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우연
무료하고 뻔해서 식상할 수 있는 이 세상이 그나마 재미있어지는 순간이 있다.
있을 리 없어서, 믿거나 믿지 않거나 할 것도 없이, 생각조차 하지 않던 일이 우연히 일어나는 그런 순간 말이다.
사실 이런 우연은, 우연 자체로는 재밌지 않다.
우연과 맞닥뜨린 사람이 상상도 못했던 사건에 당황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재밌어지기 시작하는 거다.
그러니까, 얼마 전에 있던 일이다.
주말에는 보통 한가한데, 그날도 그렇게 보통으로 한가한 날이었다.
날씨도 덥고 해서 따뜻한 거나 마시면서 찬 공기를 만끽하는 사치나 누려볼까 하는 생각으로 집을 나섰다.
녹아내릴 것 같은 햇살 탓에 어느 때보다 느릿하게 걸었다.
더운 날이면 느려지는 걸음을 두고 어떤 이는 이렇게 얘기했다.
"더운데 천천히 걸으면 햇볕 때문에 더 덥지 않아?"
대답은 이랬다.
"천천히 걸으면 바람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서."
보통 정도 더운 날에는 정말 천천히 걷는 게 도움이 된다.
오늘은 아니지만.
오늘따라 역이 너무 멀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조금 서둘러 볼까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묘한 게 시야에 들어온 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아주 힘차게 팔을 저으며 걸어가는 남자가 있었다.
'그렇게 걸을 수도 있지!'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보태는 말인데, 그 남자는 나만큼이나 천천히 걸었다.
아주 힘차게 팔을 저으며 천천히 걷는 건 생각보다 힘이 많이 드는 일이다.
호기심 때문에 걸음이 빨라진 건지, 그 남자가 나보다도 더 천천히 걸었던 때문인지 우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가까이서 보니 예상대로 그 남자는 이미 땀범벅이었다.
나를 앞질러 가던 사람들도 그 남자를 힐끗거리며 '별 미친 꼴을 다 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 남자는 꿋꿋했다. 몹시도. 지나칠 만큼. 대단히.
결국 그 남자를 따라잡고 말았다.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그 남자가 너무 천천히 걸었던 탓에 그렇게 되고 말았던 거다.
햇살은 너무 따사로웠고, 그 남자는 너무너무 천천히 걸었고, 나는 너무너무너무 생각이 없었다.
앞에서도 몇 번이나 말했지만 나는 천천히 걸었다.
그 남자는 나보다 더 천천히 걸었다.
우리는 좀처럼 멀어지지 않았다.
잠시 동안은 다른 사람이 보면 일행이 아닐까 오해할지도 모르겠다 싶을 정도로 나란히 걸었다.
조금 더 걷자 조금 앞설 수 있었다.
빨리 떼어내고 멀어지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던 건 아니다.
다만 햇살이 너무 따사로웠고, 너무너무 더웠기에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 모든 건 분명 '우연'이었다.
햇살이 너무 따사로웠던 것도, 내가 천천히 걸었던 것도, 그 남자를 본 것도, 그 남자가 나보다 천천히 걸었던 것도, 내가 그 남자를 따라잡았던 것도, 우리가 나란히 걸었던 것도, 내가 그 남자의 앞을 걷게 된 것도 모두.
그 남자는 계속 헉헉 거렸고, 땀범벅이었으며, 아주 천천히 걸으면서, 아주아주 힘차게 팔을 저었다.
묘한 인간이었다.
인간이라고 적어도 될까.
그 남자는 상식적인 면에서 도무지 인간적이지 않은 인간이었다.
어쩌면 미친 건지도 몰랐다.
쓰러지기 전에 119라도 불러야 하는 건지도 몰랐다.
그 남자가 곧 나를 부를 거라는 것도 몰랐다.
"여보시오."
누군가가 다른 누구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거, 여보시오. 헉헉"
어쩐지 가까운 곳에서 누군가가 다른 누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거참, 여보시이오. 허허헉헉"
믿고 싶지 않았지만 어쩐지 가까운 뒤쪽에서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돌아보면 누가 있을지 이미 알고 있다는 걸 알았기에 더욱더 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다시 생각해보니 부르는 말투도 묘했다.
그러고 보니 입고 있는 옷도 대단히 묘했던 것 같았다.
처음의 생각, 묘하다는 건 행동부터 옷차림까지의 모든 것이 묘하다는 의미였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아, 왜 모든 깨달음은 한 걸음 늦고 마는 걸까.
금방이라도 그 힘차게 젓던 팔이 어깨 위에 철썩 내려앉을 것만 같아 어쩐지 등골이 서늘해졌다.
멀어지던 숨소리가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발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결국 우리는 다시 나란히 걷는 모양이 되고 말았다.
