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4일. 두번째 날이다. 이날은 홍콩섬 서쪽 셩완에 있는 건어물 시장 구경에 나섰다.
시장을 안내한 이는 홍콩 메리어트 호텔 광둥식 레스토랑 만호의 수석 셰프 제이슨 탕. 서른 다섯살이라는데 이미 그전에 미쉐린 스타를 받은... 첫눈에 봤을 때 배우 이연걸 리즈 시절 보는 줄 알았다.
건어물 시장은 몇블록을 차지한 채 꽤 넓은 지역에 걸쳐 있었다. 저 멀리서부터 입구에 뭔가를 잔뜩 매단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말린 생선도 있었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연처럼 생긴 무언가가 꽤 많았다. 풍등같기도 하고 둥글넓적한 원반같기도 한 모양에 누르스름한 것들은 생선부레라고 했다. 국물 요리할 때 걸쭉하고 깊은 맛을 내는 용도로 많이 사용하고 있는 재료인데 값이 꽤 비싼편이었다 거의 대부분 가게에 생선 부레가 걸려 있었다. 불도장에 들어가는 제비집도 볼 수 있었다. 포테이토칩이나 코코넛칩 같은 외관. 그냥 두면 도저히 뭔지 알아볼 수 없는 것인데 포장에 ‘Bird’s nest‘라고 되어 있다. 제비집은 흥부와 인연 깊은 제비의 집이 아니라 제비와 닮은 칼새라는 생명체가 해초등으로 지은 둥지인데 자신의 침으로 만들어서 굳힌 것이다. 이런 희귀한 재료들은 과거 중국 황제들의 밥상에 올라갔다. 물론 지금도 중식으로 차려지는 화려한 식탁에 올라가는 음식이다. 이런 재료들의 효능은 노화방지와 강장효과가 탁월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아무튼 불로장생을 향한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부레 역시 피부미용에 좋다고 한다. 홍콩사람들의 피부가 특별히 좋은가??? 하면 그부분은 딱히 신경써서 보지 않아 모르겠다. 아무튼 제이슨 탕 셰프는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약식동원, 즉 음식과 약은 같다는 그런 철학을 강조하고 있었고 실제 홍콩에선 재료를 고를 때 그런 부분을 많이 신경쓴다고 한다.
도마뱀이나 정체모를 이상한 육류를 말리거나 꼬치에 꿴 것들도 많았고 각양각색 버섯들도 구경할 수 있었다. 모양만으로 영험함을 드러내는 듯한 영지버섯, 몽당연필처럼 생긴 모렐버섯 등 흔히 볼 수 없는 버섯도 많았다. 운남성에서 재배하는 트러플도 있었다. 귀한 재료라 그런지 꽉꽉 싸놓았던데 향을 맡아볼 틈이 없이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싱가포르나 홍콩, 중국 등지에 있는 중국식당에서 특히 운남성 트러플을 많이 사용한다고 한다. 예전에 싱가포르 래플스의 중식당 이 바이 제레미 룽에 갔을 때도 운남성 트러플이 들어간 요리가 있었으나 하도 정신없이 이것저것 먹었던터라 기억이 안나는...
그 외에도 전복과 해삼말린 것이 특히 많이 눈에 띄었다. 그러고보니 웬만한 광둥요리에 전복이나 해삼이 꽤 많이 들어갔던 듯 하다. 우리나라 건어물 시장하면 주로 생선 말린거나 어포류, 오징어, 문어, 새우 말린 것들, 해조류 등이 주로 많이 보이는데 홍콩은 생선부레와 아구, 전복, 해삼이 비중으로는 가장 많은 듯하다. 그러고보니 우리가 자주 먹는 다시마나 미역, 김같은 해조류는 거의 못본 듯. 건어물 가격은 상당히 비쌌다.
시장을 둘러보고 난 뒤 제이슨 탕 셰프는 우리를 만호로 안내했다. 자신의 파라다이스라고 소개하며 주방을 공개했다. 음식을 만들기 위해 미리 3일 전부터 불려놓은 부레며 해삼, 전복 등을 보여주는데 건조한 것과 불려놓은 것의 차이가 어마어마했다. 하긴 백태로 메주를 만들 때도 불려놓은 콩이 두세배 부푸는것이 당연한데 말뭐.
