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 화 미안함이 미안해서.

이 남자가 연애를 못하는 서른네 가지 이유

by 가가책방



비에게서 지켜내고 미안함에 빠트려서야 어디 사랑이겠습니까


남자의 휴대전화는 훌륭하다. 그러나 남자의 일상은 그 전화기의 훌륭함이 적절히 활용되는 것을 방해했다. 남자에게 휴대전화는 보통은 메모장으로 쓰였고 종종 택배 도착 전화를 받았으며 가끔 지인과 통화하는 데 쓰였다. 남자는 휴대전화가 커져서 오탈자를 내는 일이 적어졌음을 기뻐하면서도 보통은 귀찮아했으며 번거로워했다. 남자에게 휴대전화는 유용하면서 쓸모없는 것이었다. 남자는 가끔 자신에게 걸려들어 쓸모없이 되어버린 휴대전화에게 미안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래서 어떤 날에는 가끔씩 전원을 끄고는 집에 두고 나가기도 했다. 물론 그런 날에도 불편할 것은 없었다. 오히려 악필이나마 메모장을 오가며 한 순간, 한 단어를 적곤 하는 일을 즐기기도 했다. 남자는 휴대전화에게 미안함을 느끼기보다 조금 번거로워지는 게 더 편하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가끔씩 남자는 그랬다.


집으로 오던 길에 생각 없이 지하철 개찰구를 나선 남자는 순간 눈앞에 나타난 낯선 풍경에 습관적인 발길을 멈춰 세웠다. 반대쪽으로 나온 것이 분명했다. 2번과 4번이 보여야 할 출구 안내 표지판에 7번과 9번만이 있었다. 남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서는 두 번쯤 개찰구 쪽과 출구 쪽을 오가며 머뭇거리더니 방향을 가늠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평소 다니던 출구까지의 거리만 해도 200미터가 넘었다. 물론 이 남자는 그런 것에 연연하는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운동할 수 있으니 잘됐네 하고 마음먹을 사람인 거다. 그렇게 몇 걸음 옮겼을 때 남자가 듣고 있던 음악소리가 끊겼다. 전화가 온 모양이었다. 휴대전화의 화면을 들여다보니 저장되어있지 않은 번호다. 누굴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어쩌면 누구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밤 열한 시, 낯선 사람과 통화하기에 좋은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낯선 번호와는 다르게 귀에 꽂은 이어폰을 통해 들린 목소리는 낯이 익었다. 형이었다. 유아독존자처럼 살아가는 남자에게도 부모님이 계셨고, 형제가 있었다. 물론, 남자는 보통의 순간에는 그런 관계나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지냈다. 언제나 아들의 전화를 기다리다 기어코 부모님이 먼저 전화를 걸었고, 이번에도 남자보다 먼저 형이 전화를 걸어온 거다.

“안녕하세요, 형.”

남자의 첫 마디는 존대와 평대가 기묘하게 조합된 이상한 것이었다. 적어도 보통의 형에게 건넬 인사말은 아니었다. 형식을 갖추었지만 거리를 두는 묘한 표현을 쓰고 있는 거였다.

거의 보통은 잊고 지내는 주제에 이렇게 먼저 걸려온 전화를 받는 순간만큼은 남자도 미안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 미안함은 꼭 지키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 때의 미안함보다는 정말 별 것 아닌 일이라서 그 정도는 간단하다며 큰 소리를 쳐놓고는 간단히 실패한 다음 순간의 무안함에 가까운 것이었다. 무엇보다 남자는 누구에게 전화를 걸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저 데면데면한 인사를 나누고 나면 날씨가 어땠다느니, 계절이 어떻다느니, 경기가 저렇다느니 하는 식으로 의미도 없는 말을 주고받을 뿐이었다. 그나마의 이야깃거리마저 떨어지면 그냥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전화드렸다는 식으로 얼버무리고는 다음을 기약하며 서둘러 끊는 게 통화 방식 이었다.

남자는 형이 얼마쯤 취해있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의 근거는 형의 목소리였다. 수줍어하거나 말이 없는 편은 아니지만 이렇게 화통하게 말을 거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나마 기분 좋게 취한 것 같아 남자는 안심하는 거였다.


남자는 형을 대할 때도 세상을 대하듯 했다. 조금은 데면데면하게 보통은 어쩔 줄 몰라하는 거였다. 그래도 마음씨 좋은 형은 붙임성 없는 동생을 나무라거나 한 적이 없었다. 언제나 ‘하하하’하고 웃으며 자주 연락하고 지내자 하며 전화를 끊고는 했다. 남자는 그런 형의 ‘하하하’하고 웃는 모습이 좋았다. 시원하게 웃는 얼굴을 떠올리는 게 좋았다. 남자는 형을 좋아했다.

