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애들 암만 거침없이 자기 표현한다지만 너무 매너가 없어”
같이 밥을 먹던 지인이 뭐가 생각났는지 갑자기 씩씩거렸다. 얼마전 회사 후배들에게 밥을 사주면서 아껴놓은 와인을 한 병 가져갔는데 그 자리에서 와인 가격을 확인하더라는 것이다.
“비비노(vivino)’라고 알아? 일종의 와인 스캐너인데 앱을 켜고 와인 라벨을 비추면 바로 그 와인에 대한 정보가 좌르륵 나와. 글로벌 이용자들의 평점이랑 가격도 원화로 환산되어서 같이 떠. 근데 어떤 녀석이 그러는거야. 선배 이거 가성비가 좋으네요. 평점이 꽤 괜찮은데 값은 2만7천원 정도라고. 선물받은건데 내가 가격을 어떻게 알아. 괜히 민망한거야. 싸구려 와인 가져와서 생색낸다고 오해하는 것 같고. 암튼 내 돈 쓰고 기분 잡치고, 두 번 다시 밥 사고 싶은 생각 없어.”
어지간히 열받았던지 이야기를 하고 나서도 한동안 그는 손바닥으로 부채질을 했다. 그러고보니 생각났다. 몇달 전 쯤인가 몇몇 지인들과 같이 갔던 와인바에서 12만원짜리 와인을 시켰다. 별 생각없이 안주로 나온 치즈를 집어 먹고 있는데 누군가가 스마트폰으로 와인병을 찍었다. 그러고는 말했다. “이거 2만원도 안하는데 겁나게 뻥튀기 했네.”
그때는 무슨 말인지 몰랐고 별로 신경 안썼는데 그게 비비노 앱이었나보다. 그 이후 몇차례 와인 병을 스캔하며 가격을 체크해 본 적이 있다. 대체로 시중에 파는 와인 가격보다는 앱에 나온 가격이 많이 쌌다. 우리나라에 수입되는 와인 가격이 대체로 비싼 편이라 하니 아마도 국제 평균 시장 가격 정도로 이해하면 되려나.
와인을 잘 모르니 와인 가격에 대한 합리적 판단이 잘 안된다. 메뉴판에 있는 것 중 2, 3만원대면 만만하게 먹을만하고 5, 6만원짜리면 내가 밥사는 자리에서 골라볼 만하고 8, 9만원 넘어가는건 대충 쳐다보지 않게 된다. 형편 좋은 누군가가 10만원 넘는 걸 시켜주면 감사하게 생각하며 먹는다. 비싸서 맛있는가보다 감탄하고, 혹은 내 입맛에 맞지 않음에도 비싼거니까 맛있게 느껴야 하나보다 생각한 적도 있다.
외신 등에서 로마네 콩티니 샤토 무통 로칠드니 하는 유명한 와인이 병당 몇천만원에 거래된다는 이야기는 주워들은 적이 있어서 그런지 와인은 다른 음료나 주류에 비해 월등히 비싸도 비쌀만한가보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비쌈의 기준은 얼마인가.
흔히 먹는 맥주나 소주, 막걸리의 가격대는 대충 빤하지만 와인은 정말 천차 만별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선 더 비싼 것 같고 그 기준도 모르겠다. 근처 와인숍만 가봐도 와인랙에 누워 있는 와인 가격대는 몇천원짜리부터 수십만원대에 이르는 것까지 다양하다. 나름 산지와 재료, 공정, 숙련도, 명성, 전통 등 값을 결정짓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값과 맛이 절대 비례하는건 아니지 않을까.
정말 비싼 와인이 맛있는건가. 맛있다고 하니 맛있는건가. 촌스러운 취향의 내 입맛을 갈고 닦아 맛있다고 느껴야 하나. 물론 누구의 입맛에나 맞는 맛있는 것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내 입맛에 맞고 내가 맛있게 느끼면 그뿐이다. 모든 음식, 모든 취향이 그럴거다. 하지만 우리가 대체로 남의 기준과 평가에 많이 매여 사는 분위기가 강한데다, 와인은 특히 우리에게 많이 익숙하지 않은 문화다보니 더더욱 외부의 시선에 얽매이게 되는 것 같다.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사람들도 많을테고.
