낳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자녀가 부모에게 해서는 안 되는 말

by 가가책방

결론부터 이야기하고 시작해야겠다.

부모가 자녀에게 해서는 안 되는 말이 있다.

그리고, 자녀가 부모에게 해서는 안 되는 말이 있다.


부모는 자녀에게 "너를 낳는 게 아니었어."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농담으로라도, 아니 농담으로도 해서도, 할 수도 없는 말이 그것이다.

자녀는 부모에게 "나를 왜 낳으셨어요?"와 같은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이후의 삶이 고단하고 힘들더라도 그래서는 안 된다.


자녀의 잘못이나 부모의 잘못은 묻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며, 나누어야 하는 문제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태어났거나, 낳았다는 것, 그것 자체는 저주가 되어서는 안 된다.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를 낳는다는 건 무책임한 것일 수도 있고, 원망을 듣게 되더라도 누구를 탓할 수 없는 문제인 것은 분명하지만, 한 생명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 그것은 언제나 축복이어야만 한다.


이 이야기가 허황된 이상, 혹은 실현 불가능한 가공의 꿈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현실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라며 다른 견해를 제시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꿈같은 이야기의 어디가 나쁜가?


자신이 원해서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지금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꿈 하나쯤 꾸어도 좋지 않겠는가 말이다.


철듦.

스스로 말하기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철이 일찍 든 편이다.

요즘 아이들은 워낙 영특하다고 하니 지금은 그렇지도 않겠지만 말이다.

열 살 무렵에는 세상에는 평판이라는 것이 있고, 어른들에게는 체면이 무척 중요하며, 주변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욕구와 욕망은 그 한계가 분명하며, 선을 넘으려고 하면 어떤 형태도른 제재가 따른다는 것도 '이해'했다.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느낀 것은 나를 지배하는 것이 인정의 욕구가 아닌 부채감이라는 사실이었다.


부채감, 그것은 무엇인가 빚지고 있다는 기분, 신세 지고 있다는 느낌을 이르는 말이다.

그런 느낌이 어떤 계기로, 왜 시작됐는지는 모르지만 흔히 사람을 움직인다는 '인정 욕구'와는 명백하게 다른 더는 민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강박에 가까운 자기 절제와 자제가 몸에 배기 시작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 시기의 모습은 철이 들었다기보다는 미련하고 고집스럽게 거절을 반복하던 시기였다. 철이 일찍 든 것이 아니라 사춘기가 빨랐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나'라는 세계를 중심으로 사람들과 세계를 해석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한 셈이니 말이다.


그것이 어떤 것이었든 '부채감'은 무수한 충동과 욕구를 억누르는 누름돌이 됐다.

언제나 성실하고 모범적인, 상장에 적히는 표현으로 '품행이 방정한 학생'이 바로 나였다. 이렇다 할 싸움도 하지 못했다. 안 한 것이 아니라 하지 못한 것이었다. 문제를 일으킬 수는 없었다. 그것이 아무리 사소하고 또 그 또래의 아이들에게는 흔한 것이라고 해도 그럴 수는 없었다. 그것은 일종의 '피해'였다.

압도적인 것으로 느껴지던 부채감을 더 늘릴 수는 없었다. 어쩌면, 그것이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부채감은 곧잘 죄의식으로, 죄의식은 곧 피해의식으로, 피해의식은 결국 분노로 귀결되기에.


그때 속이 문드러지지 않은 것이 오히려 기적이었는지도 모른다. 가득한 분노를 품고, 언제나 바르고, 곧으며, 절제된 생활을 하는 것. 지독한 이중생활을 무사히 보낼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사춘기의 이중성 혹은 다중성 덕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때는 종종 "왜 나를 낳았을까?"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그러한 말을 입 밖으로 내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결정적이며 돌이킬 수 없는 배신행위라고 생각했다.


왜 이런 이야기를 시작했는가 하면, 오늘이 어버이 날 이기 때문이다.


자녀의 탄생을 기뻐하지 않는 부모는 없다(고 믿고 싶다). 사정이 여의치 않더라도 생명 자체는 기쁨이지 절망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건을 분리하지 않고, 상황을 나누지 않은 채 뭉뚱그려 당황스럽다거나 화가 난다고 생각해버리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분명 기쁨이 존재한다.


태어나는 아이는 누구도 자신의 의지로 태어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 아이에게 "너를 낳는 게 아니었어"라고 말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책임 전가이자, 애먼 데 하는 화풀이 밖에 되지 않는다. 더 나쁜 것은 이것이 화풀이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말을 자녀가 듣는다면, 한 번도 아니고 거듭해서 듣고 자란다면 그 아이는 무엇을 꿈꾸게 될까?


부모의 화풀이에 자녀는 "나를 왜 낳으셨어요?"라고 되물을 수도 있다. 가장 무책임한 것은 "생겼으니까 낳았다"거나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안 낳았을 거다"라는 식의 대답이다.

생명의 존중은 분명 중요하다. 생겨난 아이를 인위적으로 지우는 것, 솔직히는 '지운다'는 표현이 쓰일 수 있다는 것조차 용납하고 싶지 않을 만큼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행위에는 언제나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그 책임은 누구에게도 떠넘길 수 없는 중대한 것이다.

"왜 낳았는가?"하고 묻는 자녀의 마음도 이해 못할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말은 공허하고 또 허무하며 무의미한 것에 지나지 않기에 하지 않으니만 못한 것이 된다. 사람들이 아는 것은 어떻게 아이가 생기는가에 관한 '생물학적 원인과 결과'뿐이다. 그 안에 숨겨진 의미는 살아가며 나름대로 발견하는 수밖에 달리 찾을 방법이 없다.


"너를 낳는 게 아니었다"거나 "나를 왜 낳았나"하는 말은 모양은 다르지만 서로가 서로의 책임을 외면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간단히 말하면 이미 낳은 것을 어쩔 수 없고, 이미 태어난 것을 어쩔 수도 없다는 것이다. 남은 것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열심히, 최선을 다해 자신의 인생을 살아내는 것뿐이다.


나쁜 말들 중에서 가장 나쁜 말에 속하는 것들은 대부분 정말 가까운 사람이, 그만큼 가까운 사람에게 한다고 한다. 서로를 상처 입혀도 아무런 득도 없는 사이에, 득이 없기에 더욱더 독기를 담아 심하고 혹독한 말을 내던지게 된다고도 한다. 이런 비극들의 시작은 역시 마찬가지로 말이다.


"너를 낳아서 정말 다행이다."

"저를 낳아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오늘 같은 날은 그런 말이 어울리는 날이다. 겉치레를 하라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부모든 자식이든 서로가 서로에게 조금씩의 부채감은 안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고맙다는 말은 그런 부채감을 어느 정도 줄여주는 효과가 있다.


세상은 조금 살아도 많이 살아도 여전히 살기 쉽지 않고, 부모든 자식이든 부모의 마음 같지 않고, 자식의 마음 같지 않으며, 상처 주지 않으려던 마음이 뒤틀리고 삐뚤어져 모진 말을 내뱉기도 하는 것이 우리다.

그렇게 고마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무수히 교차하며 시간을 수놓는 것이다.

어떤 효과나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습관처럼 고맙다는 말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만이라도 어떤 집에서나 "너를 낳는 게 아니었다"거나 "나를 왜 낳았느냐?"고 묻는 일이 없기를 소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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