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빠이 이상
요절한 천재 작가 이상을 소재로 한, 제목부터 '이상'인 '이상 소설'이다.
세 편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각의 에피소드마다 화자를 달리해 이야기에 변화와 함께 긴장, 생동감을 높이고 있다.
주된 이야기 말고도 뭔가 암시하는 게 여럿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어쩐지 지금의 내게는 깊이 읽기 어려운 텍스트라 가볍게 읽고 말았다.
첫 번째 에피소드는 이상의 '데드마스크'다. 이상이 도쿄에서 죽었을 때 지인들이 뜬 데드마스크가 있다는 거다. 데드마스크가 진짜인가 가짜 인가 하는 문제에, 첫 번째 에피소드의 화자인 김연화 기자의 사랑이 진짜인가 가짜인가에 대한 의문이 겹쳐진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데드마스크' 사건과 관련된 인물이기도 한 '서혁민'이라는 인물의 수기다. 서혁민은 어려서부터 이상을 동경해 40년 넘는 세월 동안 이상의 발자취를 좇으며, 이상의 삶과 가까워지기를 바랐던 사람이다. 이상이 죽음을 앞두고 동경으로 향했던 것처럼 서혁민 역시 동경으로 간다. 그리고 이상이 죽은 병원을 찾아 주변을 둘러보거나 하며 보일 리 없는 것을 보고 듣고 회상한다.
나는 두 번째 에피소드도 가볍게 읽고 넘길 요량이었으나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된다.
109쪽 위에서 10번째 줄이다.
9번째 줄에서부터 적으면 '키는 십 미터 남짓. 그 수령의 기산점은 다이쇼보다는 쇼와 초기에 가까우니 산시로의 메밀잣밤나무는 아닐 것이다.'
오타다.
의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오타임에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바로 앞에서도 '모밀잣밤나무'라고 적은 걸 여기서 '메밀잣밤나무'로 적을 리 없다.
기묘한 실수다.
세 번째 에피소드는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이상의 '데드마스크'가 가짜로 판단하는 근거가 되는 논문의 저자 '피터 주'가 화자로 등장한다. 그는 독특한 출생이력을 갖고 있는데, 대만에서 미국으로 밀입국한 여성에게서 태어나 미국 내 한국인 부부에게 입양되어 자신이 미국인이라 믿고 자랐다는 점이다. 그런 그가 한국문학을, 거기에 이상을 연구한다는 건 어떤 필연성도 없지만 이 이야기에서는 운명적인 텍스트로 작용한다.
세 편의 이야기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천재 작가 이상의 천재성을 부정한다. 정확히는 이상이었던 사람 김해경의 천재성을 말이다.
천재로 살다 죽기 위해 계획되고 꾸며낸 삶을 살다 갔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도쿄에서의 죽음마저 의도적인 자살이 아니었는가 하는 의문마저 제기된다.
작가의 의도까지는 모르겠지만 한국 문단이 여전히 이상에게 사로잡혀 있음은 부정할 수 없겠다.
어떤 점에서 사로잡혔느냐고 하면 설명할 말이 궁하지만, 천재성이니 예술성이니, 문학성이니, 이해불가의, 몰이해의, 난해함을 고집한다고 느껴질 때면 그런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되는 거다.
이 소설은 잘 쓴 소설이기도 하겠지만 잘 만든 소설이라고 하고 싶다.
이상이라는 이상적인 소재와 이상이 남긴 텍스트와 이상에 대한 연구가 이미 충분하고도 넘치기에 구슬을 꿰어 목걸이를 만들 듯 잘 꿰기만 한다면 좋은 이야기가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잘 꿴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잘 꿰어 만든 목걸이 같다.
이상이라는 신비를 두르고 있는 천재 작가의 삶을 깊이 탐닉하면서도 휘말리지 않고 거리를 유지했다는 것도 보기 좋았달까.
아쉬운 점은 지나치게 이상 위주의 소설이었기에, 어디서부터가 창작이고 어디부터가 기존의 텍스트인지 모호하다는 거다. 반대로 이 모호함이 장점이 될 수도 있겠고, 의도한 바도 될 수 있겠지만 그런 이유에서 잘 쓴 소설이기보다는 잘 만든 소설이라고 한 거다.
김연수 작가의 단편과 장편을 번갈아 읽으며 느낀 건, 이 작가는 장편보다는 단편을 더 잘 쓰는 게 아닌가 하는 거다. 당분간은 김연수 작가의 작품은 내려놓기로 한다.
그러니까, 딱 그 정도라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