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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예진 Sep 06. 2018

자연, 꼭 벗 삼아 살아야 하나

토끼에게 지은 죄


외출에서 돌아와 차에서 내리는데 우측 집 남자가 잔디를 깎고 있었다. 동시에 좌측 집 남자도. 두 남자가 기계를 밀고 다니느라 여념이 없는 틈을 타 혹여 눈을 마주칠까 얼른 집안으로 들어왔다. 두 집 다 우리와 좋은 이웃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잡초가 번져나가고 있는 우리 집 잔디에 속이 편치는 않을 테니까.


아직까지는 잡초들이 경계선을 넘진 않았지만 무섭게 번지고 있는 기세로 보아 이웃집 마당으로 넘어가는 건 시간문제였다. 두 남자가 우리 집 쪽을 째려보고 있는 것 같아 뜨끔했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있다가 창으로 슬쩍 보니 잔디를 깎고 난 두 남자가 각자의 마당에 열렬한 기세로 뭔가를 뿌려대고 있었다. 제초제 아니면 잔디 강화제다.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실려 화학 비료 냄새가 훅 하고 들어온다.


잔디 좀 길러본 사람은 알거다. 깨끗하고 싱그러운 잔디를 유지하려면 철마다 얼마나 많은 잡초제거제와 잔디 강화제를 뿌려대야 하는지. 뿌린 후 한동안은 반려동물이나 아이들을 밖에 내보내지 말아야 할 정도로 독한 성분의 화학 물질로 이루어진 것들이다.


우리 집 잔디가 해를 바꿔가며 종류도 다양한 잡초들과 공생하게 된 이유가 딱히 환경 보호를 위해 화학 비료 사용을 제한했기 때문은 아니다. 게을러서다. 아니 정정. 우린 나름 부지런했지만 그게 자연의 속도를 못 따라 간 거라고 해야 겠다. 미국에서 집을 사서 살게 된 이후 잔디 가꾸기 및 잡초와의 싸움은 영원한 숙제가 됐다.


시즌이 되면 평균 일주일에 한 번은 해야 하는 잔디 깎기도 버거운데 물은 어찌나 자주 줘야 하는지 호스에 스프링클러를 끼워 자리를 바꿔가며 이리저리 옮겨 놓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닌 거다. 잡초는 땅이 조금이라도 말랐거나 비료, 제초제 뿌리는 간격을 조금이라도 넓혔을 때 여지없이 이곳저곳에서 고개를 내밀어 댄다.


해마다 우리 집 마당을 점령하는 잡초에는 유행도 있어서, 어떤 해에는 정조관념은 쌈 싸먹은 듯 씨를 날리는 민들레가 지천으로 피어나고, 어떤 해에는 잔디 밑동을 휘감으며 뻗어나가는 딸기 과 잡초가 활약한다. 최근 트렌드는? 토끼풀이었다. 이파리가 네 개인 토끼풀을 찾으면 행운이 온다고? 잡초 따위, 너님이나 실컷 가지세요!


최근 우리 집 잔디에 토끼풀이 무성했던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몇 해 전, 우리 집 둘째를 포함한 동네 아이들 몇이 우리 집과 한 집 건너인 이웃집 마당 창고 한쪽 귀퉁이 앞에 웅크리고 앉아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아이에게 연유를 물은 즉, 그 집 마당 한 구석에 토끼 둥지가 생겼는데 그 안에 ‘갓난아기’ 토끼들이 꼬물거리고 있다는 거였다.


동네 아이들은 어미 토끼가 먹이를 구하러 나간 사이 둥지를 들춰 아기 토끼들을 구경하고 있던 거였다. 그 후로 동네 아이들은 냉장고에서 당근 따위를 꺼내와 둥지에 넣어주기도 하며 나름 토끼들을 ‘길렀다.’ 그때까지만 해도 토끼를 귀여워하는 아이들의 동심이 귀여워 그러려니 했다.  


