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 교향악_앙드레지드/펭귄클래식코리아
자신은 마음의 눈이 멀어 있으면서 육체의 눈이 먼 사람들에게 한 치 앞도 헤아리지 못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와 다르지 않은 사람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다. 나 역시 다르지 않다.
'나'가 목사로 부임해 있는 한 마을에서의 어느 겨울.
한 노파가 눈이 먼 손녀 하나를 남기고 죽는다. 목사는 거의 아무런 생각도 없이(실제로는 어떤 의도가 있었어도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소녀를 집으로 데려온다. 그 소녀를 본 아내는 '예상과는 달리' 지나치게 화를 내고(어쩌면 그 태도는 집안에 들어오려는 재앙을 예감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애써 아내를 달래며 다음 날을 기약한다. 이 소녀는 거의 교육받지 않은 상태였고, 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음에도 웅얼거리는 소리 외에는 내지 못한다. '나'는 목사로서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인도하는 사명을 수행하듯 소녀를 가르칠 것을 결심한다. 하지만 '나'는 거의 마지막까지 깨닫지 못한다. 자신이 그 소녀를 사랑하고 있음을, 그리고 그 사랑이 대단히 어그러지고 뒤틀려 있음을 말이다. '나'는 신을 중심으로 생각한다고 믿었으나 결국은 자기 자신, 지독한 자기애에 빠져 있던 것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그 자기애가 부른 절망적인 결과 앞에 쓰러지듯 무릎 꿇는다.
흔히 '적당한 자기애'는 필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적당한 자기애는 자신감이 되어 준다. 자신도 할 수 있고, 사랑받을 수 있으며, 사랑받고 있고, 사랑할 수 있다고 믿는 모든 것이 자기애를 근거로 한다. 비슷하게 느껴지는 말로 자존감이 있겠다. 자존감이 온전히 높은 사람은 믿음직스러워 보인다. 자존감이 지나치게 낮은 사람은 소심함을 넘어 비참해 보인다. 반대로 지나치게 높은 경우에는 오만하고 교만해 보인다.
자기애와 자존감의 학술적인 정의는 어떻든 둘은 무척 닮아 있다. 적당히는 필요하지만 많든 적든 지나치면 고통과 불행을 부른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 이야기 속 목사는 소녀를 대하는 동안 서서히 눈멀어 간다. 육체의 눈이 멀어간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을 바로 보지 못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가족들, 사람들이 모두 보고 있고 느끼고 있는 것을 목사만은 느끼지 못한다. 스스로를 신성한 과업을 수행하는 자, 순수한 선행을 베푸는 자, 사랑으로 곤란에 처한 자를 이끌어 주는 목자로 여긴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지나쳐서 애처로워 보이는 '사랑' 외의 무엇도 아니었다.
목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소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사랑을 못 본 척, 모른 척하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가족의 괴로움 역시 외면한다.
아무도 소녀의 이름을 몰랐기에 소녀는 목사의 딸이 부르는 대로 이름을 붙여 '제르트뤼드'라 불렀다. 소녀는 할머니와 사는 동안 아무런 교육도 받지 않았다. 지식은 물론 감정조차 제대로 의식하지 못했다. 그런 소녀였지만 목사의 지도를 따라 글자를 익히고 책을 읽고 피아노를 배우면서 서서히 인간의 마음에 눈뜨게 된다. 그리고 모든 소녀가 그런 것처럼 이 소녀 역시 사랑에 빠진다. 그 대상은 목사가 아니라 목사의 아들인 자크였다.
소녀는 눈멀었으므로 집안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목소리로 사람들이 웃는지 우는지는 알았다. 소녀가 사랑한 것은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모습이 어떤지 소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렇기에 사랑 역시 확인할 수 없다. 그런 그녀의 주위를 채우는 사람 가운데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사람이 목사였다. 그것은 목사의 열망이었음이 분명하다. 다른 사람들을 배제하고(그들이 자신보다 제르트뤼드를 이해하고 아껴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독차지하려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 더 멀리 떨어뜨린다. 아니다. 멀리 떨어뜨린 데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자신의 아들과의 거리를 멀리하기 위해서 말이다.
