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오직 삶 안에서 완성된다

싯다르타_헤르만 헤세

by 가가책방
싯다르타.JPG

농담 삼아 출가하는 건 어떨까 하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농담이긴 했지만 순전한 농담은 아니었고 40% 정도는 그렇게 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깨달음이나 해탈을 구하는 구도자는 아니지만 어떤 형태로든 삶을 완성하고자 하는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산으로 들어가는 편이 유혹도 적고, 조금 더 효율적으로 자신에 대해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거죠. 산으로 들어간다고 해서, 속세에서 멀어진다고 해서 유혹이 적어진다거나 생각이 깊어지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어설픈 결심은 막연한 기대를 만들고, 막연한 기대가 부른 실망을 느끼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결국 진정한 깨달음은 세상에서, 사람들 속에서, 세상과 사람을 통해 얻게 되는 것 아닐까요.


『싯다르타』에는 '싯다르타'라는 바라문의 아들이 등장합니다. 싯다르타는 대단히 뛰어난 수행자로 장래가 촉망되는 바라문이었죠. 수행을 계속하던 어느 날 마을을 찾은 사문들(떠돌이 수도승)과 만나게 된 싯다르타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사문이 되어 집을 떠납니다. 이때 싯다르타의 친구 고빈다도 함께 떠나죠. 몇 년 후 깨달은 자라고 알려진 고타마(세존)의 설법을 들으러 갔을 때 고빈다는 고타마의 가르침에 귀의할 것을 결심합니다.

싯다르타는 고빈다와는 다른 결심을 해요. 이번에는 사문도 아니고 바라문도 아닌 구도자로 다시 떠날 것을 결심한 거죠. 고빈다는 실망하지만 싯다르타를 붙잡거나 막지는 않습니다. 싯다르타 역시 고빈다의 수행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떠나가죠. 싯다르타는 다시 도시로 돌아갑니다. 자신이 떠나왔던 세속의 욕망과 사람들 속으로요.

처음에는 수행자의 모습을 지켜나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 둘 잊어버리고 세속적인 욕망과 집착에 시달리게 되죠. 그러던 어느 날 싯다르타는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떠납니다. 오래전 건너온 강가에 이르렀을 때 싯다르타는 불현듯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욕망이 얼마나 헛된 것이었는지, 자기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는 거죠. 깨달음 이후에 싯다르타는 늙은 뱃사공과 함께 생활하며 수행을 계속합니다. 누구의 가르침도 받지 않고, 누구를 가르치지도 않는 그런 수행을요.

더 많은 시간이 흘러 싯다르타도 고빈다도 완전히 늙어버렸을 때 두 사람은 재회합니다. 고빈다는 알게 되죠. 싯다르타가 자신보다 더 높은 경지의 깨달음을 얻었다는 걸요. 고빈다는 의아해하며 의심하기도 합니다. 엄격한 수행을 하고, 부처의 가르침까지 받은 자신보다 싯다르타가 더 부처에 가까웠기 때문에요.

싯다르타는 고빈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깨달음은 가르침을 통해 전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요.


싯다르타의 삶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해봤어요.

"깨달음이란, 자기완성이란 결국 내 안에서 시작되어, 자기 안에서 완결되는 것이 아닐까?"

깨달음은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 얻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조건과 상황, 생각과 사고의 방향이 완전히 동일하지 않은 한 가르친다고 해서 전해질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하는 이유죠. 결국 우리가 구해야 하는 것은 현명한 사람이나 박식한 사람, 먼저 깨달은 사람을 찾아가 가르침을 구하고, 그 가르침을 따라 하는 게 아니라 자기 안에 숨겨져 있는 깨달음을 발견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은 장마다운 비가 내린 날이었습니다. 회사에서 일을 할 때도, 집에 돌아올 때도 비가 내렸죠. 집에 오는 길에는 바지가 젖었고, 신발이 젖었으며, 왼쪽 어깨도 젖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따라 그 젖음이 조금도 불쾌하지 않더군요. 오히려 흥이 나기도 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는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습니다. 집에도 별 일이 없었고, 급한 일들은 모두 마쳤기에 비가 와도 걱정이나 염려할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됐죠.

젖어도 불쾌하지 않은 비, 나 자신이나 가족들의 불편이나 걱정이 되지 않는 비, 오늘은 어쩐지 비를 맞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집에 오는 길에도 비슷한 충동을 느꼈지만 가방과 휴대전화가 있어서 그럴 수 없었어요. 이제는 그런 것들을 모두 내려놓았기에 마음껏 젖어도 괜찮았습니다. 그래서 밖으로 나갔죠. 비 내리는 밤거리로요.

처음 비를 맞으며 걷기 시작할 때 가장 많이 의식하게 된 건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멀쩡하게 우산을 들고 가면서 비를 맞는 사람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하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던 거죠.

이런 의식, 어색함이 오래가지는 않았습니다. 빗 속에서 뛰어다니며 놀고 있는 아이들을 만났을 때, 비에 씻기듯 사라졌으니까요.