문제는 다음 해부터였다. 동네에 토끼들의 출몰이 눈에 띄게 잦아졌다. 원래 청설모는 있어도 토끼는 없던 동네였다. 그리고 또 그 다음 해에는 눈 닿는 곳 어딘가에는 꼭 토끼가 포착될 정도로 동네 곳곳에 토끼가 많이 살게 되었다. 어느덧 사방에 토끼 똥이 굴러다니는가 싶더니 언제나 그렇듯 유행하는 잡초의 직격탄을 피하는 재능은 없는 우리 집 마당에 토끼풀 트렌드가 상륙하게 된 것이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인데 토끼들은 안락하게 출산하고 육아를 할 수 있는 거주지를 찾게 되면 반드시 다시 찾아온다고. 서비스가 좋은 산후조리원이 입소문을 타는 것과 마찬가지로 토끼들 사이에서 우리 동네 아이들의 서비스가 알려진 모양이었다.


'이 동네에서 출산하고 아이들을 기르자고! 아무 것도 모르는 인간 얼라들이 가끔씩 당근도 줘. 하지만 세상에 공짜 점심이란 없다잖아! 갚아야지. 우린 그냥 우리의 변에 섞인 풀씨들을 마음껏 퍼뜨려 주자고. 나중에 풀 자라면 우리도 실컷 먹고.’


해서, 작년 봄부터 무서운 기세로 퍼져나가는 토끼풀과의 전쟁에 학을 뗀 참이었다. 그리고 겨울이 지나갔다.


올 봄 어느 날, 장을 보고 돌아온 참이었는데 잔디를 깎고 있었던 남편이 차에서 내리는 내 앞으로 와 우뚝 섰다. 난감한 얼굴에 손에는 비닐봉지 하나를 들고 있었다.


“어떡하지?”

“왜? 뭔데?”


무심코 비닐봉지 속을 들여다봤다가 나자빠질 뻔했다. 봉지 안에는 뭔지 모를 새끼 네댓 마리가 꼬물거리고 있었고, 그중 하나는 피를 흘리고 있었다.


“으악! 뭐, 뭐야?”


기겁을 하는 내게 들려준 남편의 이야기인 즉, 잔디를 깎다가 보니 집 벽과 마당 사이에 지푸라기와 털 같은 게 소복이 덮인 곳이 있더란다. 쥐구멍인가 싶어 기계를 밀고 지나가다가 발끝으로 지푸라기를 휙 걷었는데 토끼 둥지였다고. 뭉쳐서 웅크리고 있던 네 마리의 새끼 토끼 중 한 녀석이 남편의 발끝에 채여 굴러 나오면서 상처를 입은 거였다. 흑,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남편과 나는 딜레마에 빠졌다. 이미 다친 아이는 그렇다 치고(회생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나머지 아기 토끼들을 위해 둥지를 보존해주자니 우리 집은 촉망받는 토끼 서식지가 될 것이고, 그것은 곧 토끼풀과의 이차, 삼차 대전을 의미하는 거였다.


그렇다고 무자비하게 토끼 둥지를 제거해버리면 어미 토끼가 돌아와 절규할 것 같았다. 나도 자식 키우는 어미 아닌가. 하지만 토끼풀로 뒤덮일 우리 집 마당을 생각하면 둥지를 내버려 둘 일은 아니었다. 감성과 이성의 싸움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마당을 서성대다가 집 뒤편 한 지점을 찾아냈다. 우리 집 마당 뒤쪽은 숲과 면해 있는데 그 숲과 우리가 가꾸는 잔디의 경계 부분에 제법 큰 나무가 하나 있다. 거기로 토끼들을 옮겨놓자는 게 내가 제안한 대안이었다. 둥지가 우리 집 벽 밑에 붙어있는 것보다야 낫겠지 싶었다. 남편은 별로 탐탁지 않아 했지만 몰인정하다는 소리를 들을까 그랬는지 내가 하자는 대로 따랐다.


나무 밑동 오목한 부분의 땅을 나름 폭신하게 만든답시고 손 삽으로 파헤친 다음 원래 둥지에 있던 털과 지푸라기 뭉치를 가져와 깔았다. 새끼 토끼들을 내려놓고 그 위에 나머지 지푸라기 뭉치를 덮었다. 비록 위치는 바뀌었지만 원래의 둥지에서 이 정도 거리면 어미 토끼가 냄새로라도 새끼들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모든 과정을 ‘오바’의 화신인 둘째 아이에게 들키지 않고자 했으나, 냉정하게 대처하자는 남편과 아직 만나지도 못한 어미 토끼에 감정이입이 된 내가 옥신각신하는 바람에 눈치 채이고 말았다. 쪼르르 달려온 아이. 둥지를 걷어보더니 아기 토끼들이 배가 고플 것 같단다.


