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부로 저주하거나 기억에서 도망치지 말 것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줄리언 반스

by 가가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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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4, 5년 전 일입니다. 코맥 매카시 작품 『로드』를 읽으며 정말 안타깝다는 생각을 거듭했습니다. 그 이유는 문장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코맥 매카시 작품에서 어떤 아름다움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어요. 번역의 한계, 원서를 읽을 수 있는 최소한의 능력 혹은 원문을 즐길 수 있는 최대한의 능력이 간절했습니다.


그 후로 한참이 지났지만 여전히 원서를 읽는다는 건 요원한 일로 남아있어요. 그런 상태에서 읽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역시 아쉬움이 짙게 남습니다.

이 아쉬움은 크게 두 가지예요.

하나는 원어가 갖는 풍부한 의미, 표현과 문장의 유려함을 놓치지 않았나 하는 겁니다.

다른 하나는 이 작품이 재미없다고 확신할 수 없다는 거죠.


재미에 대한 생각은 어디에 관점을 두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그럼에도 '소설의 제왕'같은 칭호를 붙이기에 적절한가 아닌가 정도는 판단할 수 있을 테니까요.


이야기는 60대 남자가 젊은 시절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남자는 20대에 사귀던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그 여자친구가 자기 친구와 사귀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지만, 그 일에 대한 기억을 아주 깊은 곳에 봉인하고 다른 여자를 만나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자기 앞으로 유산을 남긴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되고, 유산과 함께 일기장도 남겼다는 말에 남자는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유산을 남긴 사람은 남자와 사귀다가 남자의 친구와 연인이 된 여자의 엄마였고, 함께 남긴 일기장은 친구인 에이드리언의 것이었습니다.

남자는 일기장을 받기 위해 40년 만에 옛 연인에게 메일을 보내고, 지금까지 잊고 지냈던 과거, 남자가 자기에게 유리하게 고쳐 기억했던 과거의 진실을 서서히 떠올리게 됩니다. 남자가 과거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었을 즈음 이야기는 충격적인(사실 그다지 충격적이지는 않았지만) 반전과 함께 끝이 납니다.


이렇게 적고 보니 뭔가 엄청 흥미진진할 것 같은데, 실제로 흥미진진하기는 합니다. 꼭 스릴러나 미스터리처럼 써 내려간 이야기니까요.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남자의 '기억'입니다. 실제 일어났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기억하고 있는 남자의 기억과 자신이 일방적인 피해자라고 믿는 확신, 타인에게 상처 준 기억은 깡그리 잊고 자기가 받은 상처만을 기억하는 편리함.

그 정도가 심하긴 하지만 남자가 겪는 기억의 혼란이나 망각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방어본능에서 생겨난 것이라서 괜히 '나 역시 내게 유리하게 과거를 기억하고 있는 거겠지?'하며 반성하게 되어버렸습니다.

그토록 당연한 권리 같았던 비난과 저주, 분명 상대방은 폭력적이라고 느꼈을 고성과 폭언. 그런데 정말 그 모든 말, 행동은 정당했던 걸까? 하고요.


남자가 쉽게 받아들이고 이해하지 못했던 것처럼, 보통의 사람들 역시 비슷하게 반응했을 겁니다. 그런 평범성, 악의 평범성이 이 이야기에는 담겨있었어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읽으며 떠오른 영화가 한 편 있습니다.

"너는 말이 너무 많아.", <올드보이> 말이죠.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속 남자가 복수의 대상이 되지는 않지만, 그가 과거에 했던 말(편지), 현재에도 이해하지 못하고(감조차 잡지 못하고), 여전히 자신이 피해자라고 믿는 확신이 상대방에게 얼마나 큰 절망이 될지 상상하는 것조차 버거웠기 때문입니다. 그 모습이 겹쳐 보이더군요.


엉뚱하게도 이 이야기를 읽고 느낀 건 '착하게 살아야겠다'는 겁니다.

'내 기억을 너무 믿지 말아야지'하는 생각에 더해서 말이죠.


우리는 종종 너무나 쉽게, 자신에게 나쁘게 굴었던 사람들을 저주하곤 합니다. 그러고 나서는 아주 까맣게, 정말 까마득하게 잊어버리죠.


정말 나는 그렇게 해도 되는 거였을까?

그들은 정말 그런 일을 당했어야 하는 걸까?

이 물음들에 대한 답은 아주 오래, 혹은 영원히 얻지 못할 겁니다. 그렇기에 더욱더 신중해야 하지 않을까요.


어떤 말들은 난폭합니다.

어떤 말에는 날이 서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말은 파괴적입니다.

날아가서 박히는 것, 상처 입히는 것, 나아가거나 도망칠 수 없게 속박하는 것, 무너뜨리고 부수는 것.

나는 세상에서 말보다 이런 일을 잘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이런 이야기에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요.

다만 이렇게 바랄 뿐입니다.

고운 마음과 고운 말이 오래오래 나의 것으로 남아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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