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할 기회는 꽤 있는데 여전히 어려운 와인.
책도 만화도, 인터넷에 널려 있는 카드뉴스도, 유튜브에서 쏟아지는 전문가들의 강의도 여전히 어렵던 내게 다시 한번 의욕을 불러 일으키는 기회가 왔다. 회사에서 제공하는 와인 인문학 강의. 그것도 내 사무실 바로 위층에서 열리는데다, 같은 회사 직원이라는 프리미엄으로 할인도 받게된 덕분에 와인 강의를 신청했다. 게다가 와인 시음 기회도 있다는 말에 혹했다.
강사는 두분이었다. 한분은 MBC 기자 출신인, 현재는 작가로 활동중인 손관승님, 또 한분은 와인 소믈리에 권기훈님. 한분은 문학작품과 역사 속의 와인과 그 인문학적 이야깃거리를, 다른 한분은 와인에 대한 상식과 지식을 알려주시는 강의라 그 조합이 꽤 흥미롭고 유익했다. 무엇보다 나같은 와알못도 이해할만한 수준의 눈높이로 진행됐다. 그래서 자신감이 마구 돋으려 한다. 맥주병이 수영교실 나간 첫날, 선생님 시키는 대로 키판 잡고 힘 빼고 엎드렸더니 몸이 물에 뜨는 경험을 한 느낌이랄까.
많은 ‘깨달음’ 중에도 나같은 와알못에게 팍 와닿은 이야기 하나를 공유하고 싶다.
바로 우리는 왜 와인을 마시는가 하는 것이다. 먼저 이 질문에 대해 와인 문화의 본류인 유럽 문화권에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할까. 그들에게는 ‘음식을 먹기 위해’라는 것이 답이다. 즉 일상의 문화, 삶을 영위하는 음식과 늘 함께하는, 누구나 식탁에서 편하게 즐기는 식품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절대적 원칙이나 법칙이랄게 없다. 자기 취향과 스타일대로 즐기면 된다.
반면 우리는 ‘와인을 마시기 위해’ 마신다는 것이다. 와인 그 자체가 목적이 되다보니 편하지 않고 어렵다. 맛있게 즐길만한 새로운 음식이 아니라 공부하고 익혀야 할 과제가 되어버린다. 복잡한 예법과 용어만으로도 사람을 주눅들게 만드는 다도같다고나 할까.
그래서인지 우리의 와인문화에는 과시와 허세가 많다. 그리고 나같은 와알못을 주눅들게 하는 부작용을 만들고 있다. 사실 카페마다 쏟아지는 온갖 새로운 커피음료에 대해 모른다고 마시는데 어려움을 겪는건 아니지 않은가. 면스플레인 즐기는 사람들처럼 냉면 상식이 없다고 해서 주눅드는 건 아니지 않나. 요즘 MZ세대들에게 발베니 위스키가 인기라는데 위스키 모른다고 교양이나 상식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듣는건 아니지 않나.
그런데 희한하게 와인은 그렇지 않다. 멘탈 강하고 자존감 높은 사람들이라면 ‘그까이꺼~ 그러거나 말거나’하고 당당할 수 있지만, 나름 소심하고 쫄보 기질 다분한 나같은 사람은 단언컨데 이런 문화의 피해자다!!
'풀바디'를 '풀밭'으로 들었다고, '생테밀리옹'을 '세인트 에밀리언'으로 읽었다고 쪽팔려야 했던 그런 경험들은 부지기수다.
나만 그런 줄 알았더니 명예와 부를 가진, 잘나가는 분들도 마찬가진가 보다. 삼성경제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한국 CEO의 70%가 와인 스트레스를 갖고 있다고 한다. 조사 내용을 세부적으로 살펴본 건 아니라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해외 비즈니스 파트너만 만나는 CEO라면 이런 스트레스는 좀 덜하지 않을까 싶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와인은 뭘까. 가장 비싼 와인이야 대략 정해져 있겠지만 가장 맛있는 와인은 좋아하는 사람들과 편하게 마시는 와인이다. 이것이 나, 와알못을 깨우친 이날의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