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남자가 연애를 못하는 서른네 가지 이유
"사람의 세상을 단순히 생각하면 오로지 ‘내 편’과 ‘네 편’이 있을 뿐이다. 행복한 사람들은 ‘내 편’이 많다. 불행한 사람들은 ‘네 편’이 많다. 동의하는가? 허나, 아니다. 정말 행복한 것은 언제든 스스로 자기 편에 설 수 있는 사람들이다. ‘내 편’이 아무리 많아도 스스로 자신을 반대하고 미워한다면 행복하기 어려운 거다. 모든 삶의 마지막의 마지막에는 자신만이 남는다."
“가제는 게 편”
남자가 학교에서 배웠던 속담이다.
“남의 편이라 남편”
언젠가 어떤 아주머니들의 대화 속에 오가던 농담이다. 그러나 어찌나 서로 공감하던지 농담인지 아닌지 지금도 판단하기 어려운 말이다.
“언제나 나는 나의 편”
얼핏 남자는 언제나 스스로를 견제하고, 때로는 반대하며, 가장 지독한 독설가이자 비판자의 자리에 서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남자는 그런 자신의 성향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것이 자신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다. 남자는 누구보다 스스로에게 가혹하지만 누구보다 자신을 아끼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남자는 언제나 자기편이었다.
남자가 생각하기에 ‘편’이라는 것은 사람의 삶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어린아이들이 놀이를 시작하기 전에 가장 먼저 정하는 것이 편이다. 짝이 모자랄 때는 평소에 놀리고 괴롭히던 아이를 데려다 끼워 넣을 정도로 편을 짜는 것은 절실한 문제다. 자기편이 마음에 들고 아니고는 편이 생기고 난 후의 문제다. 운동 경기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동네 축구에서 프로의 경기까지 편을 나누지 않으면 시작할 수 없다. 처음 편을 나눈 것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었다.
남자는 이런 생각도 종종했다. 남의 편이라 남편이라고 한다지만 남편이 없이는 아이도 있을 수 없기에 그 남편조차 세상을 구성하고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것 아닐까 하고 말이다. 자신이 살아가는 거대한 사회를 지탱하는 하나의 중요한 구성원이라는 의미에서 보면 남편은 남의 편인 동시에 자기편인 것이기도 할 거였다. 결국 자기편이 없이는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남자가 생각하기에 세상은 크고 작으며, 많고 적은 자기편들의 결합체였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한 적이 없었다. 그건 또 무슨 소리냐며 핀잔이나 듣게 될 테고 ‘네 편’을 늘리는 결과나 불러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이런 것들은 진짜 ‘내 편’에게나 할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 ‘내 편’이 이런 이야기에 관심이 있다면 말이다.
남자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런 무관심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그 사람들은 가장 중요한 것을 지키지 못한 나약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허무한 이유로 목숨을 내던졌다. 자기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세상에 커다란 상처를 남기는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했다. 그리고 그런 선택의 가장 큰 요인은 충동이었다. 남자는 그들의 선택을 허무하고 이기적인 자기애의 말로라고 생각했다.
다른 하나는 절박했던 순간에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는 방법이 그것뿐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때때로 인간은 자신의 존엄성에 대한 도전을 받는다. 남자는 사람의 삶은 도전과 극복의 연속이기도 하다는 생각에 동의하는 편이었다. 분명 삶에는 시련이 그칠 날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시련에도 정도라는 것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들은 “신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시련만을 주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시련이 끝나지 않는 것은 그 사람들의 책임이라고 했다. 남자에게는 너무 많은 시련들이 의미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 시련의 어디에 신이 있는가? 사랑이 있는가? 미래와 꿈이 있는가? 짓밟으려 달려드는 자들에게 짓밟히는 삶을 견뎌야 하는 삶은 인간다운 삶이라고 할 수 없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더 부서지지 않기를, 비참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삶을 끝내는 길을 선택했다. 남자는 그 사람들이 마지막 순간에 누구의 편에 서 있었을지 알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어림짐작도 할 수 없었다. 아마도 남자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이 ‘내 편’이었는지 ‘네 편’이었는지 말이다.
남자는 복수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다. 자신의 삶을 망친 사람들에 대한 복수를 위해 살아가는 삶은 누구를 위한 삶인지, 그런 삶에 행복이 있을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런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그렇다면 그들 역시 누구의 편인지 알고 싶었다. 막연하게는 자신을 괴롭게 했던 사람들보다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이 최고의 복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지금을 살아가는데 충실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는 문제는 풀리지 않았다. 모든 복수는 궁극적으로 자신을 위한 것이어야 했다. 희생이나 앙갚음을 위한 복수는 결국 자신 또한 다치게 할 것이 분명했다. ‘내 편’이라면, 자기편이라면 스스로를 소중히 해야 했다. 적어도 삶의 이 부분에서는 이기적 이어도 괜찮은 거였다.
남자에게는 특별히 복수할 대상도, 괴롭히는 사람도 없었다. 남자 역시 대단히 흔한, 보통의 일상을 살아가는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보통의 삶에도 ‘내 편’은 꼭 필요한 것이었다. 보통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보통’이라는 단어의 의미와는 달리 무척 어려운 것이었다. 남자가 볼 때 보통의 삶이란 언제든 나빠질 수 있는 위태로운 것이었다. ‘최악이다’는 말이 지금처럼 흔하게 쓰이던 때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종종했다. 반대로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는 길은 좁고도 고된 것이었다. 이 좁은 길에서 많은 사람들이 지쳐서 나가 떨어졌다. 정상으로 향하는 좁은 절벽 길의 한쪽은 언제나 낭떠러지다. 더욱 좋지 않은 것은 그 좁은 길을 가는 동안 끊임없이 다투고 경쟁한다는 것이었다. 이제는 떨어지지 않는 쪽이 이상해 보일 정도다. 이것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처럼 보이던 사람들이 최악의 삶을 경험하게 되는 이유였다. 누구를 위한 것인지 잊어버린, 자신의 ‘내 편’으로 나선 것이 아닌 누군가와 무언가를 위한 경쟁이 목적을 달성하게 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었다. 그래서 남자는 보통의 삶을 추구했다. 자기가 시키는 대로, 언제나 스스로 자기편에 서서 생각했다.
남자에게는 야망이 없었다. 자기 자신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 가운데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것도 없었다. 스스로 자신의 편에 서기 위해 필요한 것은 “언제나 나는 나의 편”이라는 생각 하나뿐이었다. 자신을 잃고 세상을 가진다고 해도 그것을 행복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자신이 되기 위해 많은 것을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모든 것을 받아줄 필요도 없었다. 결핍은 결핍으로 받아들이면 되는 거였다.(3화 참고) 정말 채워야 하는 것에 집중해도 간신히 보통의 삶이었다. 세상이 나의 편이 되어주지 않는다고 해서 자신을 등지고 세상의 편에서 스스로를 괴롭힐 까닭은 어디에도 없었다. 누군가의 사랑을 얻기 위해 가장 소중한 자신을 상처 입힐 필요도 없다. 사랑을 위해 달라질 수는 있지만 사랑을 위해 상처를 자처한다며 그 상처는 언젠가 원망이 되고 원한이 되어 사랑에게 돌아갈 것이었다.
남자는 나의 편에서 사랑의 편에 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를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을 나 역시 받아들일 수 있을 거였다. 물론 이 남자 역시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편에 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을 버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함께 가는 것이어야만 하는 거였다. 남자는 언제나 남자의 편이었다. 그래서 연애를 못했다. 남자는 언제나 여자의 편인 그 여자를 만나야만 하는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