소녀는 목사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목사 역시 사랑한다고 말한다. 소녀는 눈이 보이지 않는다. 목사는 눈이 보인다. 소녀는 가족의 표정을 보지 못한다. 목사는 가족의 표정을 언제나 보고 있다.
소녀의 눈을 검사하고 간 의사 친구는 소녀의 눈이 수술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목사는 불안해한다. 그러나 소녀에게 세상을 보여주기로 한다. 수술은 성공했고, 소녀는 돌아왔지만 결말은 비참하다.
소녀는 비로소 가족의 표정을 보았다. 그 절망과 근심으로 가득한 표정이 소녀가 거의 처음 본 사람의 얼굴이었으리라. 세상은 상상보다 더 아름다웠으나 사람은, 인연은 엇갈리고 빗나가 비참해져 있었다.
소녀가 사랑한 사람은 자크였다.
목사가 사랑한 사람은 소녀였다.
목사는 자신만이 소녀를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다는 오만한 감정을 가슴에 품었다. 그것은 비극 외에 어떤 결말도 준비할 필요가 없는 외길을 닦는 일이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모두가 보는 것, 모두가 예상하고 있는 것,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을 '나'만 몰랐을까.
세상에 '오직 나만이'라는 가정은 없다.
"나만이 너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어!"
이런 생각은 오만이다.
그런 오만이 상대를 불행하게 만든다.
세상은 음악보다 아름답다. 그러나, 세상은 알 수 없는 것으로 가득하다.
눈을 돌리지 않도록, 눈을 감지 않도록 애써야만 한다.
모르는 것보다 더 위험한 것은 잘못 아는 것이다.
우리는 저마다 조금씩 눈멀어 있으면서 살아간다.
모든 것을 아는 존재는 '신'외에 아무도 없으며, 확신이라는 것조차 순간순간 변하고 또 흔들린다.
사랑도 좋고, 헌신도 아름답다. 그러나 사랑이나 헌신은 값이 없다. 대가를 기대해서도 요구해서도 안 된다.
그것은 사랑도 헌신도 아니다. 순수하지 않은 것은 아무리 많아도 순수한 것이 되지 못한다.
왜 '나', 목사는 자신의 가정, 아내, 아이들에 만족하지 못했을까.
99마리의 양보다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이 더 큰 기쁨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적인 면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냥 친한 99명보다 사랑하는 한 사람이 더 빛나고 사랑스러워 보이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길을 잃었다 돌아온 양은 무리 속에 다시 섞여야 한다. 그를 구분하는 순간, 그 한 마리의 양은 언제까지나 길 잃은 채로 방황할 수밖에 없게 된다. 오로지 목자의 손에만 이끌려 다녀야 하는 수동적인 존재가 되어 버린다.
선과 악은 인간이 분별할 수 있는 성질을 넘어선다.
어떤 선은 악이고, 어떤 악은 선이 되는 것이 신에게도 가능할까?
인간은 선이 악이 되고, 악이 선이 되는 흐름을 오가며 혼란스러워하는 존재다. 그런 인간 가운데 하나인 목사가 눈먼 소녀 제르트뤼드에게 가르친 것은 자신이 믿는 선 뿐이었다. 갑자기 알아버린 현실에 균형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당연한 결과다.
어쩌다 이야기가 여기까지 흘러왔는지.
인간은 모두 저마다 조금씩 눈멀어 살아간다.
사물도 현상도 저마다 다르게 보고 생각하고 판단한다.
절대적인 '나'는 인간의 세상에는 없다.
다른 사람에게 '나'를 강요하지 말자.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나'를 강요하는 것을 허락하지도 말자.
우리는 저마다의 우리로 살아가면 되는 것이 아닐까.
어떤 사람은 코끼리의 다리를, 어떤 사람은 코를, 어떤 사람은 귀를 쓰다듬으며 저마다의 진실을 말하며 살아가도 되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