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레라 시대의 사랑/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내가 죽는 것이 가슴 아픈 유일한 까닭은 그것이 사랑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콜레라 시대의 사랑> 중
『콜레라 시대의 사랑』에서 가장 깊은 울림을 남긴 문장이다. 사랑이 이토록 흔하며, 이별이 발에 치일 만큼 잦은 이 시대에도 사랑으로 죽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남아 있을까?
사실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는 너무 읽기 힘들었다. 번역의 문제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편집이 거칠어 매끄럽게 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60페이지를 넘길 때까지도 "왜 이런 작품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 가운데 하나가 됐지?"하고 생각했을 정도다. 읽기를 그만둘까도 생각했다.
계속 읽다 보니 기묘한 일이 벌어졌다. 매끄럽지 않은 편집 투에 적응해버린 거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읽을 만 한데?'하고 생각하게 되더니, 1권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는 도대체 이 이야기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 흥미진진해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깨달은 게 하나 있는데 "나는 문장 교열은 못하겠구나"하는 거다. 어색한 문장 혹은 거친 전개에 적응해버리고 만다면 매끈하게 정돈된 이야기를 읽고 싶어 하는 이들을 만족시킬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소소한 깨달음과 함께 이야기는 '막장'을 향해 치달았다. 해도 해도 이런 기막힌 막장이 또 있을까 싶을 만큼 마구잡이였다. 기묘한 건 그런 마구잡이식의 막장 이야기 전개에도 불구하고 결말이 기막히게 아름답다는 거다. 최후의 한 장면을 위해 모든 장면을 연출한 것처럼, 마지막 순간에 감정과 관심, 감동까지를 끌어모으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한 남자가 나이 듦을 거부하기 위해 자살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 남자에게는 아무도 모르게 숨겨놓은 젊은 애인도 있었다. 하지만 그 남자는 자살을 결심했고 실행한다. 그 남자의 죽음을 정리하는 사람은 존경받는 의사인 후베날 우르비노 박사다. 80세가 넘었지만 아직까지 건강을 유지하고 있으며, 자살한 남자의 죽음이 사랑 때문이 아님을 아쉬워하는 사랑하다 죽고자 하는 소망을 갖고 있다.
후베날 우르비노 박사의 부인 이름은 페르미나 다사로 젊은 날 페르미나 다사를 사랑하던 플로렌티노 아리사의 고백을 거절하고 후베날 우르비노 박사와 결혼했다.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사랑을 거절당한 후에도 포기하지 않고 페르미나 다사를 사랑하는 일을 계속한다.
세월은 빠르게, 쉬지 않고 51년 9개월 4일이 지나던 날, 여전히 정정하던 후베날 우르비노 박사가 어이없는 사고로 갑자기 죽는다. 이날 만을 기다리던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페르미나 다사를 찾아가 다시 한 번 고백을 하고, 다시 1년 여가 지난 후 두 사람은 같은 배에 올라 여행을 시작한다. 이 여행의 목적은 오직 사랑이었으며, 죽는 날까지 계속될 거였다.
앞서 일어난 두 남자의 죽음의 원인은 사랑이 아니다. 한 남자는 사랑을 두고, 단지 늙고 나이 들어 감이 두려워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다른 남자는 나무 위에 올라앉은 앵무새를 잡기 위해 사다리를 오르다 떨어지는 바람에 죽는다. 두 죽음 다 허망하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달랐다. 사랑이 아닌 다른 이유로 죽지 않기 위해 항상 발밑을 살폈고, 행동을 조심했으며, 사람들 사이에서 발 없이도 퍼져나가는 소문까지 주의에 주의를 거듭했다. 오직 사랑을 위해 기다렸고, 살아왔으며, 살아가는 남자가 바로 플로렌티노 아리사였다.