주방 입구에는 엄청나게 큰 생선이 놓여 있었다. 성인 남자 키만한 저 물고기가 무언가 했더니 홍콩에서 자주 먹는 그루파라고 했다. 영어 스펠링이 Grouper 혹은 Garupa 라고 한다는데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능성어? 다금바리의 일종? 아무튼 그런 종류였다.
이날의 점심도 호화로운 광둥식 정찬이었다. 생선부레로 만든 수프, 달콤한 소스로 졸여낸 차슈 등 한입거리로 시작해 속을 채운 새끼 돼지 구이, 닭고기와 전복, 버섯, 해삼등을 연잎에 싸서 구워낸 파이, 대구살을 넣은 만두, 해삼으로 만든 페스트리 등이 차례로 나왔다. 디저트로 나온, 제비집을 얹은 아보카도 크림도 넘나 맛있었다. 나중에 홍콩에 가게 된다면 메리어트 호텔의 중식당 만호는 꼭 가보시길. ‘광둥요리란 이런 것’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저녁으로 예정된 곳은 지난해 아시아베스트 50 레스토랑 중 9위로 선정된 ‘Neighborhood’. 평소 같으면 저녁때까지 참고 있다가 가서 포식을 해야겠지만 정해진 코스만 따르면 다른 대중적인 음식을 맛볼 기회는 가질 수 없다. 그래서 저녁 식사 전 오후에 혼자 가보기로 한 곳이 뱀 스튜와 뱀 딤섬을 하는 곳이다. 뱀은 한국에선 음지의 혹은 굉장히 비정상적인 먹거리라는 느낌이 들지만 홍콩에선 제법 대중적인 보양식이었다. 특히 겨울철에 즐겨 먹는다고. 남녀노소 불문, 물론 개인적 호불호는 있겠지만. 이리저리 물어보고 검색해보니 꽤 유명한 뱀 스튜 전문점들이 있다. ‘Ser’라는 단어가 광둥어로 뱀을 뜻한다고 해서 찾아보니 이 이름이 들어간 곳이 꽤 있었다. 태틀러아시아나 타임아웃과 같은 라이프스타일 매거진에 소개된 곳들도 있고. 그중에서도 고루 평가가 좋은, 센트럴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근처에 있는 Ser wang fun을 찾아갔다. 저녁 장소가 센트럴에 있기도 해서인데. 암튼 센트럴이야 뭐 홍콩에서도 가장 번화한 중심지이자 관광객, 외국인들이 모이는 곳 아닌가. 노포의 느낌이 물씬 나는 곳에 들어서니 아직 저녁으론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두개의 테이블만 차 있었다. 난 혼자 왔으니, 게다가 저녁도 먹어야 하니 많이 먹을 수 없어서 뱀 스튜 작은 것 하나와 뱀 퍼프 페스트리를 시켰다. 페스트리 모양새는 베이커리에 파는 것과 비슷했다.
메뉴판에는 뱀 스튜 아닌 다른 메뉴들도 많았다. 드디어 음식이 나왔다. 옆 테이블을 흘끗 보니 나랑 비슷한 스튜를 시킨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뱀 스튜의 겉모습만 봤을 때는 불도장 같기도 하고 일반적인 스튜요리 같기도 하고 특징을 알 수 없었다. 질감은 류산슬이나 불도장같은 걸쭉한 느낌.
사발을 앞에 두고 잠시 머뭇했다. 이상한 냄새가 날까? 뭔가 끈적한 감촉이 느껴지는건가? 뱀 먹으면 몸에서 열이 많이 난다는데, 저녁자리도 가야하는데 옷 갈아 입을 상황이 발생하는 건 아닐까? 시골 어디선가 보양식으로 먹는 뱀닭은 닭의 먹이가 되는 뱀의 독성 때문에 닭 털이 홀라당 빠진다는데 나도 머리카락이 다 빠지는건가? 에이, 먹지 말고 그냥 갈까? 등등 1분도 안되는 그 짧은 시간에 뱀 스튜를 앞에 놓고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그래도 언제 또 먹어보겠다고. 예전에 중국 쓰촨지역에서 훠궈같은 매운 국물에 뱀고기를 샤브샤브처럼 먹는 식탁에 앉았던 적이 있는데 그때는 정말 여러가지 음식과 함께 스치듯이 한입 먹은 식이라 제대로 된 식감이나 느낌을 느끼지 못하고 우당탕탕 넘어갔었다.
