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까오량 가족_모옌
노벨 문학상 수상작품인 <열세 걸음>을 읽으면서 느꼈던 버거움을 지독하게 체감했다.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를 재밌게 읽고 난 후 만만하게 덤볐다가 그다지 크지 않은 코를 다쳤던 그때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이런 작품이 수십 년 전에 쓰인 게 천만다행이랄까?
<홍까오량 가족>의 '홍까오량'을 한자로 적으면 '紅高梁'이 된다. '붉은 수수'다. 붉은색에 어떤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생각하기를 '더러움이 섞이지 않은 순수함' 즉 잡종과 반대되는 개념인 순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했을 뿐이다.
이 작품의 일부는 1989년 장이머우 감독의 영화 <붉은 수수밭>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어렸을 때 얼핏 본 기억이 있는데, 높다란 수수밭을 달려가던 사람들이 총에 맞아 죽어가는 장면이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다.
<홍까오량 가족>은 일종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 시간의 변화와 서사의 규모가 크도 또 격렬해서 내용을 음미할 수 있는 여유를 자꾸만 빼앗기는 기분이 들었다. 만약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읽지 않았더라면, 간신히 줄거리만 기억하는 수준으로 읽기를 마쳤을 거였다.
헛 읽은 것이나 다름없이 되었을 거라는 이야기다.
헛 읽었다 스스로를 탓할 정도는 아니더라도 그렇게 잘 읽었다고 하기에는 한참 부족함을 느낀다. 왜냐하면 줄거리를 기억하는 수준에서 한두 문장을 더 건진 것뿐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화자인 '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일본군을 습격하러 나서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그들이 일본군을 맞으러 가는 길에는 온통 붉은 수수로 가득하다.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 가족들은 고량주를 만드는 일을 한다. 아니다. 마을 전체가, 씨족 전부가 거의 그랬다. 붉은 수수, 고량주는 그들의 식량이었으며, 만병통치의 약이었고, 영혼의 양식이었다.
'나'의 할아버지는 일본군 습격 과정에서 '렁'에게 배신당한다. 할아버지의 동료들, 가족들이 몰살당하고 있음에도 그들은 도움을 주지 않는다. 결국 '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만이 남아있을 때 그들은 나타났고, 잔당을 처리하고, 무기와 공을 가로채 간다. 할아버지는 복수를 다짐한다.
이렇게 하나의 원한이 생겨난다. 같은 민족임에도. 같은 적을 앞에 두고도 원한은 생겨나는 거였다.
당시 중국은 크게 세 조각으로 나뉘어 있었던 모양이다. 장제스의 국민당과 마오쩌둥의 공산당과 일본을 돕는 위군. 세 세력은 모두 중국인이면서 서로를 위해 싸웠다. 배신하고 연합하고, 다시 뒤통수 치기를 거듭하며 넓은 대륙을 붉은 피로 물들이기를 계속했다.
대의를 위해 사사로운 감정을 버린다는 건 예나 지금이나, 타국이나 우리나라에나 어려운 일인 모양이다.
이야기는 시간을 거스르기도 하고, 돌아오기도 하면서 계속된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했다가 아버지의 이야기를 했다가, 할머니의 이야기를 했다가, 외증조할머니의 이야기를 했다가. 마치 바람에 수수잎이 흔들리듯이 정신없이 이야기가 돌아간다.
모옌의 이야기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술적이고 몽환적이면서 환상적인 이야기도 몇 군데 등장한다. 열여덟 번 칼에 찔리고도 붉은여우의 영험으로 목숨을 건진 노인, 족제비 귀신에 씌어 죽은 후에도 발광을 계속했던 둘째 할머니, 죽은 지 2년이 지난 후 치러진 장례식을 위해 시체를 파내던 순간에 아버지가 봤다는 '눈부신 할머니의 모습'.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부터가 환상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모호함이 오히려 이야기의 신빙성을 높이는 기묘한 효과를 만든다.
할아버지에서 아버지, 나에 이르기까지 홍까오량 가족의 역사는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내려왔다. 그러나 이야기의 끝에서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오래 전의 그 순수한 수수가 아닌 '잡종의 수수', '나'가 원망해 마지않는 성숙하지 못한 것이었다. 붉은 수수의 빛깔을 잃고 푸르스름해진 수수는 그 눈을 완전히 뜨지도 못하고 영원히 절반쯤 감고 있는 형상이다. 결국 이 푸르스름한 수수는 순수한 '나'의 사상을 천천히, 그러나 완전히 독살해 간다. '나'의 갈망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다. 본래의 붉은색을 되찾아 검붉은 수수 이삭들이 하늘을 향해 소리를 질러대는 아름다운 경지는 다시 이 세상에 도래하지 못한다.
'나'가 보는 현재의 중국은 변질되고 더럽혀진 잡종의 것처럼 보였다. 홀로 순수한 채로는 잡종들 안에서 살아갈 수 없다. 시대는 흘렀고, 세계는 변했다. 그리고 변하지 않은 '나'는 홀로 침몰해 간다.
<홍까오량 가족>을 읽는 동안 내가 본 것은 작품의 배경이 된 시기의 한국의 모습이었다. 한국 역시 민족이 분열되어 서로의 이익을 좇으며 죽고, 죽이고, 괴롭히고, 괴롭힘 당하고 있었다. 순수함을 잃고 스스로 잡종의 길을 걸었으며, 그 길로 가는 까닭이 살아남기 위함이라고 자신들을 변호하고 있었다.
순수함을 지키기 위해 흘린 피는 바람에 흩어지고, 살아남은 잡종들이 한국을 움켜쥐었다. 여전히 순수함을 간직한 이들은 잡종이 내뿜는 독소를 이겨내지 못하고 죽거나 떠나갔다. <홍까오량 가족>의 '나'가 침몰한 것처럼 말이다.
홍까오량 가족은 중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에도 있고, 세계 곳곳에도 있다. 그들은 가족을 위해 싸우며, 삶의 터전을 위해 싸우고, 그들의 영혼의 순수함을 지키기 위해 투쟁을 계속한다. 그러나 자연은 순수한 것을 미워한다. 동종교배는 이종교배의 적응력을 따르지 못한다. 이종교배의 우수 인자 발생률을 따라가지 못한다. 누가 죽이지 않아도 스스로 죽어가게 된다. 그렇게 거의 모든 시대는 잡종의 시대로 귀결된다.
뭔가 아름다운 결론을 내리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아름다움보다 서글픔과 씁쓸함을 가득 안기고 끝난 이야기를 읽고 난 후에 무슨 아름다움이 태어나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더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