둥지 한 번 보고 엄마 한 번 보고를 반복하는 아이의 눈을 대면하고 있다가 집안으로 들어와 우유를 꺼냈다. 엄마 젖에 비해 너무 차가우려나 싶어 전자렌지에 좀 돌려 미지근하게 데우기까지 했다. 우유가 든 그릇과 숟가락을 들고 밖으로 나가니 남편이 혀를 찼다. 우유 좀 먹여보게 한 마리 집어 들어 잡고 있으라 요구하니까 안 그래도 못마땅해 하는 남편이 빈정거리기 시작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돼? 왜, 쥐도 키우지?”


토끼풀에 넌더리가 난 남편의 지론으론 야생 토끼도 우리한테 해만 입힌다는 점에서 쥐나 마찬가지라는 거였다. 남편과 나의 의견 차이는 차치하고라도 결과적으로 우유를 먹이는 건 바보짓이었다. 숟가락으로 입 속에 우유를 흘려 넣어주자 아기 토끼들은 꺄악 꺄악 비명을 질러댔다. 얼마나 용을 쓰며 자지러지던지 놀라서 들고 있던 숟가락을 떨어뜨릴 뻔했다. 소젖이 토끼들한테는 독약과 마찬가지인건가? 아이도 놀랐는지 얼른 집안으로 들어가 검색을 했다. 어미 잃은 야생 아기토끼 살리는 법. 잠시 후 아이가 검색 내용을 전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엄마! 우유는 안되고 전해질 음료를 먹여야 하는 거래!”


남편과 눈을 마주쳤다. 잠깐이었지만 전해질 음료를 사러갈 의지를 내 눈에서 엿본 남편은 인내심을 잃고 말았다. 토끼들을 펫으로 키울 것도 아니면서 쓸데없는 짓은 시작도 말라는 거였다. 게다가 곧 어미 토끼가 돌아와 젖을 줄 수도 있는데 웬 오바냐고. 맞긴 하다. 나는 사실 동물을 키워본 적도 없거니와 별로 키우고 싶어 하지도 않는 사람 아닌가.


비협조적인 남편의 태도를 핑계 삼았지만 나 역시 지속적으로 토끼들을 보살필 자신은 없었다. 못이기는 척 토끼들을 강제로 이전한 새 둥지에 내려놓고 지푸라기를 덮는데 두어 마리는 폴짝거리며 벌써 밖으로 튀어나가려 했다. 엄마 올 때까지 기어나가지 말라는 마음으로 도로 붙잡아 지푸라기 속에 집어넣어놓고 돌아섰다.


엄마 토끼가 돌아오긴 하려나? 혹시 엄마 토끼가 동네 고양이에게 사냥당한 건 아닐까. 종일 그쪽으로 신경이 갔다. 왠지 모를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 집안일을 하는 틈틈이 쳐다봤는데 어미 토끼가 돌아온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다음 날. 무심코 창밖을 내다봤다가 기겁을 하고 말았다. 문제의 나무 밑에 고양이 한 마리가 와있는 게 아닌가! 멜리사네 고양이인지 데니스네 고양이인지 이따금씩 어슬렁거리며 동네 마실을 다니는 이웃집 냥이인 것 같은데 녀석이 앞발로 토끼 둥지를 뒤지고 있었다. 괜히 둥지를 옮겨 아기 토끼들을 녀석에게 노출되도록 만든 게 나인 것 같아 가슴이 쿵 내려앉으며 죄책감이 가중됐다.


이쯤 되면 당장에 뛰어나가 고양이를 쫓아내야 마땅하겠지만 그러지도 못했다. 나는 개든 고양이든 다 무서우니까. 이미 늦었다는 생각에 포기해버린 때문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둥지를 뒤적거리는 고양이의 태도가 좀 이상했다. 저돌적으로 파헤치는 게 아니라 천천히 뒤적뒤적 거린다고 해야 할까. 이상하다. 있어야 할 것들이 없네, 하고 있는 것 같은.


