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소개팅을 거절하며.

나를 리뷰하다

by 가가책방

밤 열한 시도 넘은 시각, 때 모르는 매미가 제 생명을 갉아가며 소리를 지른다.

어쩌자고 가로등은 저리 밝아 한 달 수명을 절반으로 줄여놓는가.

가로등이 사람을 위해 밝혀졌다면 다른 생을 깎고, 꺾어 얻은 자기 생(生)에 배일 이기심은 어찌하려 하는가.

매미가 울음을 그쳤다.

어린아이가 외치는 소리를 들어서였을까.

아니면, 숨이 다해서였을까.


나는 얌전한 고양이는 아니다. 같은 고양잇과라면 노회 한 호랑이에 더 가깝겠지.


서른 해를 넘게 살아오면서 소개팅 한 번 안 해본 게 가능하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는데, 물론 그것은 당연히 가능하다. 첫째, 소개팅을 시켜주는 사람이 없으면 된다. 둘째 소개팅을 시켜주기를 바라지 않으면 된다. 소개팅을 시켜주는 사람도 없고, 스스로 바라지도 않으면 소개팅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단순한 이야기다.


그런 내 삶에 소개팅 제의가 들어온 건 일대 격변 혹은 대이변이나 다름없다. 물론, 자연 발생한 것도 아니다. 소개팅 거절 사건의 시작은 아버지다. 아버지에게까지 마음 쓰게 한 나 자신을 조금 탓하기도 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건만.


'그냥' 만나보는 건 가능하지 않아?라는 물음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세상에 '그냥'은 없다. 떨어지는 사과도 그냥 떨어지지 않으며,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도 그냥 흐르는 건 아니다. 드러나지 않더라도 거기엔 이치가 담겨 있고, 원리가 존재한다. 보이지 않거나, 보지 않으려 하는 것을 두고 뭉뚱그려서 '그냥'이라고 말하는 건 아무래도 내키지 않는다.


적어도 나는 '예뻐?'라고 묻지 않았다. 나 스스로 생각하는 예쁨의 기준도 모호한데 다른 사람의 기준으로 판단한 예쁨을 묻는 것도 이상하고, 직접 보면 알게 될 것을 미리 묻는 것도 이상하며, 만나지 않을 것이라면 더더욱 묻는 것이 이상할 것이기에 물어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지 모른다.


그렇다. 처음부터 거절할 생각이었다. 적어도, 생각은 그러했다. 하지만 머뭇거렸다. 멈칫하고 말았다. 지금부터 그 멈칫거림에 대해 조금 돌아보려고 한다.


멈칫거림은 어디에서 왔을까?


첫 번째는 호기심이다.

호기심도 하나는 아니고 적어도 두 개는 된다.

하나는 '소개팅'이라는 경험 자체에 대한 호기심이다. 언제나 미지의 영역은 두려움과 함께 알고자 하는 호기심을 부른다. 두려움이 크면 클수록 호기심도 커지는 아이러니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소개팅이 무엇이며, 어떻게 시작되어 어떻게 되면 끝이 나는 것인지, 잠깐 동안이었지만 정말 궁금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하나는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다. 여기서도 중요한 건 '누구를 소개받게 될까'가 아니라 '어떤 사람을 소개받게 될까'에 더 호기심이 생겼다는 거다. '누구'와 '어떤 사람'이 어떻게 다르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영어로 하면 둘 다 'WHO'가 되겠지만 누구와 어떤 사람은 질적으로 다르다. 역시 모호하기는 마찬가지지만 설명을 보태자면 '누구'는 조금 더 객관적인 개념이다. '이러저러한 조건의, 저러 이러하게 생긴, 이러저러 저러 이러한 사람이다' 정도가 '누구'다. '어떤 사람'은 '내가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게 되느냐의 문제'다.

간단히 적으면 '누구'는 '조건'이 되고, '어떤 사람'은 '느낌' 정도가 되겠다.


오래지 않아 호기심은 무너졌다.

"나의 호기심을 채우는 것은 중요한가?"라고 묻는다면 중요하다고 대답할 거다. 개인적 차원에서 끝이 나는 문제라면 나는 누구보다도 게걸스럽게 호기심을 파고들 수 있다. 하지만 타인이 엮여있는 일이라면 그다지 관여하고 싶지 않다고 느낀다.

