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의 얼굴들』

#1. 유감

by 가가책방

한 소년이 있었다.

소년에게는 아무도 없었다.

부모는 모두 세상을 떠났고, 형제도 남기지 않았다.

소년에게 남은 건 말라죽은 나무 한 그루뿐이다.

누구였을까?

소년에게 이렇게 말해준 이가 있었다.

"나무에게 계속 물을 줘. 그러면 반드시 꽃을 피우게 될 거야."

소년은 그 말을 믿었고, 몇 년이나 물 주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이야기가 여기까지 왔을 때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하나는 기적처럼 나무가 살아나는 거다.

살아날 뿐 아니라 꽃을 피우는 거다.

다른 하나는 나무는 이미 죽어버렸기에 아무리 시간이 지나고 끝없이 물을 주더라도 언제까지나 살아나거나 꽃을 피우지 않을 거라는 거다.

다만, 물을 주는 일을 그치지 않는 동안 소년은 성장했을 거고, 살아남아 자신의 삶을 이어갈 수 있게 된다는 거다.

아, 하나가 더 떠올랐다.

또 다른 하나는 앞의 둘과 달리 비극이어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를 더 생각하는 의미가 없을 테니까.

소년에게 나무에 물을 계속 주라고 한 사람은 아주, 아주 나쁜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소년이야 어떻든 자신의 거짓말을 믿고 죽은 나무에 끊임없이 물을 주는 모습을 보며 멍청하다 욕하고, 미련하다 비웃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소년은 자신이 마셔야 할 물까지 나무에게 줘버리고, 결국 역시 죽어버렸을 거다.

그랬을지도 모른다.

생각이 여기까지 왔을 때 다음 이야기가 시작됐을 거다.

문제가 생겼다. 그다음 이야기가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는다는 거다.

다음 이야기가 기억나지 않아도 이야기 속 시간은 흘러갔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소년은 여전히 죽은 나무에 물을 주었다.

어느 날, 소년은 나무에 반짝이는 꽃이 핀 걸 보게 된다.

죽은 나무에는 꽃이 피지 않는다.

꽃은 빛이었고, 빛이 죽어서 말라버린 가지에 피어나듯 반짝이면서 꽃이 핀 것처럼 보였던 거다.

어떻게 빛이 반짝이게 됐는지는 상상에 맡겨야겠다.

분명한 것 하나는 그 빛이 소년에게서 오지는 않았다는 거다.

동시에 그만큼 분명한 것 또 하나는 소년이 죽은 나무에 물 주는 일을 하지 않았다면 공간 가득 피어난 꽃을 볼 수 없었을 거라는 거다.

유감스럽게도 형편없는 기억력은 며칠 전에 들었던 감동적인 이야기조차 제대로 전하지 못한다.

한 가지는 이해했으니 이 이야기는 무의미해지지 않는다.

믿음은 사람을 살아가게 하고, 때로는 기적을 일으킨다.

정말 중요한 건 이 믿음이 딱딱하거나 꼿꼿하기만 한 건 아니라는 거다.

유연함, 풀이 바람보다 먼저 누워 부러지지 않고, 눈이 내리는대로 휘어져 꺾이지 않는 대나무처럼 정말 굳건한 믿음은 유연하고 또 여린 거다.

이야기를 오래 기억하지 못하는 건 유감이지만, 쉽게 잊는다는 건 좋은 거다.

사람이란 언제나 좋은 일은 간단히 잊고, 나쁜 일을 오래 기억하기에, 잊어버리려면 좋은 쪽 나쁜 쪽 할 것 없이 몽땅 잊는 게 더 낫다는 거다.

소년은 바르게 이해했던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은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소년의 기쁨이 지켜졌다는 거다.

나무가 살아나 꽃이 피고 잎이 돋아나지는 않았지만 기뻐할 수 있었다는 거다.

기쁨.

기쁨보다 기쁨이 되어주는 존재를 잃어버릴 수 있음이 더 두려운 거다.

나무가 살아나지 않아도, 꽃이 피지 않아도, 물을 주는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는 한 소년은 기뻤을 거다.

소년은 언제까지나 기쁨으로 살고, 기쁨 속에 살다, 그렇게 삶을 끝낼 수 있었을 거다.


이해는 소년이 느꼈을 기쁨처럼 잔혹한 면모를 품고 있다.

완전한 이해가 있을 수 없기에, 이해는 언제나 불완전하다.

불완전하다는 건, 일방적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일방적이라는 건, 상대방에게는 두려움이 될 수도 있다는 거다.

두려움은 몰이해가 지닌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이해는 몰이해와 따로 떨어져 있는 게 아니다.

흔히 듣는 말이 있잖은가.

"이해해."

"그런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이 말을 들어본 적 없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행운을 타고났는지 깨달아야만 한다.

사람들은 이해한다면서 모른다고 말한다.

그것이 몰이해의 어법인 줄도 모르고, 이해한다고 자꾸만 말하고 다시 말한다.

유감스럽지만, 자꾸만 같은 말을 되뇌면 거짓말처럼 들리게 된다.

소년의 경우 같은 우연한 기적은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유감스럽게도 현실은 간단히 이해를 허락하지 않는다.

언제나 몰이해는 이해의 가면을 쓰고 나타나 달콤한 말로 속삭인다.


"죽은 나무지만 계속 물을 줘."

"그러면 언젠가 그 나무에 꽃이 필 거야.(피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더 이야기하고 싶지만 유감스럽게도 물을 주러 가야 할 시간이다.

운이 좋다면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그 죽은 나무 앞에서.

서로의 물병을 들고.

유감스럽게도, 아주 우연히.


#1. 유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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