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악에 받쳐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_레프 톨스토이

by 가가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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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누군가 이렇게 물었다고 생각해보자.

"모든 죽음은 쓸쓸한 겁니까?"

쉽고 간단히 이 물음에 답하기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애초에 죽음 자체가 갖는 쓸쓸함을 덜어내고 이 물음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지막은 어떠해야 하는가?

더 나은 죽음이란 무엇인가? 애초에 죽음에 '더 나은' 결말이 있기는 한 걸까?

친했던 지인들, 가족들, 자신을 존경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맞는 죽음이 덜 고통스러울까?


아직 죽어보지 않아 이렇다 저렇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더 나은 죽음이라거나 덜 고통스러운 죽음은 기대하기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모든 죽음은 결국 혼자만의 투쟁이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지만 적어도 탄생의 순간에는 어머니가 함께 한다. 그러나 죽음은 어떤가?


사람들은 누구나 태어나본 경험을 갖고 있다. 그러나 죽어본 경험을 가진 살아있는 사람은 없다. 이미 그들은 모두 죽어버렸으므로.

미지의 영역. 죽음을 알지 못하기에 사람은 더 고통스러워진다. 고통보다 불안이 더 큰 괴로움이 된다. 불안의 뒤에는 삶과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미움이 가득 차고 넘친다. 사람들은 아주 기본적인 삼단 논법조차 잊고 산다. 마치 죽음은 나의 것이 아닌 것처럼, 오로지 빛나는 삶 만이 자신을 기다리는 것처럼.


키제베터의 유명한 삼단 논리를 우리 역시 학교에서 배운다. 그 논리는 단순하다.

"줄리우스 카이사르는 인간이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고로 카이사르도 죽는다."

이 논리를 피해갈 수 있는 '인간'은 없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이반 일리치는 법원 판사다. 하늘의 도우심인지 더 많은 월급을 받는 좋은 자리가 생기자 마치 삶을 다시 시작하기라도 할 것처럼 집을 구하고 꾸미기 시작한다. 그러나 행복은 혼자 오지 않는 법이다. 아주 사소한 부딪힘으로 이반 일리치 안에 숨겨져 있던 죽음이 깨어난다.

건강한 편이었던 이반 일리치는 종종 느껴지는 통증을 무시한다. 그러다 이따금 통증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커지자 병원을 찾는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죽음이 이반 일리치의 육체를 완전히 장악한 다음이었다. 이제 그 생기 넘치던 이반 일리치는 죽음에 사로잡힌 시한부 인생으로 전락한다.

이반 일리치는 죽음을 인식한 다음 순간부터 불안에 떨기 시작한다. 죽음은 나의 것이 아닌 줄 알고 즐겨왔던 그가 비로소 자신의 모든 삶을 돌아보며 온갖 의문에 시달리며 좌절하는 것도 이즈음이다. 무엇보다 그를 힘들게 한 것은 사람들의 태도다. 마치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는 것 같은 직장 동료들의 눈과 남편의 죽음보다 극장에 가지 못하게 된 것을 더 애통해하는 부인과 만족스럽지 않은 딸의 모습까지. 그 모든 것이 그의 죽음을 재촉하는 것처럼 두려움이라는 강박에 시달리며, 모든 생명과 젊음과 활기를 미워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러나 단 한 사람, 그가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하인 게라심이다. 어쩐지 이반 일리치는 그의 활기, 젊음, 솔직함만은 미워하지 않는다. 마치 그만은 자신을 진심으로 이해고 있다고 믿는 것처럼.

죽음이 기정사실로 굳혀진 이후에도 이반 일리치는 여전히 희망을 찾아다닌다. 여러 의사를 만나고, 온갖 치료 방법을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모를 일이지만 아마 나 역시 죽음이 들이닥친다면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죽음은, 죽음이라는 단어는 정신을 혼미하게 한다.

수백만 타인의 죽음보다 단 하나, 나의 죽음이 내게는 더 중요하기 때문에.


조금 다른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현대의 의학은 수술과 항암치료라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운이 좋다면 완쾌하여 새로운 삶을 얻은 것처럼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시기의 문제다.

삶이란 무엇인가?

숨을 쉬고, 눈을 뜨고, 음식을 먹고, 배변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삶인가? 물리적, 생물학적인 의미에서는 분명 살아있는 것이고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삶이란 그렇게 단순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사람들과 교감하고, 하고자 하는 일을 하며, 가고자 하는 곳에 가고, 먹고 싶은 것을 '맛있게' 먹고, 익숙하고 편안한 곳에서 잠들고 눈을 뜨는 모든 것이 삶을 이루는 것이다. 무균 상태의 병실에서 유동식 혹은 절제된 식단을 받아먹고, '안정'을 위해 과도한 흥분이나 운동은 '금지'되며,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는 한 만날 수도 없이 마치 '죽음이라는 죄'를 지은 죄수처럼 갇혀 지내는 것은 삶이라고 할 수 없다.


훈수 두는 꼴이 되겠지만 이반 일리치는 확실한 죽음을 받아들이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그토록 자신이 원하던 위안을 구했어야 했다. 불안하고 초조하게 좌절하고 절망한 모습만 보일 것이 아니라, 조금은 겸허하고 담담해질 수 있어야 했다. 그랬다면 죽음 직전까지의 쓸쓸함이나 소외감은 덜어낼 수 있었으리라.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보며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하기는 했지만, '만약 내게 죽음이 닥친다면?' 나 역시 그리 냉정하게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인간이기에. 그러나 바라는 바는 있다. 앞서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했던 대로 폭력적인 죽음이라며 두려워하고 거부하기보다 필연적인 과정이라고 받아들이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남의 이야기에 대해, 타인의 사정에 관해 얼마나 냉정하고 또 무관심한가?

이반 일리치가 죽음을 받아들여야 했다면 다른 사람들은 그의 불안을 이해하고 위로했어야 마땅하다. 그들에게도 최후의 날은 찾아올 것이고, 지금 이반 일리치가 느끼는 것을 그들도 느끼고, 그가 바라는 것을 그들 역시 바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대한 태도가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나 자신이 죽음보다 삶에 더 가깝다는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니 어쩐지 부끄러워진다. 진심 어린 애도를 보내지 못하는 사람은 진심이 담긴 애도를 받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타인의 고통, 곤경, 죽음을 보며 나의 고통, 곤경, 죽음을 떠올린다. 그러면서 조금 더 겸허해지고 또 겸손해질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누구도 삶을 두고 타인과 경쟁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은 이기고 쓰러뜨려야 할 적이 아니다. 우리는 동일한 운명을 공유하는 동반자. 악에 받혀 괴로움을 더하는 데 낭비하기에는 삶이라는 한정된 시간이 너무나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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