법은 무죄추정을 원칙으로 한다. 100명의 피해자보다 1명의 억울한 피의자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을 추구한다는 이야기다. 솔직히 이 원칙에는 어느 정도 불만이 있지만 그렇다고 부정할 수도 없는 일이다. 법을 떠나 생각하면 나 역시 같은 원칙을 내부에 세워놓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자유분방한 사람이다. 지금은 취미가 없지만 한 때는 취미로 운동을 할 만큼 활동적이기도 했다. 종종 어떤 사람들은 "너는 책 읽는 게 취미잖아?"라고 말하는데, 엄밀히 말해 내게 책을 읽는다는 건 취미가 아니게 된 지 오래다. "그럼 지금 읽는 건 뭐냐?"라고 물을 수도 있겠는데, 지금 읽는 건 그냥 '생활'이다. 결코 취미로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여기까지 쓴 것만 읽어도 내가 얼마나 까다로운지 알아차린 사람이 적지 않을 거다. 중요한 건 이 정도 생각은 그 까다로움의 서막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까다로움으로 향하는 내 안의 문은 아직 활짝 열리지도 않았다.


중간을 생략하고 결론으로 넘어가야겠다.

결론은 단순해질 수 없기에 복잡한 이유로 첫 소개팅 제의를 거절했다는 거다. 어떤 이유 뒤에 숨든지 '두려움'이라는 단어를 피해갈 수는 없겠다. 무엇에 대한 두려움인지는 이야기할 생각이 없다.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도 서슴없이 적는 편이기는 하지만, 내면의 문제의 경우에는 그 정도도 적을 수 없을 만큼 아는 바가 적기 때문이다.

확실한 것 하나는, 그 두려움이 결코 단순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거다. 현재의 자유를 잃어버릴 두려움, 거절에 대한 두려움, 막연한 두려움, 상처를 주고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 기쁨과 행복에 겨워 균형을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 날카로운 감각을 잃어버릴지 모르는 두려움, 상대에 대한 두려움, 나도 모르는 나에 대한 두려움, 이것 혹은 저것에 대한 온갖 두려움과 두려움.


중요한 것은 이 두려움조차 근원적인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두려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두려움 역시 무수한 가면 가운데 하나이며, 유용한 구실 가운데 하나일 수 있다. 혹은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고 말이다.


만나도 되고 만나지 않아도 된다.

거절해도 되고 거절당해도 된다.

이런 문제들의 선택권은 과연 누구에게 있는 걸까?

물론 나에게'도' 선택권은 있다. 그러나 나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결론은 없다.

어떤 이는 이렇게 조언했다. "너는 책을 그만 읽고, 사람을 만나야 해."

좋은 일이다. 중요한 조언이다. 그래서 제법 오래 따르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하지만 가끔은 그 만남이 오히려 더 지루하고, 공허한 법이다.

사람에게 기대할 것, 기대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생각은 분명 뒤틀린 것이지만 상당 부분 옳은 생각이라고 본다.

누가 뭐라고 하든 인간은 결국 계속해서 기대를 하고, 그 기대를 만족시키거나 수정하거나 실망하면서 관계를 지속해 나간다. 그렇기에 기대는 인간관계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행위가 된다.


소개팅은 기대할만한 이벤트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소개팅은 기대할 정도의 이벤트는 아닌가?

그럴지도 모른다.

부정과 긍정의 물음 모두에 대한 답이 그럴지도 모른다라면, 나는 보통 하지 않는 것을 택한다.


이런 선택의 경향은 이런 식의 조언을 부른다.
"하고 후회하는 게 하지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 낫다."고.

한 때는 나도 그렇게 생각했던 날이 있었다. 하지만 오래전에 이미 정해버렸으니 어쩔 수 없다.

" 후회하게 된다면, 그게 더 후회하게 되는 선택이라고 해도, 나는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겠다"라고 말이다.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해도 이 글의 결론은 찌질이 겁쟁이가 된다.

그런 줄 알면서도 글로 남기는 까닭은, 지금의 나를 조금이라도 똑바로 바라보고 싶은 마음에서다.


마음은 똑바로 바라봐주지 않으면 삐뚤어진다. 바라보지 않아도 쭉쭉 바르게 자라는 대나무처럼 되지는 않는다. 나는 조금 더 나의 마음을 똑바로 바라봐야겠다. 어디를 향해 나아가는지, 무엇 앞에서 물러서는지.

나는 여전히 나를 더 알고 싶고, 알고자 한다.

내가 바라는 건, 다만 세상 누구보다 나 자신을 더 잘 아는 것, 단지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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