그래 까짓거 먹어보자. 국물을 푹 떠서 입안에 넣었는데 큰 이질감 없이 괜찮았다. 여기에도 생선부레가 역시나 들어가 있었고 버섯과 야채가 섞여 있었다. 뱀 고기로 추정되는 허연 살점도 보였다. 장어같은 식감일까 했는데 의외로 닭고기보다 촉촉하고 쫄깃한 식감이었다. 이상한 냄새가 나지도, 역한 향채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기분탓일까. 반그릇 정도 비우고 나니 왠지 몸이 뜨끈해지는 느낌도 들었다. 뱀고기로 만든 딤섬도 한입 물었다. 버섯과 야채를 고기와 다져 섞은 거라 사실 말 안하면 그냥 딤섬이나 고로케로 생각해도 무방할 듯. 아무튼 두가지 뱀요리를 대충 비웠다. 스튜를 다 먹으면 저녁을 먹지 못할 것 같아 3분의 2정도 먹었다.
기분탓인가. 계속 몸이 후끈한 느낌이 들었다. 어디 가서 뛰기라도 해야 하나. 저녁 식사까지는 2시간 남짓 남았다.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끝까지 올라가보기로 했다. 내려올 때는 계단 대신 굽이굽이 돌아가는 도로를 따라 내려왔는데 생각보다 금방 중심부인 헐리우드로드까지 닿았다. 이곳저곳 골목길을 샅샅이 훑고나니 어느새 이마에 땀도 맺히는 듯.
저녁 장소 네이버후드는 장소며 외관이 힙지로 감성이었다. 주소만 갖고 찾아가기엔 좀 힘든. 건물 뒷편, 골목 구석으로 들어가야 나오는 곳에 있다. 힙한 곳으로 소문나서 그런지 찾아오는 손님들도 세련미가 넘치거나 힙스터같은 자유로움이 뿜뿜한 사람들이다. 얼떨결에 이 자리에 끼게 되어 다행이다. 자리를 잡고 근사한 요리가 나오기 시작하는데 컨디션이 살짝 다운되는 것 같았다. 일단 이상하게 졸음이 쏟아졌다. 저녁 8시 반인데. 내가 이렇게 잠이 쏟아질 시간은 아닌데. 운동량이 평소보다 많았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낮에 술을 마셨던 것도 아니고. 낯선 곳에 낯선 사람들과 함께 있으니 피곤할 법도 한데 이 정도 졸리지는 않다. 아마 원인을 찾자면 뱀탕? 아까 열이 훅 도는 것 같은 느낌적 느낌이 있었는데 그것의 영향인가.
그러고보니 프렌치, 이탈리안을 표방한 근사한 요리들이 계속 나오는데 배도 적당히 부른 상태였고 몸도 노곤노곤해서 큰 감흥을 느끼지는 못했다.(배가 좀만 덜 찼더라면...). 물론 감흥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최상의 컨디션은 아니었다는ㅠㅠ. 오너 셰프 데이비드 라이는 그날 그날 재료에 따라 메뉴를 바꿔서 낸다고 하는데 이날 차려냈던 요리들도 그날만을 위한 것이었다고. 그날의 재료, 그날의 감성으로 매일 다른 요리를 만들어내는 레스토랑은 듣기만 해도 이상적이고 근사하다. 자유로운 예술혼을 마음껏 불사르는, 그럼에도 손대는 것마다 마스터피스를 만들어내는 아티스트다. 게다가 요리란 여러 사람을 동시에 즉석에서 상대하고 만족시켜야 하는 지극히 극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작업이다. 정말 천재들만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다.
보통은 요즘 레스토랑에 가기전 뭐가 대표 메뉴인지 살펴보고 예측하게 마련인데 뭐가 나올지 알 수 없는, 설레고 기대되는 그런 레스토랑을 한번쯤 만나보는 것도 즐거운 경험이 되겠다. 하지만 이런 식당이 가까이 있더라도 나같은 인간은 자주 찾아가지는 못할 것 같다. 틈만나면 떡볶이, 탕수육, 홍어삼합, 돼지머리 편육 등 뭐가 됐던 구체적으로 먹고 싶은 것이 자주 생각나기 때문이다. 물론 모르는 맛에 환장하고 늘상 호기심천국이 되기는 하지만 그 빈도보다 먹고 싶은 음식 떠오르는 빈도가 더 잦아서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