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남자가 연애를 못하는 서른네 가지 이유
남자는 친구가 적다. 거의 없다고 해도 그다지 틀리지 않다. 그러나 친구가 적다는 게 남자를 불편하게 하거나 부족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어떤 친구는 몇 년에 한 번 만났고, 어떤 친구는 몇 달에 한 번 만나고는 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한 친구가 “의미 없다”는 말을 자꾸만 하기 시작했다. 낙이 없다는 거였다. 그 말을 듣고 나니 남자도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지금 삶의 의미는 무엇이고, 낙은 무엇인지 말이다. 남자는 거의 모든 순간에 무엇에 대해 생각하고 있거나 생각하지 않는 것을 생각하고는 했기에 하나나 둘쯤 생각해볼 만한 게 늘어난다고 해서 문제가 될 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의미’와 ‘낙’이라는 말은 남자의 생각을 사로잡았다. 결국 남자는 한 동안 자기 삶의 의미와 낙에 대해 생각하느라 다른 생각을 잊고 지냈다.
지금은 거의 쓰지 않지만 한동안 귀찮다는 말 만큼이나 자주 썼던 것이 ‘의미 없다’였다. 기, 승, 전, 죽음 식의 허무주의까지는 아니더라도 남자가 지키려고 애쓰고, 이루려고 노력했던 것들이 허무하게 부서지고, 무의미 한 것이 되어버리는 경험이 거듭되면서 이제는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된 거였다. 사람들은 ‘다 그런 거다’거나, 그런 ‘시련을 넘어서는 자만이 성공에 이른다’거나 했다. 그러나 남자에게는 그런 위로의 말조차 의미 없는 것처럼 들렸다. 남자는 한 때 파우스트 박사를 몹시도 미워했었다. 메피스토펠레스와의 계약에서 놓여나 신의 구원의 받는 그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느꼈다.
“왜 그 많은 악행을 하고도, 그토록 방탕하게 지내고도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거지?”
대답해줄 사람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종종 그렇게 되뇌고는 했다. 그만큼 남자는 파우스트 박사의 구원을 납득할 수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희망을 품기도 했다. 그 희망이란 ‘애씀’에 있었다. 파우스트 박사가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더 나은 자신이 되기 위해 몹시도 애썼다는 사실이라고 믿었다. 남자에게는 메피스토펠레스와 같은 만능의 친구는 없었다. 그러나 언제나 더 나은 삶을 구했다. 물질적인 향상을 떠나 자기 스스로 더 나아졌다는 정신적 만족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랐다. 남자의 과거에 그런 애씀이 있었다.
친구의 말에 남자는 한참을 잊고 지냈던 의미를 다시 떠올리게 된 거였다. 며칠이 지나고 그 친구를 다시 만났다. 언제나처럼 점심 혹은 저녁 한 끼를 먹고 조금의 수다를 떨고 헤어졌다. 어느 순간 남자는 문득 지난 일주일 동안 누구와 마주 앉아 밥을 먹은 일이 없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돌아보니 때로는 2주일, 어떤 날에는 한 달 가까이 매 끼니를 혼자 때워왔음도 떠올랐다. 그 때 남자는 비로소 하나의 의미, 하나의 낙을 알게 됐다고 느꼈다.
친구와 밥을 먹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남자의 삶의 의미는 그런 데 있었다.
‘친구와 일주일에 한 번, 때로는 한 달에 한 번, 한 끼를 함께 하는 것.’
남자에게는 그런 잠깐의 시간이 커다란 낙이 되었다. 한 끼의 밥을 함께 나눈 친구에게 고마움을 느낄 수 있는 삶, 그런 삶이야말로 의미 있는 삶이라고 느꼈다.
남자는 어떤 부분에서는 관습이나 형식에 구애되지 않았다. 덕분에 종종 개념 없는 무례한 취급을 당하기도 했다. 회사에서는 직책이 없는 선배를 ‘모모 씨’라고 부른다고 따로 불려 가기도 했다. 남자는 이름을 부르는 일이 무례한 일이 될 수 있다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뭐라고 불러야 할지 한동안 고민했다. 답이 없는 일이었다.
“이거 해줄 수 있어요?”
