비가 되어있던 열꽃같던 시절. 온갖 종류의 기질을 가진 또래 아이들과 공생하며 상처받지 않고, 우울해하지 않고, 공부를 하고, 미래까지 설계하며 발랄하게 지내기란 얼마나 어려운 과제였는지! 


어른들의 세계, 진짜 세계로 나기려면 단단해져야 하니, 학교라는 정글 속에서 치뤄야 하는 서바이벌 게임은 예방접종인 동시에 시험이다. 누군가에게는 도저히 버텨내지 못할 정도로 힘겨운 시험. 


해나는 시험을 포기하고 생의 궤도에서 이탈했지만 대다수는 끝까지 시험을 본다. 점수가 좋던 나쁘던. 해나보다 운이 좋아서일 수도 있고 해나보다 강해서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창 시절을 통과해 지나오는 동안 한번도 다치지 않았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학교 폭력의 피해자가 된 적이 있었다. 


사건 이후, 다음에 해야할 행동이 뭔지 판단을 내리기도 전인데 사태가 알려져 증언을 해야할 상황에 놓이게 됐었다. 겁을 먹은 가해자들은 온순한 태도로 돌변해 나를 둘러싸고 회유했다. 얼떨떨한 상태로 담임 선생님한테 불려갔다. 나를 앉혀놓고 선생님이 질문했다. 선생님이 법조인 같아 보인 적은 처음이었다.


어제, XXX에 갔었니?

그 자리에 XXX, XXX, XXX, XXX, XXX가 있었던 게 맞니?

거기서 그 아이들이 너와 H를 때렸니?


선생님이 알고 있는 정보는 정확했다. 함께 당했던 H의 부모가 노발대발 화를 내며 학교에 고한 내용이었을 거고, H는 부모가 보내지 않아 학교에 오지 않은 상태였다. 있었던 일을 부모님에게 말하지 않고 평소대로 출석한 나 혼자 모든 걸 증언해야 했다.


그런 일은 없었다고 했다. 그곳에 갔었던, 그 자리에 있었던, 그곳에서 벌어졌던 일에 대한 '씬' 자체를 부정했다. 그러면서 얼굴에 든 멍을 선생님이 볼까봐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선생님은 대답하지 않는 나를 바라보다가 교실로 되돌려 보냈다. 


그날 학교에 있었던 유일한 피해자가 아니라고 하니 가해자들을 벌 줄 수 없었다. 다음 날 학교로 돌아온 H는 사실대로 증언하지 않은 나를 비난했고, 위기를 넘긴 가해자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이제 현재로 돌아와 관중의 시각이 되어 그때를 돌아본다.  사실을 말하고 가해자들을 처벌받게 해야 했는데 왜 그러지 않았을까. 실은 이 드라마를 보기 전까지 그때의 일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잊어버린 건 아니었다. 다만 교무실에서의 '나'만 기억에서 도려냈었던 거였다. 


그러지 않던가. 인간의 뇌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은 망각하도록 만들어져 있다고.


최면에 걸려 과거의 한 시점을 돌아보는 환자처럼 그때의 감각 상태를 정확히 기억해내기 위해 당시의 나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날의 감각 세포들이 고통스럽게 되살아났다. 내 마음이 보였다. 선생님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앉은 나는 복합적인 감정에 휩싸였었고, 온갖 예측을 하며 공포에 질려 있었다. 


집단 린치를 당했다는 소문이 퍼질 경우의 수치스러움, 

가해자들에게 빌미를 주었던 나와 H의 바보같은 실수가 알려졌을 때 감내해야 할 주변인들의 빈축, 

학원을 빠지고 그들을 따라 그 장소에 갔었다는 걸 부모님이 알게 되까봐 두려운 마음, 

일이 벌어진 즉시 딸을 집에서 보호하며 학교에 불호령을 내린 H의 부모,

반면 심상치 않은 일이 있었다는 걸 알아봐주지 못한 내 부모님에 대한 서운함,

H의 아버지가 재단이사장과 친구라는 사실, 

교사가 학생에게, 학생이 다른 학생에게 폭력을 행사했음에도 처벌이 없었던 선례들, 

가해자들에게 처벌이 내려질지 확신할 수 없었던 불안감,

차후에 당할 보복, 

혼자서 해야 했던 증언,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더 캐묻지 않았던 선생님,

끝내 입을 열지 않고 교무실을 나서는 나를 보며 선생님이 짓던 안도의 표정, 


열일곱살의 여자애가 이 복합적인 감정과 처한 상황의 회오리 속에서 올바른 판단을 내린다는 것, 가능했을까. 청소년기의 아이들에게 마음을 털어놓도록 만드는 일은 간단하지가 않다. 보호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없을 때 아이들은 마음을 털어놓지 않는다. 해나도 그랬고, 나도 그랬다. 


자살하기 전, 해나는 학교 상담 교사를 찾아가 물었다. 그를 단죄할 수 있느냐고. 상담 교사는 마지막 끈을 쥐어보려고 온 해나에게 용기를 주는 일에 실패했다. 아니, 게을렀다. 밤새 우는 갓난 아이를 달래는 일상에 지쳐있어서였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망한 채 상담실을 나서는 해나를 한번 더 잡아주었더라면 어땠을까. 해나의 눈에 담긴 비관을 읽어보려고 했다면. 


아무 것도 증언하지 않고 교무실을 나왔던 열일곱 살의 나. 그날의 나와 화해하기 전 질문해 본다. 그날, 선생님이 한 번 더 물어봐 주었더라면 어땠을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가해자들을 단죄하고 나를 보호해주겠다고 약속해 주었더라면 말이다. 


선생님은 정말 내 턱에 든 멍과 피맺힌 입술 언저리를 보지 못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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