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혁 『가짜 팔로 하는 포옹』읽고.
기묘한 제목이라고 생각했다.
안에 담긴 소설들을 읽으면서 '김중혁 최초의 연애소설'이라는 홍보 문구가 참 기이하다고 생각했다.
기묘한 제목에 기이한 홍보문구에 앞에는 외로움이 뚝뚝 듣다가, 차츰 좌절하고 절망해서는 파괴를 원하는 지경에 이르더니 마침내는 돌아오기는 하지만, 왜 이런 이야기를 모아놓고 연애 소설이라고 했는지 요령부득 이다로 끝나는.
뜬금없는 줄 알지만 나는 좀처럼 꿈을 꾸지 않는다.
뭐, 그런 기분이었던 걸까?
내가 가끔 생각하는 그런.
아무 꿈도 꾸지 않는 것보다 차라리 악몽이라도 꿨으면 하고 바라듯이.
연애를 하고 있는지 아닌지 모르겠고,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 역시 연애를 하는 건지, 하자는 건지, 말자는 건지 모르겠는, 온통 요령부득인 것들 투성이기에 아무래도 좋으니 '연애'라는 단어를 넣어보자고 생각했던 건 아닐까.
아, 옮았나 보다. 도졌거나.
여기까지의 감상으로 조금이나마 설명이 됐을지 모르겠다.
어쩌면 이 소설집에 담긴 이야기들은 사랑은 한 줄도 들어있지 않고, 포기와 체념과, 고독과 외로움으로 가득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 기이한 것은, 읽고 나면 어쩐지 '좋은데'하는 느낌을 받는다는 거다.
<종이 위의 욕조>는 전시를 기획하고, 작품을 배치하는 일을 하는 큐레이터의 이야기다. 이 큐레이터는 '명사 분실증'이 있는데, 아주 흔히 쓰는 것들의 이름조차 종종 잊어버리고 기억해내지 못한다.
이름을 잃어버린다는 것.
도대체 이름을 잃어버리면 남는 게 뭘까?
이미지?
이미지가 남는다고 해도 명사 없이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있을지도 모른다.
작품 속에서는 한 작가가 이 큐레이터와 비슷한 증상을 겪는다.
둘은 제법 잘 통한다.
명사가 없어도 통하는 건 통한다.
연애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루어질 사람은 이루어진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종이 위의 욕조>는 읽을 때는 몰랐는데 다 읽고 나서 생각해보니 그냥 좋은 느낌으로 기억되는 작품이었다.
굳이 왜 좋았는지 답하라고 하면 이런 식으로 답하게 될 것 같다.
"아무 일도 없이 끝났기에, 우리가 아무 말 없이 지나쳤던 것처럼 그렇게."
이 작품을 다 읽기 전날이었나, 그 전날이었나,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과 정말 우연히 지나쳤다. 아무 일도, 아무 말도,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좋다는 것, 그건 자주 쓰는 명사를 잃어버려도 생활이 불가능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과도 비슷한 일이었다.
세상은 끝나기 전까지는 끝나지 않는다,라고 하면 조금 표현해 낸 걸까.
『가짜 팔로 하는 포옹』에서 제일 좋았던 작품은 <요요>다.
제일 마지막에 실린 작품이자, 가장 먼저 읽은 작품이고, 제일 좋아서 두 번 읽은 작품이기도 하다.
단편을 연달아 두 번 읽는 일은 정말 드문 일이다.
그만큼 좋았던 이야기다.
<요요>는 시계를 만드는 남자의 이야기다.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관계를 부수는 사람이다. 고리를 끊는 사람이다. 폐허 위에 서 있다. 고등학교를 다니던 내내 차선재의 일기장 맨 앞에는 그 말들이 적혀 있었다.
한 문장만 적는다는 게 문단을 적어버렸다. 하지만 다 읽는 게 더 좋으니 남겨두기로 한다.
가정의 불화로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던 날에 우연히 시계를 분해했다가 그 안에 담긴 완벽한 세계에 매료되어 시계의 세계로 뛰어들게 되는 남자. 한 여자를 사랑하고, 그 여자를 위해 시계를 만들기도 하지만 어느 날 여자는 의미가 불분명한 편지 한 장을 남기고 남자의 삶에서 사라진다. 몇 년, 몇십 년이 지난 후 남자는 여자와 재회하는데,,,
이런 식의 이야기다.
분명히 사랑 같지만 사랑인지 아닌지 불분명한 상태에서 끝나버리는 이야기.
세상에 태어나 자기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을 시계 하나가 영원히 미완성의 상태로 태어나지 못하는 이야기.
바보, 쪼다, 멍충이 같은 이야기.
전체적으로 고요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조용하게 나아가는 문장 사이의 호흡을 통해 전해지는 머뭇거림과 설렘, 망설임과 후회와 미련이 너무 생생하게 전해지는 묘한 감각.
뭔가 알 것 같지만, 확실히 이렇다고 말할 수 없는 갑갑함까지가 완전한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해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연애소설이냐고 묻는다면 '아니오'라고 할 수밖에 없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온통 가능성으로 가득한 감정의 혼돈 상태를 우리는 '연애'라고 부르지 않는다.
연애는 혼자 시작할 수도 있고, 혼자 끝낼 수도 있다고 하지만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그건 언제까지나 반쪽짜리 연애일 수밖에 없다.
갓 지어낸 새 밥도 밥솥을 열어 저어주지 않고 내버려두면 금세 묵은 밥 같은 모양이 되어버린다.
연애는 섞여들 때 진짜가 되는 것 아닐까. 나의 감정과 상대의 감정이 고루 섞일 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에 '연애 소설'을 표방하는 이야기를 낸다면, 그때는 '진짜 팔로 하는 포옹' 정도의 이야기가 담기지 않으면 곤란하다.
내 멋대로 하는 이야기지만, 언제까지나 멈춰있는 관계는 그 자체로는 비극이 아닐 수 있지만 결국엔 비극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아직 진짜가 아니라면 진짜가 되게 하고, 진짜라면 꼬옥 안고 있어야 한다.
나는 좀처럼 꿈을 꾸지 않는다.
하지만 감상을 쓸 때는 늘 꿈을 꾸는 기분이 된다.
어쩌면 그래서 꿈을 꾸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꿈은 충분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