오른쪽, 오른쪽에 바짝 붙은 자리에 여전히 힘차게 팔을 저으며 천천히 걷는 그 남자가 있었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의외로 멀쩡한 얼굴이 있을 줄 알았는데, 그 얼굴은 땀범벅에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어 전혀 멀쩡하게 봐줄 수가 없었다.
아, 갑자기 주변 온도가 3도쯤 올라간 것마냥 후끈 달아올랐다.
그 남자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던 거다.
그 남자는 웃는 것 같았다.
정확히는 웃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마치 땀이 표정마저 지워버린 것처럼 그 남자에게 남은 건 올라간 입꼬리와 찌푸린 눈뿐이었다.
분명 최대한 친근함을 담아 웃고 있는 것일 거라고 믿고 싶어 지게 만드는 그런 얼굴이었다.
"거, 여보시오. 하나만 물읍시다."
의외였다.
이처럼 인간적인 질문이라니.
이 너무 따사로운 햇살 아래서, 너무너무 더운 공기 안에서, 아주 천천히 걸으면서, 대단히 힘차게 팔을 젓는 남자가 던질 거라고는 생각도 못한 질문이라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네."
당황했던 탓이다.
생각지도 않았던 대답이 튀어나간 건, 너무 보통이라서 너무너무 당황했던 탓이다.
무시하고 지나갈 수 없게 되어버렸다. 다시 고개를 돌려 앞으로 서둘러 걸어갈 수 있던 기회를 잃어버린 거다.
"네, 말씀해보세요."
대화가 시작되었다.
불과 몇 초전까지는 상상도 못했던 대화가 현실이 되는데 필요했던 건 아주 사소한 우연이었다.
아, 우연이라니.
우연은 우연을 믿지 않는 사람만 찾아다니는 모양이다.
마치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왔다는 선언처럼 말이다.
그 남자는 여전히 천천히 걸었고, 힘차게 팔을 휘둘렀으며, 얼굴은 열이 올라 뻘갰고, 온통 땀범벅이었다.
그 묘한 꼴로 그 남자는 이렇게 물었다.
"내가 이상해 보이오?"
물음이 지나치게 정상적이었다.
"네."
생각도 못했던 단호한 대답이 튀어나갔다.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울 것처럼 보이오?"
지나칠만큼 정상적인 물음이 이어졌다.
"네, 도무지."
이번에도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단호한 대답이 이어졌다.
"아아, 역시. 고맙소."
지나쳐도 너무 지나칠 정도로 정상적인데다 예의바른 대답이 이어졌다.
"고맙긴요."
이번에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남자는 여전히 천천히 걸었고,힘차게 팔을 휘둘렀으며, 얼굴은 열이 올라 뻘갰고, 온통 땀범벅이었지만 더 이상 묘하게만 보이지 않았다.
묘한 일이었다.
그 남자는 물어볼 건 다 물었다는 듯 다시 앞을 보고 걷기 시작했다.
천천히, 팔을 휘두르며, 땀을 흘리면서.
나는 서둘러 걸을 수 있었다.
그 남자를 떼어놓고 멀어질 수 있었다.
나도 모르게 한참을 나란히 걸었다.
이상한 사람.
왜 그런지 이번에는 이쪽에서 묻고 싶은 게 생겨났다.
"저, 지금 뭐하시는 건가요?"
그 남자는 못 들었는지 헉헉거리며, 천천히 걸으면서 힘차게 팔을 휘둘렀고, 땀을 흘렸다.
"저기, 지금 뭔가 하고 계신 건가요?"
나는 더 크게 물었다.
그 남자는 갑자기 멈췄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 것 같더니, 한결 멀쩡해진 얼굴로 이번에는 정말로 웃어보였다.
"이해 실험."
그 남자는 멈출 때와 마찬가지로 갑자기 대답했다.
"응?"
"인간 이해에 관한 실험을 하고 있소."
내 표정이 이상했는지 남자는 다시 대답했다.
"어엉?"
분명 그 남자에게 얼간이처럼 보였을 거라는 걸 알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해 실험이라니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는 거였다.
"인간이 묘한 짓을 하는 다른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실험하는 중이오."
그 남자는 당황하는 나를 '이해'한다는 듯 웃으며 얘기했다.
그 웃음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당황하는 나를 이해하며, 당황하는 게 자연스러우니 마음 쓰지 않는다는 위로와 함께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확신이 담긴 그런 웃음이었다.
나는 우연을 믿지 않는다.
우연이란 결국 무수한 선택이 만들어낸 필연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운명 역시 믿지 않았다.
운명이란 무수한 필연이 만들어낸 당연한 결과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 남자와의 만남을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어쩔 수가 없다.
그 남자와의 만남은 우연이었다.
그 만남이 운명을 바꿔놓을 줄도 모르고, 그렇게 생각해버렸다.
그게 우리의 운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