"내가 죽는 것이 가슴 아픈 유일한 까닭은 그것이 사랑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라는 금언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도 플로렌티노 아리사다. 반 세기가 넘는 51년 9개월을 다시 돌아올 사랑을 기다리는데 쓴 최후의 로맨티시스트인 거다. 우스운 건 플로렌티노 아리사가 동정을 지켰다거나 성적으로 결백했던 건 아니라는 거다. 무수한 여성 편력의 소유자이며, 플로렌티노 아리사와의 관계로 죽음에 이르거나 삶을 망친 사람도 있었다. 오히려 문란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사람이 바로 플로렌티노 아리사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플로렌티노 아리사만큼 사랑에 목숨을 건 사람은 없었다는 거다.
자신이 최고라고 믿는 사랑, 페르미나 다사와의 사랑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의 이름도 플로렌티노 아리사였다.
과거에도 그랬을 것이고 지금도 그런 것처럼 대부분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사랑처럼 보이는 깃발을 흔들며 서로에게 다가간다. 후베날 우르비노 박사가 한 것처럼 말이다.
그의 편지에는 플로렌티노 아리사와 같은 열정이 담겨 있지 않았고, 그의 결심을 보여줄 그 어떤 감동적인 증거도 없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후베날 우르비노의 구혼은 결코 사랑의 이름으로 제안된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제안했다고 하기엔 이상한 세속적인 재물들로 채워져 있었다. 즉 사회적, 경제적 안정과 질서, 행복, 눈앞의 숫자 등 모두 더하면 사랑처럼 보일 수 있는 것들, 그러니까 거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만 제시했던 것이다.
<콜레라 시대의 사랑> 중
사랑이 아닌 '거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 세속적인 재물들과 우리가 조건이라고 부르는 사랑처럼 보일 수 있는 것들을 따라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던가. 오히려 진정한 사랑 운운하며 현실적인 조건들을 따져보지 않는 사람들은 시대착오적인 존재가 되어버린다.
이런 모습은 과거에도 그렇게 다르게 해석되지 않았을 거다. 그렇기에 플로렌티노 아리사의 기다림과 사랑이, 오직 죽음의 이유가 사랑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감동이 되는 거다.
플로렌티노 아리사처럼 50년 넘는 시간을 기다릴 생각은 없다. 그런 무모한 기다림은 자신의 사랑과의 대결이 아니라 반드시 인간이 패배할 수밖에 없는 시간과의 대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랜 기다림과 인내에는 그에 합당한 찬사를 보낸다.
전쟁과 콜레라.
이들이 살았던 시대는 죽음이 만연했던 시대였다. 너무 흔한 죽음들, 그 죽음의 대부분은 무자비한 동시에 무의미했을 거다.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조차 간단히 죽어버렸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그런 시대였기에 플로렌티노 아리사의 삶과 그가 꿈꾸는 죽음이 더 커다란 의미를 갖게 되는 것 아닐까?
역시 플로렌티노 아리사와 같은 사랑은 못하겠다. 한 여자를 그토록 오래 기다린다는 건 도무지 상상할 수도 없다. 다만 나름대로 기다리는 것이 하나 있다.
'뮤즈', 영감을 주는 존재는 항상 찾고, 기다리고 있다. 영감에 의지해서 무엇인가를 이루려고 해서는 안 되는 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그런 존재가 절실하게 느껴지는 걸 막을 수는 없다. 아직은 다른 이들의 이야기에서 얼마만큼의 단서와 영감을 얻고 있지만, 이 생활도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야기의 마지막에 플로렌티노 아리사와 선장은 이런 말을 주고받는다. 이 말을 남기는 것으로 감상을 마친다.
선장이 다시 물었다.
"언제까지 이 빌어먹을 왕복 여행을 계속할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플로렌티노 아리사에게는 53년 7개월 11일의 낮과 밤 동안 준비해 온 대답이 있었다. 그는 말했다.
"우리 목숨이 다할 때까지."
<콜레라 시대의 사랑> 중
"우리 목숨이 다할 때까지."
여행은 계속된다. 사랑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