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의 얼굴들』

#3. 이해 실험

by 가가책방

그 남자와 나, 우리는 마주 앉았다.

햇살이 너무 따사로웠고, 나는 천천히 걷고 있었고, 나보다 천천히 걷는 남자를 보았고, 그 남자는 아주 힘차게 팔을 저었고, 나는 그 남자를 앞질렀고, 그 남자는 앞선 나에게 물었고, 그 물음은 "내가 이상해 보이오?"였고, 나는 이상하다고 답했고, 그 남자는 한 번 더 물었고, 그 물음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울 것처럼 보이오?"였고, 나는 "네, 도무지."라고 답했고, 그 남자는 "아아, 역시. 고맙소"라고 했고, 나는 "고맙긴요."라고 답했고, 그 남자는 볼 일 다 봤다는 듯 천천히 걷기 시작했고, 다시 힘차게 팔을 휘둘렀고, 이번에는 내게 궁금한 게 생겨버렸고, 나는 그 남자에게 "저, 지금 뭐하시는 건가요?"하고 물었고, 그 남자는 못 들었는지 다시 헉헉거리며, 천천히 걸으면서 힘차게 팔을 휘두르며 땀을 흘렸고, 나는 다시 "저기, 지금 뭔가 하고 계시는 건가요?"하고 물었고, 그 남자는 갑자기 멈췄고, 나도 멈췄고, 그 남자는 호흡을 가다듬더니 한결 멀쩡해진 얼굴로 웃어 보였고, "이해 실험"이라고 답했고, 나는 당황해서 "응?"하고 어정쩡한 신음을 내질렀고, 그 남자는 "인간 이해에 관한 실험을 하고 있소."하고 정상적이고도 친절하게 답했고, 나는 "어엉?"하며 분명 이상한 표정을 하고는 얼간이처럼 어정쩡한 보습을 보였고, 그 남자는 정말 친절하게도 "인간이 묘한 짓을 하는 다른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실험하는 중이오."하고 완결된 문장으로 설명했고, 그 남자는 당황하는 나를 이해한다는 듯 웃었으며, 그 웃음은 처음 보는 것이었고, 나는 그 남자의 웃음에 확신과 함께 안심이 되는 걸 느꼈다.

그 남자와 나, 우리는 아주 우연히 만났다.

정말 우연이었을까?

그 남자는 '이해 실험'을 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이해에 골몰하고 있었다.

우리는 어쩌면 닮아있었다.

너무 따사로웠던 햇살 아래를 천천히 걷는 것부터, 이해에 집착하는 것까지.

나는 우연을 믿지 않았다.

무수한 선택이 만들어낸 결과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그랬을까?

그 남자와 나, 우리는, 우연히 만났다.

그 남자와 나, 우리는, 우연히 마주 앉은 건 아니었다.

우연은 인간이 이해하기 곤란한 이벤트다.

많아지고 잦아질수록 혼란만 더하는 아주 곤란한 이벤트다.

나는 남자와의 인과 관계를 풀고 싶었다.

그 남자와 나, 우리가 어떻게 만나게 된 건지 이해하고 싶었다.

할 수 있다면 그 남자가 하고 있다는 '이해 실험'에 대해서도 듣고 싶었다.

어떤 실험들을 했는지 궁금했다.

그 실험들이 인간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됐는지도 알고 싶었다.


처음 생각했던 장소는 아니었지만, 집을 나선 목적이었던 날씨도 덥고 해서 따뜻한 거나 마시면서 찬 공기를 만끽하는 사치를 누리기에 적합한 장소는 얼마든지 있었다.

나는 염치를 아는 인간이다.

앞으로 이것저것 물어볼 생각으로 내가 사기로 했다.

언제나처럼 따뜻한 걸 주문했다.

그 남자도 당연하다는 듯 따뜻한 걸 주문했다.

나는 배려를 아는 인간이다.

"날도 더운데 차가운 걸 마시는 건 어때요?"