평소라면 벌써 끊었을 형은 여전히 ‘하하하’ 웃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오래전에 잘 챙겨주지 못해서 미안했다고 말했다. 남자는 왜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하는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그냥 그때는 그랬던 거라고 생각했다. 누가 누구에게 미안해하거나 사과해야 할 이유 같은 건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했다. 남자도 남자의 형도 그때는 몹시도 필사적으로 인생을 살아내는 중이었다. 살아가기 위해 먼저 살아내야 하는 시간을 견디고 있던 것뿐이었다. 우연히 그 시간이 겹쳐버린 탓에 서로 주변을 돌볼 수 없었던 것뿐이었다. 그냥 다 그런 거였다.

자꾸만 ‘하하하’ 웃으며 그때 더 챙겨줬어야 한다며 아쉬워하는 형에게 남자는 거듭 ‘그렇지 않다’는 답을 돌려주었다. 그렇게 남자는 집에 돌아와 의자에 몸을 파묻을 때까지 형과 통화했다. 그리고 오늘에야 형이 직장을 옮겼으며 그 직장이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형은 전화를 끊기 전에 다음에는 남자의 집에서 자고 가야겠다고 웃으며 말했다. 한 달에 서너 번은 괜찮을 거라며 그렇게 하자고 말했다.


남자는 누군가가 미안하다고 할 때 곤란함을 느꼈다. 별스럽지 않아 잊고 지내던 일들이 사과의 도마에 오르기라도 하는 날이면 남자는 비릿한 공포를 예감하며 움츠려야 했다. 특별히 두렵거나 역겹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입 속에 넣는 순간 반사적으로 위장이 거부하게 되는 비릿한 생선회를 억지로 씹어 삼키는 기분이었다. 남자는 그 기분이 몹시도 거북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미안함을 느낀다는 사실이 커다란 죄라도 되는 것처럼 온 마음을 짓눌렀다. 자신의 잘못 앞에 남자는 울 수도 없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미안해한다는 사실을 몹시도 미안하게 생각하는 게 남자의 마음이었다.

남자는 다른 사람이 남자에게 미안함을 느끼지 않을 만큼 소원해졌다.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멀어질 수 있다는 게 처음에는 놀랍더니 점점 무뎌져서 나중에는 아주 가끔 떠올렸다. 전화를 거는 일도 찾아가는 일도 점점 줄어들었다. 그래서 남자는 종종 전화를 받거나 누군가 찾아왔을 때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먼저 전화드렸어야 하는데 죄송해요.”

언제나 사과를 하는 사람은 남자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남자의 사과를 받아주었다. 정말 연락도 없고 찾아오지도 않아 서운하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더 깊이 사과할 수 있었다. 남자는 그거면 된 거라며 만족스러워하는 거였다. 사과할 수 있는 동안에 남자는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닌 것으로 비난받는 순간에도 남자는 기꺼이 사과하고 다시 사과했다. 잘못에는 미안함을 담아 사과하는 것이 당연했고, 잘못하지 않았다면 사과한다고 해도 흉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남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남자였기에 형의 전화는 남자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아직도 자기에게 미안하다 말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곤란하다고 느끼면서도 몹시도 안심하는 자신을 실감하며 어색해했다. 그럼에도 남자는 먼저 형에게 전화하는 일은 없을 거란 걸 알았다. 혹시라도 다시 형이 미안하다고 사과하지 않도록 미리 자기 몫의 미안함을 모아둬야 했다. 오랜 시간 후에 적어도 누가 누구에게 용서를 구하고 용서받는 일이 없도록. 우리 하는 말로 가볍게 ‘퉁’ 칠 수 있도록 그래야 했다.


남자는 이별을 전하는 사람이 미안해하지 않도록 언제나 가볍고 미련 없이 이별을 받아들이곤 했다. 그리고 정말로 미련 없이 까맣거나 하얗게 잊어버리고는 했다. 조금 더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야 남자는 그날들을 새삼스럽게 떠올리며 그때 더 잘해주지 못했던 일들을 미안해하곤 했다.

남자는 누군가가 자신에게 미안해하는 걸 몹시도 미안해하는 사람이었다. 미안해하게 만들지 않으려면 미안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미안해하는 마음을 보는 게 몹시도 미안했다. 그래서 남자는 연애를 못했다.



Q : 혹시 사랑은 미안함 인가요?

매거진의 이전글제 8화 의미 없이 사랑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