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빛>_고레에다 히로카즈

나는 무엇이 될 수 있나

by 가가책방

<Lost Star>

나는 무엇이 될 수 있나
혹은,
무엇이 되고 싶은가
그리고,
무엇인가

그러니까,
너의.




우리는 종종, 대답할 수 없는 것을 묻곤 한다.
그 물음은 정답이나 사실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누구에게든 묻고 싶었고, 무슨 말이든 듣고 싶었던 것뿐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환상의 빛>을 보고 왔다.
미야모토 테루가 쓴 동명의 소설 <환상의 빛>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이미 소설로 읽었기에 줄거리는 대략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영화로 보는 소설은 어쩐지 낯설어서 처음 보는 이야기처럼 느끼기도 했다.
기묘한 기분.

유미코였나,
철길을 걸어가다 달려오는 열차를 피하지 않아 죽은, 다르게 적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은, 혹은 자살한 남편의 죽음에 의문을 품은 채로 재혼을 한다.

오사카에서 살게 될 줄 알았는데 정작 결혼을 하고 살게 되는 공간은 작은 바닷가 마을이다.
시골 마을은 몹시 조용해서 적막할 것 같지만 바닷가 마을이란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도시의 소음, 사람, 자동차, 공장의 소리도 거친 바다, 파도 소리 앞에서는 오히려 조용하게 느껴질 정도로 바다는 소란스럽다.

끝없고 드넓어서 망망하다고 하는 바다,
바다가 품고 있는 '알 수 없음'은 아주 작고 사소한 것에도 들어 있다. 바다만큼이나 무수한 알 수 없음을 품은 존재란, 역시, 사람이다.

남편의 죽음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고, 파도 소리에도 익숙해지면서 조금씩 아무렇지 않은 상태, 흔히 '안정'이라고 하는 마음이 찾아드는가 싶어졌을 때, 사람이 남긴 그림자 혹은 그늘이 그리 간단히 사라지지 않음을 일깨우듯 그 어느 때보다 커다란 혼란과 고민에 시달리게 된다.

마치 주기적으로(전혀 주기적이지 않을 수 있지만) 사나워졌다가 고요해지기를 거듭하지만 한 순간도 그 모든 비밀을 드러내지 않는 바다처럼, 대답을 듣지 못하는 한, 이유를 알지 못하는 한 거듭될 마음의 혼란 앞에서 두려워 하기도 하고, 혼란스러워 하기도 하고, 눈앞에 있는 사람 -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말을 할 수도 있고, 들을 수도 있는 사람 - 에게 화를 내기도 한다.

묻고자 하는 건 하나다.

"왜 그랬어?"

나도 덩달아 묻고 싶다.
왜 그랬을까.

영화에서 기억에 남는 걸 두 가지만 이야기 하라고 하면 하나는 위에 적은 "왜 그랬어?"이고 다른 하나는 '불사신'이라고 말하려고 한다.

왜? 라는 물음은 때때로 몹시도, 대단히도 공허한 것이 된다. 그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이 단 하나일 때,
그러나 그 사람이 더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때 말이다.
그럼에도 남은 이는 이 물음을 거듭한다.
대답할 사람이 이 세상에는 없음을 이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 거듭 묻게 되는 거다.
이때의 물음의 의도는 역시 정답이나, 사실을 알고 싶은 게 아니다. 그저, 누군가는 이 고민과 괴로움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과 그 이유를 모르는 게 자기만은 아니라는데서 느끼게될 안도와 전혀 무관한 대답이라고 해도 돌아오는 응답이 있음을 확인하고자 하는 거였을 거다.

왜?
낯선 타인, 거의 아는 바가 없기에 모른다고 해도 좋을 누군가가 이 물음에 답을 하는 순간,
이 질문은 자신을 떠나 타인의 것이 되어버린다.
대답할 수 없는 사람, 대답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 대답할 수 있는 질문.
그건 이미 물어본 사람과 무관한 그 어떤 낯선 것이 되어버리는 거다.

"왜 그랬을까?"는 이야기 전체를 지배하는 무거운 질문이지만 이제는 이야기의 당사자가 아닌 관객과 독자의 것이 된다.


"그는 왜 그랬을까?"

관객이면서 독자인 나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이 물음에 대해 또 다른 관객과 독자는 자기가 생각하는 이유를 내놓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이제 이 물음은 내것이 아니게 되었다. 이미 답을 얻었으므로.

'불사신'은 뭘까?
바닷가 마을에는 전설적인 해녀가 있다. 겨울 아침 이 해녀가 배를 띄워 나간 날, 바다는 사납고, 거칠어져서 나이든 해녀 하나쯤은 가볍게 휩쓸어 버릴 것처럼 변해 버린다.
기적적으로 이 해녀는 살아서 돌아온다. 그때 걱정하던 부인에게 남편이 하는 말이 "불사신 이라니까"다.

불사신이라니, 터무니 없는 소리다. 바다를 가장 잘 아는 여자라는 것만으로 작은 고깃배가 거친 풍랑이 이는 바다에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만큼 바다는 온순하지 않다.
만약 불사신에 가장 가까운 존재가 있다고 한다면 그는 무수한 상처와 흉터를 지니고 있을 거다. 온몸과 마음이 상처와 흉터로 가득해서 더는 상처 입을 공간이 없다고 해도 그는 불사신이 되지 못한다. 오직 죽음으로 들어서게 될뿐이다.

불사신에 대한 믿음은 결국 인간의 끝없는 의혹과 미련이 형상화된 것에 불과하다. 그녀라면, 그라면 괜찮을 거라는 믿음, 그 믿음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건 더는 불안해하거나 의혹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자유다.

신이 불사의 존재인 이유는 죽음은 그 자체로 혼돈과 불안, 의혹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더 완전해지기 위해 신은 자신에게서 죽음을 분리한 것 아닐까.

영화를 보고 하루가 넘게 지나서야 돌아본다.

나는 하나의 "왜?"가 되거나 당신이 던지는 왜에 대해 하나의 "대답"을 내놓을 수 있는 존재밖에는 되지 못한다.

불사의 존재도 아니고, 불사의 감정을 갖고 있지도 않으며, 불사의 애정이나 불사의 기억도 되지 못함을 안다.

<환상의 빛>은 실재하는지 아닌지 모호하기에 환상적이다.
환상은 두려움이 되기도 하지만 기쁨이 될 수도 있다.

적당한 환상을 품는 것, 꿈을 갖는 것, 바라고 물음을 던지는 것.
그리고,
무엇이든 되고자 하는 것.

그것이 환상의 세계가 아닌, 현실의 세계를 살아가는 나의 방식임을 새삼 깨닫는다. 나는 여전히 나라서 아직은 괜찮다. 그리고 앞으로도 얼마간은 괜찮을 거다. 그럴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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