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_테네시 윌리엄스
어쩐지 요즘에는 비극적인 이야기만 읽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이 작품 역시 그 비극의 바통을 이어받아 다음 이야기에 건넸고 말이다.
이 작품은 희곡이다.
작품의 시작은 몹시도, 대단히, 극적이다.
스텔라의 언니인 블랑시는 얼마간 동생의 집에 머물 요량으로 찾아온다. 그리고 오는 길에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묘지라는 전철로 갈아탄 다음, 극락이라는 곳에 내'린다. 그 극락에 동생 스텔라의 집이 있었다.
이 부분을 읽었을 때, 이런 생각을 했다.
"아~ 그래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로군!"
그런데 이 책을 다 읽은 다음에는 그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블랑시와 스텔라의 고향은 '벨 리브'라는 시골이다. 그곳에서는 제법 잘 살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제는 과거의 영광과 함께 벨 리브를 잃고 갈 곳이 없어 동생을 찾아올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비참한 블랑시.
벨 리브를 잃게 된 배경은 요약하자면 그들의 가족들이 욕망이라는 전차를 줄곧 내리 몰았기 때문이다.
욕망은 한 가족을 파멸시키고, 한 사람의 인생을 파멸에 가깝게 몰아세웠으며, 그 마지막을 장식할 화려한 파멸을 위해 묘지를 지나 극락이라는 이름의 지옥의 입구에 내려놓았던 거다.
이것이 시작하며 블랑시가 욕망이라는 전차를 언급한 이유가 아닌가 싶다.
낙원을 잃고 타락했는지, 타락했기에 낙원에서 쫓겨났는지 그 순서는 분명하지 않지만 결과는 이렇다.
타락한 블랑시.
블랑시의 모습은 마치 낙원이자 천국이었던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죽음이나 다름없는 세상으로 내몰렸던 아담과 하와와도 겹쳐 보인다.
블랑시는 욕망에서 묘지로 갈아탄 후 '극락'에 내렸다고 했지만, 그 극락이란 표현은 가혹한 역설이었다.
블랑시는 자신의 젊음이 다해 간다는 사실을 극구 감추려고 한다. 젊음이 끝난다는 것은 더 이상 욕망에 값을 치를 능력을 상실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리라. 현실을 외면하기 위해 술에 의지하고, 온갖 거짓말로 삶을 포장하는 일에 점점 더 열중하게 되는 것도 그러한 임박한 상실이 두려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랑시는 결코 악인은 아니었다. 다만 용기가 부족했으며, 현실을 부정하고, 거짓으로 두려움을 감추려 했던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한 번도 가해자의 자리에 선 적이 없는, 마지막까지 비참하게 무너지고, 부서지는 연약한 영혼의 소유자였던 거다.
이야기의 끝에서 반쯤, 어쩌면 거의 미쳐버린 블랑시를 병원으로 데려가기 위해 의사와 간호사가 찾아온다.
블랑시는 잠시 반항하고 거부하지만, 곧 받아들인다. 그러면서 의사에게 이렇게 말한다.
164쪽
블랑시 (의사의 팔에 바짝 붙어서) 당신이 누구든, 난 언제나 낯선 사람의 친절에 의지해 왔어요.
솔직히 이 한 문장을 만나기 전까지는 블랑시가 어떤 일을 겪었건 조금도 가련하게 여기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 문장을 본 후 생각이 달라졌다. 블랑시 역시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삶을 살아온 한 사람이었다. 스스로의 나약함과 연약함을 알고, 낯선 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며 그들의 친절을 바랐으리라. 하지만 과거나 지금이나 세상은 조금도 호락호락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선량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이용할 수 있을 만큼 이용한 후에 열차를 갈아타고 떠나버렸을 것이다. 여전히 혼자 살아갈 수 없는 블랑시 역시 자신을 찾아온 또 다른 열차에 올랐을 것이고 그것을 여섯 번이나 열여섯 번, 혹은 그 이상 거듭했을 것이다.
처음 블랑시가 스텔라를 찾아 전차에서 내릴 때의 표현을 모두 적으면 이렇다.
12쪽
블랑시 (약간 신경질적으로) 사람들이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가다가 묘지라는 전차로 갈아타서 여섯 블록이 지난 다음, 극락이라는 곳에서 내리라고 하더군요.
말도 안 되는 해석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내 생각은 이렇다.
블랑시가 탔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한 대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묘지라는 전차'로 갈아타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른다. 묘지라는 전차 역시 한 대라고 할 수는 없다. 여섯 블록을 지나는 동안 몇 번을 갈아탔을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실제 극에서는 어떻게 상연되었는지와 상관없이 '갈아탄다'는 것과 '지난다'는 것은 그런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블랑시는 한 순간에 망가지지도 무너지지도, 타락하거나 부서지지도 않았다. 무수한 전차에 오르고 내리며 삶이라는, 인생이라는 비용을 거듭 소모했기에 닳아지고, 잃어버렸을 것이다.
결코 길지 않은 이 비극은 우리 삶을 표상한다.
과거에 쓰고 상연된 희곡이지만 이 시대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
사람들은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기꺼이 삶과 인생을 비용으로 치른다. 때로는 치러야 할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낭비하기도 한다. 누가 블랑시에게 비난의 돌을 먼저 던질 수 있을까?
블랑시를 이용한 사람들, 욕보인 사람들, 비난하고 멸시한 사람들, 추방하고 내몰았던 사람들. 그들 모두가 공범자다.
이 순간에도 그 전차는 무수한 사람들을 싣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치어가며 파멸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 않을까.
우리는 저마다 낯 모르는 낯선 이들의 친절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