이렇게 물을 정도의 배려는 안다는 거다.

"아니오, 따뜻한 게 좋소."

그 남자는 단호했다.

내가 할 소리는 아니지만 날도 더운데 따뜻한 거라니, 이상했다.

나는 상식을 아는 인간이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다."정도의 상식은 있다.

그 남자와 나, 우리는, 그렇게 마주 앉았다.

저마다의 따뜻한 걸 앞에 두고.

문득 지난주에 본 소개팅 남녀가 떠올랐다.

당황해서 흔들리는 동공 지진을 애써 가라앉히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이며, 억지 미소를 입가에 싣기 위해 아드레날린을 쏟아붓고, 자기도 재미없을 얘기를 화제로 올리느라 도마 위의 생선처럼 위태로웠던 남자가 있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로 남자의 모든 시도를 1단계로 봉쇄, 2단계로 묵살, 3단계로 박살 낼 것처럼 굳어 있던 여자도 있었다.

부정하고 싶지만 소개팅 남자가 나인 것 같았고, 소개팅 여자가 그 남자인 것만 같았다.

그까짓 '이해 실험'이 뭐라고, 떠나려는 남자를 불렀을까.

"잠시 얘기나 하다 가시죠."

어떻게 이런 말을 우연히 만난 묘한 남자에게는 그처럼 태연하게 건넬 수 있었을까.

아아, 이 따뜻한 걸 한 모금에 들이켜고 싶다.

후루룩 마시고 이 자리를 뜨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하며 그 남자의 기색을 살펴봤다.

그 남자는 태연하게 호로록 거리며 따뜻한 걸 마시고 있었다.

사치스러움, 따뜻한 걸 마시면서 찬 공기를 만끽하는 사치를 아는 사람이었다.

아까의 그 웃음이 다시 그 남자의 얼굴에 나타났음을 깨달았을 때 남자가 말했다.

"이해 실험이오."

또 모를 소리다.

"네, 아까 길에서 얘기하셨죠?"

최소한 얼이 빠지거나 멍청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는 생각에 슬쩍 웃음도 흘렸다.

"아니오, 좀 전에 말이오. 방금 실험 하나를 끝냈소이다."

다시, 또, 모를 소리다.

"에?"

결국 다시 얼이 빠지고 말았다.

"당신이 실험 대상이었다는 이야기 외다."

"아아, 저요?"

내가 언제 모르모트가 됐던 걸까.

기억을 되돌려봐도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 남자는 다시 웃었다.

"방금 전까지 당신 얼굴에 재밌는 표정이 드리웠었소. 제법 흥미롭더이다."

뭘까, 뭐였을까?

"그렇게 고민하지 않으셔도 되오. 비웃거나 하는 게 아니니 말이오."

후우, 정말 졌다.

이 묘한 남자는 '이해 실험'이라는 걸 하면서 독심술 같은 걸 익혔는지도 모른다.

더 시간을 끌며 망설여봤자 의미가 없을 거였다.

"좋은 얼굴이오. 좀 전까지 도마 위의 생선 같던 표정을 지었던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소이다."

아, 역시 그거였나.

"하하, 그랬나요?"

모른 척, 은근슬쩍 넘어가는 게 최선이었다.

그 남자는 다시 웃었다.

"솔직히 얘기하죠. 저를 두고 했다는 '이해 실험'이 뭐죠?"

"간단한 것이오. 따뜻한 걸 시키고, 조용히 앉아, 호로록 들이켜고 있으면 장치가 완성되는 그런 실험이었소이다."

역시, 정말, 다시, 또 모를 소리다.

"당신이 상대방의 행동을 어떻게 이해하는가를 실험한 것이오.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에 따라 상대방을 이해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해 당황하거나 곤란해하는지, 그 상황에서 어떻게 벗어나는지, 여러 가지를 알 수 있으니 말 이외다."

