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태풍을 잠재우는 일이 간단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문득, "올해 태풍이 지나갔던가?"하고 묻는 내가 있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
'오늘보다 더 더웠던 날이 있었나?'하고 가만히 묻게 되던 날,
작은 극장에서 만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태풍이 지나가고>는 더위를 대신해 나를 집어삼켰다.
영화가 끝나고, 밖에 나가면 어쩐지 태풍이 불 것 같고, 나가보니 태풍은커녕 미풍도 불지 않았고, '아, 역시 인생에 뜻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구나'하고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렸고, 그 억지를 인용해 아쉬워했고, 영화와 감독을 추천해준 이에게 고마움을 전했으며, 웃음 넘치는 가벼운 영화는 아니더라도, 어쩌면 훈훈했을지 모를 이야기가 남긴 묵직한 충격에 멍해졌고, 나는 화가 났고, 더위를 먹을 것 같았고, 어쩌면 약속을 어겼으며, 집으로 와서는 새벽에야 잠들었다.
<태풍이 지나가고>는 영화 안에서도 밖에서도 나를 놀라게 했는데, 먼저 영화 밖에서 놀라게 된 건 원안부터 감독, 연출, 각본까지를 고레에다 히로카즈라는 한 사람이 해냈기 때문이다. 경험에는 한계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재능'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하는 게 가장 정확할 때가 있다는 거다.
<태풍이 지나가고>는 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했지만 이후 이렇다 할 작품을 쓰지 못하고, '취재'를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흥신소에서 사람들의 뒤를 캐는 일을 하며, 그렇게 번 돈의 상당 부분을 도박에 탕진하고, 이혼한 전 부인과의 관계는 나아지지 않고, 그럼에도 한 달에 한 번 보내는 아들과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마음에 담고 있는 생각을 털어놓을 사람은 없고, 거기에 더해 돈도 궁해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혼자 남은 늙은 어머니의 집 벽장을 뒤적거리거나 누나에게 돈을 빌리러 다니고, 그러면서도 복권은 도박이 아니라 꿈이라 말하는 한 남자와 가족의 이야기다.
이 남자의 삶은 더하거나 뺄 것 없이 몹시 지질한 것이었다.
무능력한데다 노력도 하지 않는 사람,
솔직하지 못한 주제에 거짓말에는 서툰 사람,
아버지를 미워하면서 가장 미워하던 점을 닮아버린 사람,
무엇보다 안타까운 건,
많은 사람이 그러하듯 이 남자 역시 '잃어버리고 난 후에야 소중함을 깨닫는 사람'이었다는 거다.
영화 안에서 나를 놀라게 했던 건 감정을 꿰뚫는 연기와 대사에도 들어있었지만, 무엇보다 이야기의 틈에 '나'를 끼워 넣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빈틈'이었다. 영화를 본 건 나였고, 영화가 내 안에 들어와야 했을 텐데, 반대로 내가 영화에 들어가 버린 것처럼 느껴졌던 거다.
지질한 삶,
꿈이 사람을 초라하게 한다면,
책임은 어디에 있는 걸까?
꿈을 좇는다는 말은 어쩐지 허허로워서 영화 속 남자처럼 착실하거나 성실하지 않은 태도를 비난하게 되어버리고 만다. 그런데, 꿈에 있어 성실하다는 건 뭘까?
꿈이라고 해야 할까,
어렸을 때 사람들이 꿈을 묻거나, 진로를 조사할 때면 '선생님'이라고 적었다.
이유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처음의 이유는 부서지고 흩어져 버렸고, 나중에 다시 만든 이유 역시 '가르치는 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선생이란 앞서 태어난 사람이란 뜻이다.
가르치는 것보다 중요한 건, 보여주는 것, 삶을 통해 드러내는 것이라 믿었다.
나란히는 아니더라도 함께 나아가는 사람,
받은 도움, 얻은 깨달음을 가장 자연스럽게 전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선생님의 모습은 몹시 '낭만적'으로 보였던 거다.
이렇게 말하면, '진짜 선생님'들은 꼭 그렇지도 않다고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꼭 그럴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한다. 그저 상상할 뿐이지만.
결국 나는 선생님은 되지 못했다. '되지 않은 거다'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미 아닌 걸 '않은 거'라거나 '못한 거'라고 구분하려고 애쓰는 건 의미 없는 일이다.
<태풍이 지나가고> 속 남자는 어려서부터 얼마간의 글쓰기 재주를 갖고 있었다. 그 재주를 믿고 소설가가 되었고, 문학상을 받았고, 그 결과 이혼남이 되었고, 항상 돈에 쪼들리는 생활을 하며, 일확천금을 노린다기보다 오히려 무능한 자신을 벗어나기 위해 도박을 하고, 결국 더욱더 무능력해지는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재능'은 '축복'인 걸까?
이렇게 묻고 아래처럼 답하게 되는 일은 무척 두렵지만,
어중간한 재능은 축복이기보다 재앙 인지도 모른다.
재능은 있는데, 노력하지 않아서라거나,
노력은 했는데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거나 하는 말들 역시 변명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노력에 더해 운조차 재능이기 때문이다.
<태풍이 지나가고>는 유난히 잦았던 태풍 가운데 하나가 지나가면서 끝이 난다.
맑게 개인 하늘,
희망찬 발걸음,
의외의 발견과 깨달음,
슬쩍 엿보이는 변화와 희망의 가능성.
하지만 그런 결말은 이후에 그들의 삶에 대해 무엇을 말하지도 약속하지도 않는다.
영화를 보고 찾은 곳에서 나를 본 사람들이 '화난 것 같다'라고 말해줬다.
<태풍이 지나가고>는 끝이 났는데, 아마 마음에 태풍이 일었던 모양이다.
화가 나 있었다.
그리고 그 대상은 나 자신이었다.
왜 화가 났느냐고 물어도 대답하기는 어렵다.
'그냥'이라고 뭉뚱그린 단어 속에 지난 삶의 모든 순간과 선택이 들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난히 태풍이 잦은 해가 있다.
올해처럼 유난히 더운 해가 있다.
그런데,
정말 그 해에 유난히 태풍이 잦았고, 올해에 유난히 더운 걸까?
태풍은 정말 강력하다.
자연의 재해를 직접 경험하고 나면 오히려 겸허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너무나 거대하기 때문이다.
단 하룻밤에 지형을 바꿀 수 있는 건 신과 전쟁을 제외하면 자연뿐이다.
하지만 모든 강력한 태풍이 반드시 피해를 남기는 건 아니다.
사나운 태풍이 있고, 온화한 태풍이 있는 건지도 모른다.
나의 경우에는 사나운 태풍을 더 잘 기억한다.
좋은 일보다 나쁜 일이 더 마음에 남는 것처럼 말이다.
삶에도 태풍이라 부를만한 일이 종종 일어난다.
때로는 온화하게, 때로는 사납고 거칠게 휘돌다 흩어지는 거다.
두렵고 또 떨리는 일이지만 자연이나 삶 모두에게 태풍은 필요하다.
거대한 힘만이, 해낼 수 있는 것도 있기에.
꾸준하고 작은 노력도 중요하다.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을 부르듯, 그 작은 노력이 거대한 변화를 만들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