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나 폴러스 『꽃들에게 희망을』읽고.
그림과 짧은 이야기가 함께 담긴 동화다.
아이들이 읽어도 좋겠지만 세상과 삶을 조금이든 많이든 더 알게 되었을 어른이 읽어도 좋은 그런 이야기.
'경쟁'이라는 말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말이다.
경쟁 앞에 붙는 어떤 단어들은 우리를 숨막히게 하지만 그것을 거부하거나 거절하는 것도 간단하지 않다.
이유는 단순하다.
누구도 뒤처지거나 패배하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경쟁의 앞에 올 수 있는 단어 중에 가장 절실하고도 아픈 단어는 '생존'이 아닐까 한다.
'생존 경쟁'
무한 경쟁의 시대가 열린 지도 오래다.
익숙함을 넘어 당연하게 느껴지는 경쟁의 시대, 우리는 정말 생존을 위해 경쟁하고 있는 걸까?
생존을 위해 경쟁이 꼭 필요한 걸까?
그 너머에 더 중요하고 또 가치있는 것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그때 우리는 그 가치를 좇을 수 있을까?
이야기 속에는 많은 나비 애벌레들이 등장한다.
그 가운데 두 마리가 주인공이다.
세상에 태어나 땅을 기어다니며 풀을 뜯던 애벌레는 하늘을 향해 오르려는 다른 애벌레들이 만든 높은 탑을 보고 막연한 동경 혹은 호기심을 품는다.
'저 꼭대기에 오르면 뭔가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막연한 기대.
탑을 오르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아서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다른 애벌레들을 밀치고, 밟고, 짓눌러야 했다. 그 경쟁에서 패배한 애벌레는 영원히 디딤돌 역할 밖에는 하지 못하고, 때로는 떨어져 목숨을 잃기도 했다. 목숨을 걸고 타인을 짓밟고 위를 향해 올라가야 하는 세계.
하늘의 끝에 닿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그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간신히 정상 가까이까지 갔지만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오히려 꼭대기에 있는 애벌레들은 아래에서 올라오기 위해 경쟁하고 있는 애벌레들에게 진실을 숨기려고 하기도 했다. 만약 진실을 전했다고 해도 믿어줬을지도 알지 못한다.
'위'는 언제나 매력적이어야 하니까 말이다.
주인공 애벌레 중 한 마리인 검은 애벌레는 위에서 허무함을 느끼고 다시 땅으로 내려온다. 검은 애벌레가 탑에 오르기 위해 떠났던 시간에 노랑 애벌레는 나비가 되어 날개를 얻어 하늘을 날고 있었다. 검은 애벌레는 그 노랑 나비를 보고 자신 또한 나비가 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마침내, 검은 애벌레는 탑을 오르지 않고도, 다른 애벌레들을 짓밟지 않고도, 경쟁 없이도 탑의 꼭대기보다 더 높은 곳까지 오르게 된다.
모든 애벌레들은 날개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애벌레끼리 하늘로 오르기 위한 경쟁을 벌이는 것부터가 사실은 의미가 없었던 거다.
애벌레라는 껍데기를 벗고, 번데기가 되어 나비가 될 때까지의 시간을 견디는 자기와의 싸움은 필요할 지 모르지만 말이다.
이 동화같은 이야기(실제로 동화지만)가 너무 세상을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원래'의 세상이란 어떤 것인가? 누구나 최고가 되어야 하고, 1등이 아니면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며, 오직 위를 향해 나아가는 삶이 최선인 세계가 원래의 세상이라고 누가 정해두었나?
저마다가 추구하는 가치를 드러내려는 노력을 패배자 혹은 실패자의 변명이라고 폄하하는 세계가 자연스러운 걸까?
경쟁하고 또 경쟁해서 최고가 된 사람들, 자기의 성공을 위해 주변의 모든 것을 외면하고 위로만 올라간 사람들, 그 사람들은 정말 자기 삶에 만족하고 있을까?
우리는 눈으로 본 것만 믿는다고 하면서, 자꾸 눈으로 보는 것을 외면한다.
"나는 안 그럴거야."라면서.
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던 날이 있었을 거다.
"내 얘기는 아니야."라고.
허상인 줄 알면서도, 그럼에도 '그것이 더 낫다'고 가르치고 배운다.
날개의 가능성을 오히려 숨기면서.
이 이야기를 읽는다고 해서 뭔가 생각이 확 달라진다거나, 지금과는 다른 생활이 시작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있다'는 걸 아는 것 아닐까.
나에게도 날개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
이 무한 경쟁의 탑을 오르려는 세상에서 내려가는 길도 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