뭔가 많이 보고 듣던 말을 현실에서 직접 접하고 보니 오히려 비현실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관찰당하고 있었다니, 실험이었다니, 어쩐지 실망.

생각이 이쯤에 닿아 자아비판을 시작하려고 할 때 그 남자가 말을 걸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통성명이나 하십시다. 선비라고 부르시오."

"아, 예. 선비님이셨군요. 저는 '나'입니다."

나를 '나'라고 소개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상대방이 먼저 '선비'라고 했으니 적절한 대응이라고 생각한다.

"오해를 하셨나 보오. 그 선비가 아니라 다른 선비 외다. 한자로 쓰면 앞에 건 '士'라 적고 선비라 부르고, 뒤에 선비는 '先非'라고 적고, '이전에 저지른 잘못'정도의 의미 외다."

"초년에 이해하지 못하고 저지른 잘못이 많아, 조금이라도 바로 잡아보고자 잊지 말자는 뜻을 담았소이다."

"하, 아, 예."

할 말을 잃게 만드는 화법이다.

"그나저나 '나'라니, 제법 특이한 이름을 쓰는 같소이다만, 달리 의미가 있는 거요?"

이렇게 빨리 고해의 시간이 찾아올 줄은 몰랐다.

'나'에 대해 직접적으로 묻다니, 역시 묘한 인간이다.

"한때 나를 잃고 살던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결코 짧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돌아보면 길지도 않았던 시간이었죠. 그 시간이 끝났을 때 다짐했습니다. 다시는 나를 잃지 않겠다고. 잃어버리게 두지 않겠다고요."

"그뿐입니다."

실제로는 더 복잡한 이유가 있지만 거짓말은 아니었다.

다시는 나를 잃지 않겠다는 다짐은 진실이었다.

"후회하게 될 거외다. 지금 이대로라면 분명 크게 후회할 날이 올 거요. 이해 실험에서도 느꼈지만 '나' 씨는 대단히 자기중심적이오. 그래서는 상대를 이해할 수 없음을 모르지 않을 것임에도 '나'를 내려놓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게 보이오. 스스로를 속이는 건 좋지 않소이다."

"선비는 적을수록 좋은 것이오. 벼슬이 아닐뿐더러 스스로 괴로움을 늘릴 뿐이 외 다."

'이전에 저지른 잘못'이라는 의미로 '선비'라는 이름을 쓰는 그 남자의 과거가 얼핏 보인 것만 같다.

오해와 몰이해의 연속이었을 시간.

자신이 그 오해와 몰이해의 주체였기에 '나'조차 버려야 했던 과거.

이름도 없이, 과거의 잘못을 기억하며, 더 나은 이해를 위해 실험을 계속했을 시간.

그것이 그 남자, 선비(先非)씨였을 거였다.

생각이 여기쯤 닿았을 때 선비 씨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오해를 하는 것 같아 바로 잡는 바이나, 속죄나 반성을 위해 실험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오. 다만, 인간을 이해하고 싶었을 뿐이고, 그 이해가 지나간 잘못에까지 이를 수 있기를 바랄 뿐이 외 다."

그 남자는 스스로를 두고 '이전에 저지른 잘못'이라는 의미의 '선비'라고 불렀지만, 내게는 그 남자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 남자는 충분히 스승이 될만했다.

先非가 아니라 士여도 좋을 거였다.

선비 씨는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 '이해 실험'을 거듭해 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오랫동안 '이해'에 집착하면서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음에 힘들었던 내게 우연이 보내준 스승.

선비 씨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선비 씨에게 '이해 실험'과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고 싶은 마음을 전했다.

의외라고 할까, 선비 씨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첫 번째로 해보면 좋을 '이해 실험'을 알려줬다.

나에게도 낯이 익은 실험이었다.


이해 실험 1. 앞뒤로 팔 흔들며 걷기.

효과. 기분이 좋아진다.

부작용. 이상한 인간으로 보일 가능성이 대단히 큼.

나는 선비 씨의 제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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