한 모임에서 이탈리아산 와인 바롤로가 나오자 ‘우와’하며 탄성을 냈다. 설명인즉, ‘와인의 왕’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이탈리아 4대 와인이라는데, 다들 맛을 음미하더니 흡족해했다. 잔뜩 기대감을 갖고 향을 맡았다. 무거운 알콜 냄새같은 세고 강력하고 진한 것이 콧 속을 묵직하게 찌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정신이 살짝 아득해질만큼. 향에 지쳐서 그런지 몰라도 맛도 좀 위압적인 느낌이었다. 마치 단단하고 차가운 성벽 밖에 덩그러니 서 있는 느낌이랄까. 어떠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나를 거부하는 맛 같다”고 했더니 돌아오는 답은 대체로 이랬다. “맛있는데 이상하네. 이거 진짜 고급 와인인데”. 말인즉, ‘이 비싼 와인을 못 알아보는 촌스러운 입맛을 업그레이드시킬 필요가 있겠다’ 정도 아닐까.
일전에 소개한 와인 소믈리에 권기훈님의 강의는 그래서 특히 마음에 들었다.
와인을 즐길 때 다음의 두 가지를 반드시 명심하라는 것이었다. 먼저, 전문가의 시음 평가를 절대적인 양 듣고 믿지 말라는 것이다. 세계 양대 와인 평론가로 꼽히는 로버트 파커, 젠시스 로빈스. 이들의 평가는 실제로 와인 시장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데 같은 와인을 놓고도 한명은 100점, 다른 한명은 20점을 준 사례도 있다고 한다. 같은 와인을 마시고도 전혀 다른 시음후기를 남기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두번째는 맛과 향을 자신의 방식대로 편하게 설명하라는 것이다. 실제로 와인 업계에서, 혹은 와인 전문가들이나 애호가들 사이에 사용되는 특유의 용어와 표현들이 있다. 그런 것들이 와인을 어렵게 느끼게 만드는데, 굳이 그런 표현을 사용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참고 삼아 그분이 소믈리에 타임즈라는 매체에 기고한 글의 한 부분을 소개한다.
“과연 비싼 와인이 맛이 더 좋을까?
미국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안토니오 랑겔 박사팀의 연구가 있습니다. 와인의 가격이 마시는 사람의 만족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기 위해 랑겔 박사 연구팀은 세 종류의 카베르네 소비뇽 와인을 준비했습니다. 첫번째는 5달러짜리 와인 두병을 준비하여 각각 5달러와 45달러짜리라고 표시했고, 두번째는 90달러짜리 와인 두병에 각각 10달러와 90달러짜리 가격표를 붙였습니다. 세번째는 35달러짜리 와인을 한 병 준비하여 원래대로 표시했습니다. 연구팀은 스무명의 와인 애호가들에게 두 번에 걸쳐 다섯가지 와인을 시음하고 평가하게 했고, 이후 가격표를 모두 떼고 같은 과정을 반복했습니다.
결과는?
와인의 맛은 표시된 가격에 확연히 휘둘렸습니다. 애호가들은 같은 와인이라도 5달러일 때보다 45달러짜리 가격표가 붙어 있을 때 더 맛있다고 평가했고, 또 10달러일때보다 90달러라고 쓰여 있을 때 훨씬 좋아했습니다. 랑겔 교수팀은 기능적 뇌자기공명영상을 통해 와인 마실 때의 즐거움을 객관적으로 측정하였는데 비싼 가격표가 붙어 있는 와인을 시음할수록 우리 뇌에서 향기와 맛의 즐거움을 느끼는 안쪽 안와전두엽 피질의 활성화가 훨씬 두드러진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가격이 표시되어 있지 않은 와인을 마셨을 때의 반응은 전혀 달랐지요. 그때는 모든 와인을 엇비슷하게 평가했습니다. 즉 사람들은 와인의 맛을 음미하는 것이 아니라 와인의 가격을 음미한다는 것이 이 연구의 결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