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죽음_레프 톨스토이
무척 짧은 이야기다.
제목, <세 죽음>.
톨스토이는 이 작품을 통해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말 그런 걸까?
이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지막 문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높은 곳에서는 물기를 한껏 머금은 나뭇잎들이 서로에게 기쁨과 평안을 속삭였고, 살아 있는 나무의 가지들은 죽어 땅바닥에 누워 있는 나무를 굽어보며 천천히, 그리고 장엄하게 몸을 흔들었다.
'장엄하게 몸을 흔들었다'는 표현은 마치 살아있는 나무들이 죽은 나무를 애도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진실은 그 너머에 있다. 그것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높은 곳에 있는 나뭇잎들은 '기쁨과 평안을 속삭'인다. 이 나무들은 죽은 나무를 애도하는 것도, 자신이 죽어 누워 있을 수도 있었다는 걸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뿌리를 뻗고 가치를 치는데 방해가 됐던 옆의 나무가 사라지면서 생겨난 '가능성' 혹은 '기대'에 몸을 떨고 있는 것이다.
살아 있는 자들, 살아남은 자들은 죽은 자를 오래도록 기억하지 않는다. 죽음조차 익숙해지다 잊힌다. 자신 역시 같은 길을 가게 될 것이라는 '진실'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모호하고 막연한 것이다. 분명한 것은 오직 하나, 지금이 기회라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는 세 가지 죽음이 등장한다.
하나는 부유하고 젊은 여성의 죽음이다.
둘은 늙고 병들었으며 가난하기까지 한 마부의 죽음이다.
셋은 이른 아침 도끼에 희생된 한 나무의 죽음이다.
어디에나, 언제나 있었을 이 평범한 별개의 죽음들을 가지고 톨스토이는 완벽한 하나의 고리를 만들어 낸다. 대문호답다는 말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서로 무관해 보이는 세 죽음은 사실 밀접한 관계가 있다. '남태평양의 한 마리 나비의 날갯짓이 북아메리카에 태풍을 부른다'는 식의 이야기, '나비 효과'에 대해 들어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이 세 죽음은 무관해 보이지만 필연적인 나비 효과 속에서 일어난 죽음들이었다.
젊은 귀부인은 폐병에 걸려 위독한 상태다. 그러나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좋지 않은 도로 상태에도 불구하고 여행길에 올랐다. 급한 것, 간절한 것은 이 여성뿐이다. 마부도, 남편도, 심지어 의사도 이 여행이 계속될 거라고 믿지 않는다. 이 마차를 수행하는 마부 가운데는 세료가라는 어린 마부도 있었다. 그의 부츠는 헤지고 닳아서 엉망인 상태다. 그래서 그는 병들어 죽어가는 늙은 마부를 찾아가 부츠를 받아온다. 대신 늙은 마부는 자신의 무덤에 묘비를 세워주기를 부탁한다. 부츠 값 대신으로 말이다.
부츠를 건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늙은 마부는 죽는다. 한 달 정도 후 젊은 귀부인도 죽는다. 세료가는 여전히 늙은 마부의 묘에 비석을 세우지 않았다. 그러자 마부 대기소의 여자가 타박을 한다. '벌 받는다'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묘비를 세우지 않을 거라면 십자가라도 세우라고 다그친다. 결국 다음날 세료가는 도끼를 메고 숲으로 간다. 한 그루의 나무가 쓰러지고, 이야기는 끝이 난다.
젊은 귀부인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사신처럼 세료가는 새 부츠를 신고 마차를 몬다. 늙은 마부는 죽고, 그의 봉긋한 무덤 위에는 풀이 자라기 시작한다. 늙은 마부를 애도하기 위해 한 나무가 죽는다.
젊은 귀부인의 남편은 더 이상 병든 아내에 대한 죄의식이나 죄책감 없이 자신의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세료가는 새 부츠를 신고, 여기에서 저기로 자유롭게 오고 갈 것이다. 남아 있는 나무들은 한껏 가지를 펴고 자라날 것이다.
삶과 죽음은 놀랍도록 가까이 있어서 좀처럼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나치게 된다. 그러나 죽음은 가난하거나 부유하거나, 귀하거나 천하거나, 젊거나 나이 들었거나, 건강하거나 병들었거나를 구분하지 않는다. 귀부인은 젊었지만 병들어 죽었으며, 나무는 건강했지만 죽어 넘어졌다. 젊고 건강한 세료가라고 하지만 어느 날 마차의 바퀴에 깔려 죽을지도 모를 일이다.
세 죽음은 죽음에 필연적인 의미가 없음을 이야기한다. 죽음이라는 결말 자체는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한다. 의미 있는 것은 오직 남겨진 삶뿐이라는 거다. 그러나 이것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와는 별개의 문제다. 죽기 전까지는 삶의 영역에 있는 것이기에 아직 죽음이 갖는 무자비한 무의미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두려워하면서, 기뻐한다.
그것이 세 죽음이 갖는 의미가 아닐까?
두려움으로 떨기도 하지만, 기쁨으로 떨리기도 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