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에르노 『단순한 열정』을 읽고.
세상에 열정을 불사를 것이 많고 또 많다지만 사랑을 불쏘시개로 타오르는 열정만큼 뜨거운 것이 또 있을까?
아니 에르노의 작품을 읽고 있으면 과거의 작가들이 왜 그토록 '사랑'을 화두로 삼고 내려놓지 않았는지 이해하게 된다.
'사랑해야 한다'는 말은 사랑의 '필요'를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 없는 삶은 삶이라고 할 수 없기에 할 수밖에 없다는 '체념'에 더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살아가는 동안 꺼지지 않는 불꽃, 꺼져서는 안 되는 불꽃이 바로 사랑이 아닐까 하는 거다.
『단순한 열정』은 사랑에 빠진 여자의 이야기다. 첫 문장만 봐도 이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이 열정이 얼마나 뜨거운지 느낄 수 있다.
아니 에르노의 이야기다. 꾸며낸 이야기라는 말이 아니라, 자기 이야기라는 거다.
자신의 경험과 체험을 소설로 만들어내는 능력자, 아니 에르노는 다음의 문장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내 집에 와주기를 바라는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작년 9월이라고 함은 적어도 4개월 이상 이 열정적인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사랑이 호르몬의 작용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6개월이 한계라고 말하겠지만, 그들이 말하는 6개월에는 앞뒤로 미지근하거나 차가운 시간이 있을 것이기에, 이 여자처럼 4개월이 넘도록 완전히 '빠져'있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나 마찬가지가 된다.
그만큼 이 여자는 그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 그렇다고 맹목적이고 저돌적이어서 앞뒤를 전혀 분간하지 않고 달려드는 것은 아니다. 남자에게는 아내가 있고, 지위가 있고 책임이 있다. 여자에게는 남편은 없지만 마찬가지로 지위와 책임이 있다.
어쩌면 간단히 무너질 수 있는 경계를 침범하지 않고, 너무나 이성적으로 행동하고는 있지만 남자를 기다리는 일 외에는 다른 것은 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상태.
이 상태가 이 여자를 사로잡은 단순한 열정의 발열 상태다.
사실 이런 사랑을 얼른 이해하기가 어렵다.
유부남을 '미치도록 사랑'하면서, 거리를 유지한다는 것도 그렇고, 애초에 왜 하필 그 남자였을까에 대한(아, 왜 하필 그 남자인가를 묻는 건 이상하다. 이 사랑에 '왜'가 있었다면 단순한 열정이 아니라 복잡한 열정이라는 식의 제목이 붙었겠지) 것도 그냥 넘어가기 껄끄럽다. 하지만 이런 미친 사랑을 해보지 못한 것이 안타깝기도 하다.
묘한 기분이다.
이 소설을 쓰고 있는 시점에서 그토록 여자를 사로잡았던 남자는 여자의 인생 밖에 존재하는 무수한 주변인 가운데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이 이야기가 '수기'가 아닌 '소설'일 수 있고 말이다.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행위, 생각, 태도에 당당해서 부끄러움으로 쓴다거나, 누군가를 변호하고, 뭔가를 설명하기 위한 변명으로 삼으려는 모습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내 열정을 일일이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정당화되어야 할 실수나 무질서로 여겨질 수도 있다. 나는 다만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글을 쓰는 데 내게 미리 주어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내가 열정적으로 살 수 있게 해주는 시간과 자유일 것이다.
아니 에르노는 "이 작품을 완성하기만 한다면 죽어도 좋다"는 생각으로 쓴다고 말하기도 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 조금이라도 부끄러운 일이 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거다.
재밌는 부분을 발견했다.
(그러므로 자기가 겪은 일을 글로 쓰는 사람을 노출증 환자쯤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노출증이란 같은 시간대에 남들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싶어 하는 병적인 욕망일 뿐이니까.)
굳이 작품 속에서 '노출증'이라는 표현을 직접적으로 쓰고 있는 걸 보면 분명 그런 식의 비난을 여러 차례 받아왔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보여주고 싶어서 '일부러' 자신을 드러내는 욕망과 '나의 경험 쓰고자 하는' 마음을 같은 수준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을 것이다. 저급하고 저열한 것으로, 천박하고 비정상적인 것으로 말이다.
아니 에르노는 오히려 당당하다. 노출증이 갖는 병적인 욕망과 자신이 자기 이야기를 쓰고자 하는 일 사이에 놓인 '시간'이라는 결정적인 차이를 지적함으로써 두 가지가 다르다는 것을 간단히 설명해버리는 거다.
지나간 사랑을 부끄러워하거나 후회하지 않는 당당함.
그런 자신에 대한 당당함이 단순하지만 강렬한 열정의 근원이 아닐까.
여자는 필연적인 관계의 끝, 이별을 예감한다. 그러나 그러한 예감조차 열정을 사그러뜨리지는 못한다.
이야기를 여는 문장만큼이나 이야기를 닫는 문장도 멋있다.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같은 것을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사치가 아닐까.
사치에 대한 생각의 변화를 지켜보는 것이 흥미롭다. 내 생각은 어떻게 변했는지 돌아보면서 읽으면 더 좋다. 지금의 나에게 사치란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것'에 가깝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나 역시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을 사치라고 생각하고 믿게 될까.
좀처럼 그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까지나 사로잡히거나 사로잡는 열정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사치스러운 삶인가.
돈으로, 물질적인 것으로 부리는 사치보다 감정적인 사치 부리기가 더 어렵고 힘들어진다. 시간조차 늘 적다고 느끼고, 그나마도 마음 내키는 대로 쓰지 못하는 삶에 온 마음을 사로잡는 열정이 찾아든다면 얼마나 삶이 풍요로워질 수 있을까.
짧은 이야기,
프랑스의 한 여자의 이야기,
나와는 전혀 무관할 수 있는 이야기가 내 안의 열정을 자극할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하다.
다 타서 사라진다고 해도 좋겠다.
삶의 마지막까지 사치스럽게 보낼 결심이 이제 막 생겨났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