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쪽짜리 프리즘도 무지개를 만든다.

이윤기 선생님의『무지개와 프리즘』 읽고.

by 가가책방

아는 이가 보내준 한 장의 사진을 보고 알게 된 게 하나 있어요.

그 사진은 무지개를 찍은 것이었습니다.

물론 무지개는 어디에나 있고, 무지개 사진도 드물지는 않지요.

이 사진이 특별하게 느껴진 이유는 비행 중에 찍은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늘을 건너는 동안 무지개다리를 만난 셈이니, 동화의 한 장면으로도 잘 어울릴 거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재미있는 건 같은 비행기에 타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무지개를 본 건 아닐 거라는 거예요.

좌석 방향이나 위치의 문제일 수도 있고, 마침 그 순간 다른 걸 하고 있거나, 잠들었을 수도 있고, 여하튼 그 사람들 중 일부만이 무지개를 봤을 거라는 건 분명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특별하다'라는 말을 쓸 수 있겠죠.

특별한 경험, 특별한 사진, 하는 식으로요.


감상을 시작하면서 사진 이야기를 한 이유는, 책의 제목에 있습니다.

『무지개와 프리즘』, 무지개는 자연이 보여주는 것이고, 프리즘은 과학이 만들어 낸 거죠.

본문에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책에 쓰여진 글이 지극한 진리가 아니듯이 프리즘이 만들어 내는 무지개는 진짜 무지개가 아니다. 하지만 책은 작은 무지개를 지어내는 작은 프리즘이다. 나는 프리즘을 깨뜨리고 싶지 않다.
프리즘이 발명된 뒤로도 무지개는 여전히 아름답다.
-『무지개와 프리즘』318쪽

책을 읽다 보면 종종, "이건 진리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글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지만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경험이 늘어나고, 생각이 넓어져가면서 그때 읽었던 그 글이 진리는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일이 적지 않지요. 진리라고 하면 모든 상황에서 모든 사람에게 적용해도 틀림이나 어그러짐이 없어야 할 텐데 그런 일은 드무니까요.

책은 읽는 이에 따라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책을 읽을 때도 예외가 아니라는 거죠. 그렇다고 적게 알기에 그 독서가 깊이가 없다는 것인가 하면 그것도 아닐 겁니다. 종종 농담으로 '그렇게 읽으면 안 된다'라고 할 때도 있지만, 사실 타인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거죠. 알지도 못하면서 말입니다.

'나는 프리즘을 깨뜨리고 싶지 않다'는 고백은 '나는 나의 독서를 응원하고, 나의 해석을 지지한다'는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프리즘이 발명된 뒤로도 무지개는 여전히 아름답다'는 말은 '나의 읽기가 어떤 생각으로 펼쳐지든 본래의 글의 가치를 해치지 않는다'는 믿음으로 읽히고요.


소개가 늦었는데, 『무지개와 프리즘』은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故 이윤기 선생님의 에세이입니다. 그리스 신화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조르바를 사랑하던 자유인을 꿈꾸는 자유인이셨을 그런 분이십니다.

『무지개와 프리즘』에서는 신화와 철학에서 이윤기 선생님이 발견한, 아마도 '가치'라고 적어도 아주 틀리지는 않을 통찰들을 풀어놓습니다.

깨달음의 태반은 글이 되지 못하고, 그 일부만이 책에 담겨 '깨달음의 찌꺼기' 같은 것이 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가치가 있다고 보는 이유는 독자가 프리즘이 되어 깨달음의 잃어버린 색을 찾아낼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분명 진리란, 통째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조각들이 저마다의 깨달음 속에서 이어지고 모이는 과정을 통해 전해지는 것일 겁니다.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이 꼭 필요하고 중요하지만, 그 글을 읽는 사람이 필요한 것도 그런 과정이 있기 때문일 테고요.


공감 가는 이야기가 참 많은 책이었는데 한 가지 의문을 품게 하는 문장이 있었습니다.

이 시대를 '벽의 시대'로 만든 것은, 이 시대가 '무통분만의 시대'이기도 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사마천에 이어, 베토벤 앞에서 다시 한번 옷깃 여미자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베토벤이 행복했다면, 우리가 그의 음악이 주는 행복을 누릴 수 있었겠는가?
-『무지개와 프리즘』65쪽

사마천이 궁형의 치욕을 감수하면서까지 사기를 완성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베토벤이 장애에 시달리면서도 곡을 계속 써냈던 것 역시 사실이고요. 하지만 사마천이 궁형을 당했기 때문에 사기가 완성된 것이 아니고, 베토벤이 장애에 시달렸기 때문에 곡이 쓰인 게 아니라는 것도 분명 사실입니다.

