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혹은 아이들의 사정

열네 살이 어때서

by 가가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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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남아 있는 열네 살의 풍경은 어딘가 우울하고 불안한 느낌이다.

아마도 유년기의 틀에서 벗어나 '어른'이 되어 간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거다.


'이유 있는 두려움'.

어른들은 자신들은 그런 적이 없는 것처럼 아이들의 두려움에서 이유를 빼앗아 버린다.

그러고는 반항을 하면 '이유 없는 반항'이라고 하고, 울기라도 하면 '이유 없는 눈물'이라고 한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린다.

달라진 위치와 달라진 공기를.

'청소년'들이 들이쉬는 공기는 '초등학생'이 들이쉬는 공기와 밀도가 다르다.

달콤한 것, 시큼한 것, 짭짤한 것, 씁쓸한 맛이 더 강해진다.

우유의 부드러움이나 고소함에서 멀어지고, 탄산의 자극적인 맛에 가까워진다.


이 모든 변화가 한 순간에 일어난다. 아무도 막을 올리거나 내리지 않았음에도, 한 순간에 모든 것이 달라진다.

변화는 두려움을 동반한다.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고, 낯설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개구리가 올챙이 적을 잊듯이 자신들의 두려움을 잊고 아이들을 몰아세우곤 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런 거다.


"그게 다 너를 위한 일이야."


너를 위한 일이라고 하지만 위함을 받아야 할 '너'는 점점 더 불안해지고, 더더욱 불행해진다. 차라리 '나'를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말아줬으면 하게 되는 거다. 그래서 아이들은 반항을 시작한다. 당연히 이유 있는 반항이 된다.


<열네 살이 어때서>는 중학교 1학년이 된 소녀 연주의 이야기다.

풋사랑으로 끝나는 첫사랑, 부모님의 이혼에도 꿋꿋하게 자신의 삶을 주장하는 친구의 이야기도 담겨 있다.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엄마는 자신의 딸은 더 잘 되기를 바라는 욕심을 품고 살아간다. 결국 기대는 잔소리가 되고, 종종 티격태격하기도 한다.


이야기는 연주가 경험하는 감정을 들여다보는 동시에, 선생님들이 내주는 숙제나 이야기를 통해 불안해하고 흔들리기 쉬운 열네 살, 아이들의 속 이야기를 들어준다.

어른들은 '다 너희들 잘 되라고 하는 얘기'라며 자꾸만 잔소리를 하고, 화를 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이들을 모르고, 이해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엇갈림일 뿐이다. 사실 정말 잘 되기를 바란다면, 잔소리하고 화를 낼 것이 아니라 격려하고, 공감하며,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만 한다.


간단한 것 같지만 아이들의 말에 귀 기울이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아직 '어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모순되게도 평소에는 그렇게 어리게 여기던 아이들이 뭔가 잘못을 저지르기라도 하면 '다 커서' 아직도 그럴 수 있느냐며 혼을 내기도 한다.

이럴 수가,

어리기도 하면서, 다 커 있는 나이.

그것이 열네 살이자, 청소년이다.


아주 짧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아이들의 이야기를 따라 읽다 보면 금세 읽힌다.

흥미로웠던 부분은 핵전쟁에 대비해 세계의 종자를 모아뒀다는 '스발바르'의 종자 저장소였다.

청소년 성장 소설에 어째서 종자 저장소가 등장한 걸까? 두 가지를 연결해서 보니 어쩐지 웃음이 났다.


스발바르의 종자들은 인류의 멸망 앞에 남겨질 희망이자 가능성이다.

그리고 청소년들은 가정과 우리 사회, 나아가 나라와 세계의 희망이자 가능성이다.

우리가 아이들을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이유를 하나만 이야기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아이들이 우리의 미래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이 없는 나라에 미래가 없다는 말은 이제 제법 흔하게 오가는 말이 됐다.

아이들이 없는 것과 아이들에게 희망이 없는 것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좋지 않은 걸까?

모르긴 몰라도 둘 다 그다지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우리에게는 아이들도, 희망도 모두 필요하다.


청소년 소설이라고 하는 것이 왜 따로 있어야 하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왜 청소년 소설이라고 하는지는 알게 되었다.

그야말로 청소년을 위한, 청소년의 이야기라 어쩐지 유지하면서도 아련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또 그 시간 속에서 해야 할 것들이 적지도 않다.

그러나 아이는 결국 자라서 어른이 된다.

이 이야기는 그 시간의 한 과정을 아주 조금 보여준다.

아이들의 이야기는 정형화될 수 없다. 어른들보다 더 복잡하고, 저마다 다른 사정이 아이들에게도 있기 때문이다.


자녀에게만 이런 책을 읽힐 게 아니다.

부모도 함께 읽어야만 한다. 서로 공감할 수도 있고, 이해를 맞춰볼 수 있는 기회도 늘어날 테니 말이다.

엄마의 열네 살, 아빠의 열네 살이 어땠는지 돌아보고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도 재밌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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