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이해한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위대한 개츠비_F. 스콧 피츠제럴드

by 가가책방
위대한 개츠비.JPG

일주일에 열 번, 많을 때는 열두 번쯤 당산철교를 건너 다닌다.

평소에는 출근과 퇴근을 위해, 때때로 약속이 있기에 건너는 거다. 그런 일상 가운데 며칠을 개츠비와 함께 다녔다. 어떤 날에는 이스트 에그의 초록빛 등대의 불빛을 조용히 응시하던 개츠비처럼 감상에 젖어 일렁이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또 다른 날에는 반짝이는 햇빛에 눈부셔하면서도 눈을 감거나 고개를 돌리지 않고 캄캄해져 가는 시야의 아득함을 음미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위대한 개츠비>와 함께한 일상이다. 내가 개츠비일 수는 없지만 적어도 공감하고, 이해하려 애쓰며 함께 하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는 걸 다시 실감한 순간의 연속이었다.


네 번을 넘게 읽으면서부터는 몇 번째인지 일일이 세거나 기억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기억하지 않는 이유는 이제는 식상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나름의 이해에 가까워지고 싶기 때문이다. 세 번을 읽을 때까지는 하루키를 의식했었다. 그가 <노르웨이의 숲>에서 밝힌 것처럼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이상 읽지 않고는 그의 친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 번이나 읽을 것도 없이 두 번째 읽었을 때 이미 개츠비는 위대해져 있었다. 읽을 때마다 그가 위대한 까닭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그의 위대함은 조금도 훼손되지 않고 점점 단단해지고 굳어져서 명백한 현실이 되어 마음에 자리를 잡아 버렸다.


개츠비는 꽉 막힌 사람이다. 그렇게 꽉 막힌 사람이 그토록 짧은 시간 동안에 그만큼의 돈을 벌 수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다. 타인에게 이해를 강요하고, 자신의 이상을 위협하듯 들이대는 자기밖에 모르는 답답이다.

이것이 처음 개츠비를 만났던 때의 인상이었다. 개츠비가 위대하다니?

"삶은 계란이 병아리가 될 거라는 걸 믿겠다."는 식으로 비웃었다.


두 번째 읽었을 때, 그의 내면에서 대립하고 있는 두려움과 기대의 그림자를 발견했다. 그 두려움은 너무나도 커서 개츠비의 온 존재를 삼킬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하나의 목표이자 목적이 있었다. 돌아가는 것, 5년 전의 그날로 돌아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데이지에게, 세상에게 증명하고 싶었던 거다. 그 목적을 위해 개츠비는 수단이나 방법을 가리지 않고 쓸 수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해 돈을 모았다. 그를 움직이는 것은 내면 깊은 곳에서 불타오르는 열망이었다. 사랑으로, 모든 것이 완벽했던 그 날로 돌아가려는 열망 말이다.


세 번쯤 읽으면서 화자인 '닉 캐러웨이'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왜 그가 개츠비가 죽기 전에 "당신은 그 빌어먹을 녀석들 전부를 다 합친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했던 것을 다행스럽게 여겼는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개츠비의 위대함, 그것은 속물근성에 찌들어 있는, 순수한 열망이란 것을 오래전에 내던진 사람들 모두를 합친 것보다 가치 있었다. 그렇기에 개츠비는 위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 다시 읽을 때마다 개츠비가 보였다가, 닉이 보였다가, 톰이 보였다가, 데이지가 보였다가 윌슨이 보이고, 머틀이 눈에 들어왔으며, 조던 베이커가 어른 거렸다.

영화 '위대한 개츠비'를 볼 때는 소설 속 장면들과 맞춰보는 것이 너무 즐거웠다. 그래서 영화를 세 번이나 보고 말았다. 서성거리는 개츠비, 당황한 개츠비, 거짓말을 어색하게 무마시키는 개츠비 등등 마치 소설 속 개츠비가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아 놀라기도 했다.


톰 뷰캐넌이 닉 캐러웨이를 오랜만에 만나며 끌어안을 때 한 말, "셰익스피어~!"를 후렴처럼 달고 다니기도 했다.

그렇다.

나는 개츠비에 빠져 있었다.


이번에 읽을 때는 다른 부분에서 감동을 느끼고 눈물이 날 뻔한 일이 있었다.

처음 몇 페이지를 읽던 때였다. 번역본임에도 그 문장이 너무나 아름다워 감동하고 말았다. 왜 이제야 이런 느낌을 받았는가 하는 생각에 아쉬움도 느꼈다.

부족한 영어 공부를 보충해 원서로 읽어보고자 하는 열망이 솟는 것도 느꼈다. 그것은 하나하나가 모두 묘하고 또 신기한 경험이었다.


영화의 영상보다 더 많은 것을 보게 만드는 글이라니.

그런 것이 실제로 존재하다니.

그저 감탄할 밖에.


<위대한 개츠비>는 두 말할 것도 없이 비극이다.

자신이 몇 년이고 매달려 온 희망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목격하고 그 충격을 간신히 이겨낸 다음 순간.

이제는 과거로 흘려보내고, 젊음의 시간을 사로잡았던 초록의 불빛을 영원히 꺼버리려던 때에 그 생명의 불꽃이 길을 잃은 폭력에 의해 꺼져버리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괴로움까지 느끼게 했다.


속된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순수함을 품고 홀로 죽어가는 위대함.

조문객 없는 초라한 장례식이 왕과 황후의 화려한 결혼식보다 장엄하게 느껴졌던 것은 그의 위대함이 함께 묻혔기 때문일 것이다.


개츠비의 위대함을 온전히 알게 되었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오독을 즐기는 평소의 습관이 작가가 그리려던 개츠비의 모습과는 다른 상상의 인물을 만들어 낸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개츠비의 위대함은 방해받지 않는다.


이해시키기가 너무나 어렵다며 눈물 흘리던 개츠비의 모습이 지금도 눈 앞에 떠오르는 듯하다.

세상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모두 끝났다고 이야기한다. 그 모든 것이 붙잡을 수 없는 신기루의 불빛 같은 것이라고 말이다.

개츠비의 바람처럼 모든 것이 없었던 것처럼, 시간이 지나지 않은 것처럼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개츠비의 내면을 들여다보지도, 개츠비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도 않았다.


영혼을 걸고 애쓰지 않고 다른 영혼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개츠비는 영혼을 걸었다. 모든 것을 다 걸고도 모자라 자신에게 마지막 남은 영혼까지 아낌없이 꺼내 올려놓았던 거다.

자신이 믿고, 사랑했던 과거의 자신을 위해 지금의 모든 것을 던질 수 있는가?

두려움 망설임과 싸우면서도 도망치거나 기절하지 않고 맞설 수 있는가?


세상을 이해시키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

유난히 개츠비가 그리워지는 밤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