'어린아이 같다'

기독교에서나 불교에서 깨달음을 얻은 이들 혹은 구원을 얻는 이들은 모두 어린아이 같다고 말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세상의 시선보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아이들은 자유롭고, 창조적이며, 적극적이죠. 누구의 눈치를 살피거나 세상을 의식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어른이 되어 가는 거라고 말하지만 오히려 자기완성에서는 멀어졌던 게 아닐까요.


20분쯤 걸었을 겁니다. 그쯤 걸으니 속까지 젖더군요. 제법 비가 내렸음에도 속까지 적시는 일은 쉽지 않다는 걸 새삼 깨달았습니다. 누군가가 가르쳐서 얻는 깨달음에 대한 파편적인 지식들이 왜 깨달음이 될 수 없는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죠. 부족한 겁니다. 그것만으로는 직접 얻은 생각과 경험과 깨달음을 따라오지 못했던 거죠.

집으로 오기 전에 공원의 벤치에 앉아 조용히 비를 맞았습니다. 그러다가 누워서 온 몸으로 비를 느꼈죠. 처음에는 시원하다가 가끔 서늘해지고, 종종 싸늘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비를 맞으면서 생각을 비우자고 생각했더니 오히려 잡생각이 더 많이 떠오르더군요.

누군가가 갑자기 와서 해코지를 하면 어떻게 하나라거나 지나가던 사람이 나를 보면 뭐라고 할까라거나 하는 생각도 몇 번이나 떠올랐다가 사라졌고요. 그러다 문득 자아를 내려놓는다는 것에 생각이 가 닿았습니다.

'비운다, 내려놓는다.'


비움 혹은 내려놓음을 깨달음으로 가는 중요한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하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됐어요. 물론 싯다르타는 비운 사람이고, 내려놓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비움이나 내려놓음은 조금도 인위적이거나 억지스러운 것이 아니었어요. 깨달음과 동시에 저절로 비운 것처럼, 내려놓은 것처럼 된 거죠. 내려놓지 않아도, 비우지 않아도, 더 이상 얽매이지 않으니 그것이 바로 깨달음의 결과였던 겁니다.


싯다르타는 거지에서부터 도박꾼, 장사꾼, 창부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을 스승이라고 여기며 이치를 구합니다. 그러나 싯다르타가 가장 많은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이름 없는 뱃사공이었어요. 이름이 없을 뿐 아니라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거나 가르치려 들지도 않았던 사람이죠. 그런데 그 뱃사공이 믿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자신이 평생을 보낸 강물이었어요. 뱃사공은 강물이 하는 말을 들으며 자신을 완성해 나갑니다.

싯다르타보다 먼저 깨달음을 얻고 해탈에 이르렀을 정도로 그 깨달음은 진실하고도 깊었죠. 싯다르타 역시 강물을 통해 많은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고빈다와 다시 만났을 때 고빈다는 싯다르타의 깨달음의 깊이를 알아차리고 예를 표하게 되는 거죠.


얼마나 비를 맞았을까요. 이 비를 언제까지 맞아야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비가 알려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재밌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마치 비가 '이제 그만 집에 가는 게 좋겠어'라고 말하는 것처럼 가늘어졌던 거예요. 바람도 불어서 '어서 가라'고 하는 것 같았죠. 그래서 비 맞기를 그만두고 일어나서 집으로 향했습니다.

방금 전까지 야만인으로 아무런 제약 없이, 자유롭게 비를 맞던 무법자에서 우산을 뒤집어쓰고, 어딘가가 젖을까 염려하는 문명인으로 돌아왔던 거죠. 하지만 우산을 쓸 필요도 없었습니다. 비가 거의 그친데다 바람이 거세게 불었으니까요.


비가 정말 그렇게 말해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건 나 자신이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이고, 그렇게 느꼈다는 거니까요.


오늘 저는 『싯다르타』와 빗속을 걸었던 경험을 통해 재밌는 것 두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하나는 깨달음은 가르침을 통해 전할 수도 얻을 수도 없다 거고, 다른 하나는 자신을 완성하기 위해 자아를 내려놓을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종종 욕망 혹은 다른 무엇인가를 차단하고 멀리하는 과정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자 합니다. 물론 그러한 노력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그것은 싯다르타가 말한 것처럼 반쪽짜리의 불완전한 것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기를 온전히 받아들임을 통해 얻어낸 깨달음만이 진정하고 온전한 깨달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삶, 지금의 삶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노력을 계속하는 건 분명 의미 있는 일이지만, 지금의 삶 역시 나의 것이며, 충분한 의미가 있다는 걸 기억한다면 괴로움으로 남기보다는 다른 경지로 나아가는 계기가 될 거라 믿으니까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읽기 시작한 책이 아님에도 결국 뭔가를 깨닫게 만드는 책이 있습니다.

『싯다르타』 역시 그런 책 가운데 하나였는데, 데미안에서 이야기했던 신과 악마의 중간적 존재인 아브락사스처럼 둘로 완전히 나누어질 수 없는 상태 혹은 존재를 불교의 가르침이라는 측면에서 들여다봤다는 게 흥미로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르침이 완성이나 완전함을 만들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해 봅니다.


우리 모두는 독립된 존재로서, 한 사람으로서 이미 완전합니다. 삶이란 결국 그 완전함을 발견해 나가는 과정이 아닐까, 『싯다르타』의 감상을 마치며 떠올린 결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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