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_알랭 드 보통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묻습니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 걸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저마다의 관계에 따라 달라지죠.
어떤 사람은 '사랑'이라는 말이 너무 상투적이고 속된 것처럼 여겨진다는 이유로 사랑을 말하지 않기도 합니다. 다만, 두 사람만의 표현, 메시지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뿐이죠.
그런데 '왜 사랑하는 걸까?'라는 물음이 있다면 '왜 사랑하지 않는 걸까?' 혹은 '왜 우리는 사랑이 아닌 걸까?'라는 물음도 던져볼 수 있지 않을까요?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왜 사랑하는가'와 '왜 사랑하지 않는가' 혹은 '왜 사랑이 아닌 걸까'라는 모든 물음에 저마다의 대답을 던져주는 책입니다. 먼저 두 사람이 사랑에 빠졌다가 사랑에서 빠져나오는 과정을 보여주고 어떤 사람과의 사랑이 끝난 후 새로운 사랑이 시작되기까지를 실감 나게, 철학적이고 사색적으로 담아내지요.
미리 말씀드리지만 이 책을 읽는다고 새로운 사랑을 하게 되거나, 진정한 사랑을 찾을 수 있게 되는 건 아닙니다. '사랑을 시작하는 방법' 같은 걸 가르쳐 주는 책이 아니니까요. 다만 적어도 자기 자신과 지금 혹은 지금까지의 사랑은 돌아볼 수 있을 겁니다.
모든 이별에는 애도의 기간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억지로 합리화하거나 변명할 필요는 없어요.
요즘 이 말을 자주 하는 것 같은데요.
"사랑해야 합니다."
'나'는 출장 다녀오는 비행기에서 클로이라는 여자의 옆자리에 앉게 됩니다. 두 사람은 '운명'이라고 느끼게 되죠. 비행기가 활주로에 내리고 입국 수속을 마쳤을 때 '나'는 자신이 클로이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연락처를 기억해 두죠.
얼마 후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열정적인 사랑에 빠져듭니다. 마치, 두 사람이 운명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있는 건 무엇도 없으며, 오직 두 사람만이 세상의 모든 행복과 기쁨을 누릴 자격을 갖게 된 것처럼요.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가 보통의 연애 소설과 다른 점은 일상과 감정에 철학과 자유를 조금의 어색함도 없이 녹여넣었다는 점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를 만나고, 운명임을 확인하고, 사랑을 확신하는 모든 과정에서부터 사랑이 끝났음을 알게 되는 과정까지.
소설 전체가 잘 그려진 작품처럼 조화를 이루면서, 읽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이야기처럼 느끼게 하죠.
사랑에 빠진다는 건 뭘까요?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희망이 자기 인식에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있는 것 - 비겁함, 심약함, 게으름, 부정직, 타협성, 끔찍한 어리석음 같은 것 - 을 상대에게서 발견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사랑에 빠진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중
회의주의자들은 사랑에 빠지지 못합니다. 언제나 자기 인식이 희망을 짓눌러버리니까요. 사랑은 오히려 그럴 수 없을 것이라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갖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비겁함, 심약함, 어리 석음 들은 죄악이라거나 부덕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누구나 갖고 있는 인간적인 특징인 거죠.
사랑에 빠지는 순간만큼은 상대방은 자신과 다른, 완벽하거나 완전한 존재거나 그렇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이 큰 존재라고 믿습니다.
"쟤는 구제불능이야."
구제불능이라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정말, 드뭅니다. 그 사랑이 정말 사랑인지도 알기 어렵죠.
또 하나의 장애물은 자기 인식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인식이 아무리 호의적이라고 해도 스스로에 대한 인식이 균형을 갖추지 못한다면 그 관계는 계속될 수도 발전할 수도 없게 되죠. 사랑도 결국 상호작용이니까요.
사랑에 빠지기 위해 충족되어야 할 제 1 조건은 자기 인식과 희망의 균형입니다. 똑같아야만 균형이 잡혔다고 말하는 건 아니죠. 신앙과 사랑은 무척 닮아있는데, 믿음, 두 사람이 공유하는 믿음 그 자체가 축복이라는 점입니다.
읽다가 재밌는 부분을 발견했습니다. 무척 공감이 되는 부분이라서 적어볼게요.