“이렇게 바꿔도 될까요?‘
”이렇게 해주세요.“
이 모든 말에 ‘네’라고 했다. 때로는 하찮고 시답잖으며 귀찮고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번거로운 일들이 떠넘겨져 왔지만 유감스럽게 느끼지는 않았다. 그런 시시한 번거로움은 불편한 것이 되지는 못했다. 일 하는 모습이 답답했는지 면전에서 “깔끔한 편은 못 되시나 봐요”라거나 “기억력이 나쁜 거 아녜요”라거나 “아직도 모르겠어요?”라거나 하는 핀잔을 듣기도 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소심하다’거나 ‘의욕이 없다’는 식의 수군거림이 오가는 걸 알았다. 남자에게는 그런 뒷담화들이 아무 의미 없었다.
깔끔한 편이 못 된다는 말은 사실과 달랐으니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기억력이 나쁘다는 것은 사실이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아직도 모르겠는 건 거의 모든 것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기에 그것도 익숙했다. 오히려 알게 해줄 생각이 있느냐고 되묻고 싶은 순간도 있었지만 그것도 그만두었다. 서른 해 넘게 살아온 세상도 여전히 낯설고 서툴렀다. 몇 달 일한 것으로 무엇을 안다고 하는 게 오히려 주제넘은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의미 없는 것에는 아무 의미도 부여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의욕 없는 사람처럼 비치게 되었다는 걸 알았지만 변명하고 싶지 않았다. 결코 무의미한 삶을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스스로의 삶을 진정으로 의미 있게 만들어 줄 그 무엇을 찾고 싶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모두가 세상에 태어난 의미가 있는 존재라고 믿었다. 그런 의미 있는 존재가 의미 없는 삶을 살아도 괜찮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사실 남자에게는 삶의 의미라고 생각하는 것이 있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 가운데 그것만이 다른 모든 의미를 초월하는 동시에 아우른다고 믿었다. 그것이란 ‘사랑’이었다.
사랑이야말로 남자의 삶의 의미로 삼을만한 것이었다.
‘의미 없다’, ‘낙이 없다’는 친구의 말은 새삼스러울 것 없는 말이었지만 남자의 삶을 다시 흔들었다. 남자는 이렇게 끄적이기도 했다.
“사랑할 때 외로웠을지 몰라도 공허하지는 않았다.”
외로움에는 의미가 있지만 공허에는 의미가 없다고 느꼈다. 공허는 외로움을 인정하지 않는 상태였다. 외로움을 부정하고 거부하기에 마음이 텅 빈 듯 허허로워지는 거였다. 남자에게 익숙한 실수였기에 누구보다 잘 안다고 믿는 감정이 공허였다. “외롭지 않다”는 말은 공허하다. 외롭지 않은 사람은 없다. 외로움은 삶의 일부다. 반드시 외로움 때문에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외로움이 있기에 스스로를 사랑하게 된다. 외로움은 자기를 사랑하게 했다. 자기를 사랑하는 일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했다. 외로움의 의미조차 외로움은 아니었다. 외로움의 의미 역시 언제나 사랑을 향해 있던 거였다.
남자의 삶의 낙은 사랑이었다. 사랑이 남자의 삶의 의미였다. 하지만 이 문제가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니었다. 몹시도 쓸쓸하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종이 위에 ‘쓸쓸하다’하고 적고 나면 그 지독한 쓸쓸함이 한 없이 하찮은 것이 되기도 한다. 단지 ‘ㅆ ㅡ ㄹ ㅆ ㅡ ㄹ ㅎ ㅏ ㄷ ㅏ’로 이루어진 글자처럼 되어버리는 거다. 같은 이유로 ‘사랑’ 역시 ‘ㅅ ㅏ ㄹ ㅏ ㅇ’이 되어 그 의미를 잃어버리는 건 아닐까 언제나 겁이 났다.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 아니었다. 사랑이 의미를 잃어버릴까봐 두려웠던 거다. 의미가 달라지는 것과 의미가 사라지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거창하게는 의미 없이 살 수는 있어도 의미 없이 사랑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마치 어린 아이가 김에 싼 밥은 먹어도 김으로 비빈 밥은 먹지 않겠다며 떼쓰듯 남자는 의미에 얽매여 있었다(김밥은 밥을 김이 싸고 있는 거지, 밥에 김이 섞인 게 아니라는 논리). 그래서 남자는 연애를 못했다.
1. 구상 과정 없이 내리 쓴 이야기라 미흡함이 많습니다.
2. 오탈자, 내용 오류 지적은 언제나 감사히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