'완성'에는 고통이 필연적으로 뒤따른다고 하고, 고통의 크기가 완성도를 좌우한다는 말도 있지만, 아무래도 저는 고통 없이 완성된 걸작이 있었으면 하는 미련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쉽게 쓰인 시도 마음을 울릴 수 있고, 행복 속에서 완성된 작품도 걸작이 될 수 있을 텐데, 왜 고통과 괴로움이 걸작의 가치를 결정한다는 것이 진리처럼 받아들여져야 하는지 영 불만인 겁니다.

베토벤이 행복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행복한 베토벤의 음악을 더 큰 행복 속에서 즐길 수 있었을 테니까요.


느닷없지만, 이런 과정이 이윤기 선생님이 말한 '프리즘'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가 혹은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고 공감할 수도 있지만, 다르게 느낄 수도 있다는 겁니다. 다르게 느끼는 것은 '가능성'이지, '옳고 그름'을 가르는 시빗거리는 아니라는 거고요.


어제부터 약간의 미열과 온몸의 둔통과 약간의 두통이 찾아오더니 쉽게 떠나지 않고 있네요.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는데, 처음에는 보일러였다가, 나중에는 증기기관으로 옮겨 갔습니다.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보일러나 증기기관은 모두 무언가를 태워 물을 끓이고, 그렇게 끓은 물은 방을 덥히는 데 쓰거나, 달리는 데 쓰이죠. 다르게 말하면 에너지, 무엇인가에 쓸 에너지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인가를 태우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이윤기 선생님이 앞서 이야기한 베토벤의 행복과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여기에 빗대면, 베토벤의 불행이 땔감이 되어 명곡을 만들어 낸 셈이 되겠지요. 여기에 제 생각을 보태면 에너지를 얻는 방식이 무언가를 태우는 방법만 있는 건 아니라는 거지요. 바람도 있고, 파도도 있고, 조수 간만의 차도 있고요.

몸에 미열이 있다는 건 몸 안에서 무언가가 타고 있다고 생각해도 아주 틀리지 않겠죠. 대개는 타고 있는 것이 '나쁜 것'이라는 것도 상식으로 알고 있습니다.

인간이란 무릇 복잡한 존재여서 다양한 에너지를 필요로 합니다. 머리를 쓰고 몸을 움직이기 위해 '영양'이 필요하고, 더 깊고 넓은 생각을 위해 '지식'을 필요로 하고,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포용하기 위해 '이해'를 필요로 하고, 삶을 더 가치 있게 느끼기 위해 '죽음'을 필요로 하는 식으로 말이죠.

좋은 글은 좋은 땔감이 되어줍니다. 적은 양으로도, 오래오래, 격렬하게 타오르며 많은 에너지를 만들어 내죠. 하지만 간단히 좋은 글을 발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글이 좋다고 해도 가치를 알아보기가 쉬운 것도 아닙니다.


무지개가 떠오르기 위해서는 대기에 수분이 필요합니다. 비가 그친 후에 다시 해를 볼 수 있다면 해와 반대 방향에 떠있는 무지개를 기대할 수 있지요. 이렇게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요? 무지개를 만들기 위해 비를 내려 하늘을 씻었던 거라고요.

먼지가 쌓인 프리즘은 무지개를 만들지 못합니다. 햇빛을 받아들이지 못하니까요. 자연이 무지개를 보내기 위해 비로 세상을 씻어내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 안의 프리즘이 제대로 빛을 발하도록 늘 닦아야 하는 것 아닐까요.

오래된 동화 속에서 무지개의 시작을 찾아 떠난 사람의 이야기를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아마, 그곳에 도착하면 행복을 얻을 수 있었다거나 그랬었죠. 하지만 그건 파랑새를 찾아 떠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겁니다. 행복은 언제나 우리 가까운 곳에 있다는 말은 다만 듣기 좋은 허허로운 것이 아니니까요.

우리 안에 프리즘이 있다면 무지개의 시작은 우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만의 프리즘 하나쯤, 누구나 갖고 있으니 이제 오래된 먼지를 닦고 털어내는 일만 남은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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