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격_레프 톨스토이
바야흐로 '용기의 전성시대'다.
뭐든 용기를 갖는다면 헤쳐나갈 수 있다고 말하는 시대.
베스트셀러라면 빼놓아서는 안 되는 주제.
그러나 언제나 그런 식이다.
가장 흔해 보이는 것이 무엇보다 귀한 법이다.
책에서, 티브이에서, 사람들이 용기를 말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용기가 없거나, 용기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진정 용기 있는 이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나는 용기가 있다."
웃기는 이야기다. 그 누구보다 겁 많은 이들이 약해보이기 싫고, 타인에게 얕보이는 것이 '두려워' 용기를 부르짖는다. 그것은 차라리 절규 혹은 비명에 가깝다. 조금도 아름답지 않다.
<습격>은 펭귄클래식판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담긴 단편 소설이다. 전장을 배경으로 오랜 시간 전장을 다니면서도 살아남은 한 대위와 새로 부임한 신임 장교의 모습이 극적인 대비를 이루고 있는 작품이다. 전장에서 뼈가 굵은 대위 역시 한 때는 신임 장교였다. 젊었고, 용기 있다고 믿었으며, 국가와 민족을 위해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가 빨리, 속히 찾아오기를 바라고 또 바랐을 것이다. 그런 기회가 좀처럼 찾아오지 않을 때는 마중이라도 나갔을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에는 그렇게 공에 사로잡혀있던 그를 일깨우는 충격적인 사건 혹은 경험을 했을 것이다.
플라톤은 용기를 이렇게 정의 내렸다고 한다.
"용기란 두려워해야 할 대상과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대상을 아는 것"
대위는 용기에 대한 플라톤의 정의를 배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중함과 현명함이 경험과 만나면서 비슷한 사실을 깨달았던 거다. 그때까지 살아남았던 것은 순전히 운이 좋아서였다. 결코 용기가 그를 살려준 것은 아니었다.
대위에 비해 신임 장교는 운이 나빴다. 첫 출전, 첫 전투에서 그는 용감하게 출전했고 총에 맞아 죽음을 기다리는 신세로 전락한다. 그토록 아름다운 젊음, 날쌔게 전장의 여기저기를 누비던 용기가 무참히 부서지는 비극이 찾아온 것이다. 이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용기가 부족해서였는가?
운이 나빠서였는가?
그 어느 것도 아닐 수 있으며, 그 모든 것이 원인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지 그 젊은 장교는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용기가 미덕으로 추앙되는 시대라지만 그 용기에는 아주 많은 것이 필요하다. 단지 용기만을 따로 떼어놓고 '이것이 용기입니다'라고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용기는 결코 무모하거나 막연하지 않다. 종종하는 말이지만 '무모한 용기'는 없다. 무모하다는 표현의 뒤에는 '객기' 정도의 표현이 오는 것이 적당하다.
무수한 생명을 빼앗고 뺏기는 쟁탈전, 습격전의 진상은 더 비극적이다.
그 행위, 전쟁 자체에는 아무런 의미도 영광도 없었다.
그저 형식적으로 '전쟁을 계속하기 위한 전쟁'을 하고 있던 거였다.
여기에 어떤 영광이 있고, 숭고한 희생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저 흩어진 생명만이 가련하고 또 서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