그러나 나는 이제 "내가 무엇을 했다고 이런 것을 받을 자격이 생겼단 말인가?"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맴돌 정도로 불편함을 느끼게 되었다. 짜증에 가까웠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중
사랑은 어떤 자격이 있어야만 시작되고, 유지되는 걸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랬'었'어요.
이런 '자격'에 대한 생각을 두고 흔히 쓰는 표현이 '자격지심'입니다. 자격지심이 큰 이들에게 사랑은 너무 적은 것도 문제지만 오히려 넘칠 때 더 큰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마치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은 것처럼 사랑을 받아도 불만이 생기고, 짜증을 내기에 이르는 거죠.
어떤 순간에도 '자격지심'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기억해 두세요.
클로이의 몸짓들은 빙산의 일각처럼 그 밑에 놓인 것을 가리켰다. 그것의 진정한 가치, 호기심이 덜한 사람이나 사랑이 덜한 사람에게는 당연히 의미 없어 보일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서 바로 연인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중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에게는 아무 의미 없어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너무 좋아 보이는 게 있습니다. 우리는 그럴 때 '이런 게 사랑이구나'하죠. 거기에 더해 이러한 '인지',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 연인이 필요한 이유라고 말합니다.
"너는 나를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해주는 사람이야."
이 말이 아름다운 이유는 연인이 어떤 존재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단 한 문장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 거예요.
사랑에 빠졌을 때 상대방에게 물어서는 안 되는 게 있다고 합니다.
상대방에게 무엇 때문에 나를 사랑하게 되었느냐고 묻지 않는 것은 예의에 속한다. 개인적인 바람을 이야기하자면, 어떤 면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사실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중
우리는 흔히 '내 어디가 좋냐?'고 묻곤 합니다.
'왜 사랑하게 되었느냐?'고 묻는 일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물음들은 예의가 없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례한 행동이고, 큰 실례를 범한 것이 됩니다. 본인 역시 그럴 거예요.
'나라는 사실 때문에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요.
사랑은 시작될 때처럼 갑자기 끝이 나기도 합니다.
"문제를 말하면 진짜로 생겨." 클로이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중
문제를 말했기 때문에 생겼는지, 그렇지 않았더라도 생겼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부정하고 싶을 때, 합리화하고 싶을 때 써먹기에는 좋은 말인 건 분명합니다. '문제를 말한' '너의 잘못'으로 하는 게 이별을 더 수월하게 만들거나 더 정당하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무기가 되기도 할 테죠.
"인간의 모든 불행은 자기 방에 혼자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생긴다." 파스칼의 말이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중
이별은 언제든 찾아올 수 있습니다. 사랑이 끝나고 찾아드는 불행한 기분, 죄책감과 후회와 미련과 미움들은 사실 언제까지 품고 있어도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때는 그저 자기 방에 혼자 있으면서 마음을 정리하고, 나뉘어 있던 자신을 되찾는 일을 하는 게 더 낫다는 거죠.
이별 후, 많은 사람들이 다시는 사랑하지 않겠다며 금욕주의적인 자세를 취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모습, 태도는 정말 솔직하지 않은 모습 아닐까요.
금욕주의의 핵심에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실망시킬 기회를 주기 전에 스스로 실망해버리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중
이 말은 사랑하거나 마음을 주었다가 상대방에게 실망하고 좌절하는 것보다 '먼저' 기회 자체를 박탈함으로써 스스로 실망해 있는 상태를 유지하려고 하는 욕망이 금욕주의의 핵심이라는 겁니다.
"저 포도는 신포도 일거야."라는 생각과 비슷한 거죠.
사람은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모두가, 모든 인간이 불완전합니다. 상대방에게 완전한 이상을 투영하는 건 '나는 아무도 만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시작할 수 있을 뿐이에요. 그다음은 또 다음의 일입니다.
적으면서 참으로 묘한 기분을 느낀 건, 이 모든 말이 과거나 지금의 나 자신에게 던지는 말인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우습게도 언제부터인가 그렇게 생각해오지 않았나 싶네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나를 이해하는 존재. 어쩌면 신에게나 가능한 것을 상대방에게 요구하고 있지는 않은지.
앞에서도 한 얘기지만 사랑해야 합니다. 관계 속에서 '나' 발견해야 합니다.
가끔 세상이 끝나버린 것처럼 느껴지는 날들을 견뎌야 한대도. 사랑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