어떻게 된 건가 궁금해서 창에 붙어선 채로 고양이 하는 양을 숨죽이고 지켜보는데 갑자기 고양이가 동작을 딱 멈췄다. 슬렁슬렁 지푸라기를 뒤적이던 앞발을 거두고 몸을 쫙 세워 어딘가를 쳐다보는 품새가 뭔가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고양이의 고개가 돌아간 쪽으로 내 시선도 따라갔다.


헉! 어찌 이런 일이! 내 집 뒷마당을 여유작작한 자세로 가로지르고 있는 한 마리의 여우! 언젠가부터 동네에 가끔씩 여우가 출물 한다더니 꼬리 끝에 검은 털이 달린 걸 보니 동네 사람들이 말한 그 여우인 것 같았다. 여봐란 듯 고양이 앞을 지나가고 있는 여우의 입에 물린 것이 있었으니, 바로 토끼였다. 보나마나 나무 밑 둥지에서 찾아냈을 바로 그…….


고양이는 허탈했을 것이고 나는 허망했다. 그래도 살려보려고 했건만. 하지만 자연의 이치란 그런 것 아니냐며 곧  나의 비정함을 합리화하곤 토끼들에 대한 죄책감을 떨어버리고자 했다. 어쩔 수 없었잖아.


헌데 그 이후, 계절이 초여름을 향해갈 무렵 아기 토끼들의 목숨까지 잃게 만들어가면서 사수하고자 했던 잔디가 또 엉망진창이 됐다. 새끼들을 잃은 어미의 저주였을까. 마당 곳곳에서 또 토끼 똥이 굴러다니는가 싶더니 이전 해와 마찬가지로 토끼풀 천지가 된 것이다.


이판사판 이렇게 된 거, 남편은 토끼풀 제거에 특화된 제초제를 사와 마당 곳곳에 대고 분노의 펌프질을 해댔다. 며칠 걸러 한 번씩 몇 주를 그러고 났더니 토끼풀들은 차차 말라죽어갔다. 아기 토끼들을 희생시키긴 했지만 성과를 봤으니 괜찮다 자위하며 우리 부부는 토끼풀 박멸을 뿌듯해했다. 결과적으로 올해는 잡초에 대해선 한 시름 놓아도 된거겠지 싶었다.  


그러나,


두어 달이 지난 지금 글 앞머리에 썼듯이 우리 집은 다시 잡초 천지다. 이번 것은 잔디랑 형제인 척 하는 크랩그래스. 맹렬한 기세로 뻗어나가 양 옆집 남자들을 긴장시키고 있는 바로 그 잡초. 한 해에 두 가지 트렌드가 번갈아 오다니! 잔디인 듯, 잔디 아닌, 잔디 같.지.는. 않.은. 너, 크랩그래스! 너무한 거 아니니?


잡초 덕에 얼룩덜룩 색감도 다양한 우리 집 잔디. 남편과 나란히 서서 마당을 보고 있다가 한마디 던져봤다. 저것도 나름 잔디 아닐까? 그러니까 이름에도 ‘그래스’가 붙었겠지. 걍 놔둘까? 차마 동의를 하지는 못하겠는지 남편은 잠자코 있었다. 하지만 남편의 안면에 구원받은 것 같은 표정이 떠올랐다고 느낀 건 나의 착각이었을까.


영원히 끝나지 않을 잡초와의 전쟁. 생래적 자연인이 아닌 우리 부부는 소진되고 있는 중이다. 이쯤 되고 보면 언젠가 공지영 작가의 산문집에서 읽었던 어린 시절의 집 이야기에 공감이 되고도 남는다. 화단이 있고, 흙을 밟을 수 있었던 그 집을 그리워하는 공 작가 마음 말고, 이후 그 마당을 시멘트로 '깨끗이' 바르고 흐뭇해 했다는 공 작가의 어머니 마음 말이다.


정말이지,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간다는 건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잡초 따위 그냥 잔디랑 함께 자라게 포기할까도 싶지만 법적 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 미국 이웃들이 우리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고 고소를 하지 않을까 겁이 나 그것도 내키는 대로 하지 못하는 처지.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은 됐고, 마당없는 집으로 이사갈까 진지하게 고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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